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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Apr 22. 2022

세금의 세계사

세금의 종류와 세금으로 인해 발생된 사회적인 변화를 알아보자.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세금은 국가 경제를 지탱하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세금을 활용해서 국가 경제를 발전시킬 수도 있고 복지를 위한 정책을 더 많이 내놓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금을 잘 쓰기 이전에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징수할 수 있는지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현재가 아닌 과거에는 어떤 형태로 세금을 부과하고 징수했는지 알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울 것 같아 세금의 세계사를 한 번 들여다 보고자 한다. 


세금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한번 알아보자. 


Ⅰ. 햇빛 도둑


최고의 징세 기술은 가장 적은 고통으로 가장 많은 거위털을 뽑는 것과 같다. 


1960년대 초반, 왕은 돈이 모자랐다. 이 문제는 윌리엄 왕과 의회가 자초한 것이었다. 인기에 영합해, 국민들이 질색하던 세금을 폐지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자금이 부족했다. 어떻게 해결했을까?


영국의 모든 집에는 난로가 있었다. 영국인들은 1066년 노르만족의 침입 이전부터 연무세 또는 굴뚝세로도 불린 난로세를 여러 방식으로 교회에 내고 있었다. 


그러다 1662년에 난로세가 법으로 강제되면서 20실링(현 가치로 5천 달러)이 넘는 주택은 모든 화덕, 난로, 벽난로 1개당 1실링을 연 2회 납부해야 했다. 


그때까지 직접세의 부담을 지지 않았던 사람들도 이 조치로 갑자기 납부 대상이 되었고 심지어 구호 대상자까지 여기에 포함되었다. 


건당 수수료를 받던 징수원들은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집안 곳곳 남기지 않고 뒤졌다. 이들은 6개월에 한 번씩 남의 집에 들어가 난로 개수를 세었고 이 과정에서 영국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 


더욱 기분 나쁜 건 난로세가 프랑스에서 기원한 세금이라는 점이었다. 영국인들은 이 세금을 증오했고, 이것이 1688년 명예혁명을 일으킨 불만의 큰 요인이었다. 


새로 왕이 된 윌리엄과 메리는 국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재빨리 이용했다. 영국의 모든 난로에 영원히 폐하를 기리는 공덕비를 세우기 위해 이 세금을 없앤 것이다. 


그러자 문제가 생겼다. 윌리엄이 전 왕인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킬 전쟁을 준비하느라 네덜란드로부터 빌린 돈이 아직 남아 있었다. 아일랜드에서도 분규가 일어났고 유럽 대륙에서 벌인 9년 전쟁 비용도 갚아야 했다. 


스코틀랜드에 남아 있는 제임스 2세의 잔당도 소탕해야 했다. 국내에도 소규모 통화위기가 닥쳤다. 무슨 수로 이걸 다 갚을까?


1696년에 해결방안을 찾았다. 놀라지 마시라. 또 다른 세금이었다. 주택, 빛, 창문에 대한 세금으로 간단히 창문세라고 한다. 


징수원들은 이제 집 앞을 지나며 밖에서 창문만 세면 되었다. 집 안에 들어가지 않으니 프라이버시 침해도 없었다. 납부자와 다툴 일도 없고 자진신고도 필요 없었다. 


창문은 숨길 수 없으니 탈세도 불가능했다. 난로세 덕분에 조세 기반은 이미 다 갖춰져 있었다. 


또한 창문이 많을수록 부자일 가능성이 높아 조세 부담 능력이 입증되니 공정한 세금으로 간주되었다. 다른 법과 마찬가지로 창문세도 최초에는 임시법으로 도입되었지만 나중에 영구법으로 바뀌었다. 


시행 초기에는 창문 10개까지는 정액으로 1주 택당 2실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금액이 커졌다. 


시민들은 곧 세금을 내는 대신 창문을 틀어막기 시작했다. 1718년이 되자 정부는 세금이 기대만큼 걷히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해결책으로 세금을 줄이는 대신 오히려 늘리는 방식을 택했다. 


그 결과 시민들은 더욱 필사적으로 창문을 없앴다. 창문이 거의 없는 집들이 지어졌다. 어떤 집은 처음부터 창문을 벽돌로 막은 채로 건설되었다. 


나중에 집주인이 필요하면 벽돌을 부수고 유리를 끼우도록 한 것이다. 심지어 공동주택 한 층 전체에 창문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아직 전기나 가스, 석유를 이용한 조명이 도입되기 전이라 그을음 나는 수지 양초나 골풀 양초에 의존하는 시절이었으므로 햇볕과 신선한 공기를 차단하는 것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일이었다. 


창문세는 누진적이지도 않았다. 시골의 임대료 10파운드짜리 주택이 런던의 임대료 500파운드짜리 주택보다 창문이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가난한 시골집에 더 많은 세금이 부과되면서 농촌 주민들이 타격을 받았다. 가장 고통을 겪은 쪽은 도시 빈민들이었다. 이들이 거주하던 창문 많은 대규모 공동주택은 세금이 많이 나왔다. 집주인은 세금을 줄이려고 별생각 없이 창문을 판자로 틀어막았다. 


그러자 의도치 않았던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났다.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혁명기에 도심지에 유행했던 여러 전염병 중에서 특히 홍역, 콜레라는 좁고 축축하며 창문 없는 집에서 더욱 창궐했다. 


Ⅱ. 죽음과 세금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세금은 권력이다. 세금 수입이 없어지는 순간, 왕이든 황제든 정부든 권력을 잃는다. 


고대 수메르 제국의 왕부터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 국가까지 이 법칙이 항상 적용되었다. 세금은 국가가 움직이는 데 연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세금이 줄어들면 지배력도 줄어든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전쟁부터 이라크 전쟁까지 모든 전쟁의 비용은 형태만 다를 뿐 세금으로 충당되었다. 


세금은 전쟁을 가능케 한다. 전쟁을 끝내려면 세금을 없애야 한다. 알렉산더 대왕부터 나폴레옹과 그 뒤에 출현하는 정복자까지 모든 정복자의 목적은 세원이 되는 토지, 노동력, 생산물 그리고 이익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정복자들은 먼저 약탈하고 다음은 세금을 거두어간다. 조지 버나드 쇼의 작품 속 카이사르는 세금을 전 세계 모든 정복자의 주요 사업이다라고 말한다. 


칭기즈칸은 중국을 정복한 다음 다른 정복지와 마찬가지로 중국인을 말살하려 했다. 그런데 이게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중국은 당시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였기 때문이다. 


엘루 추사이라는 참모가 죽은 농민을 세금을 내지 못한다고 진언했다. 칭기즈칸은 깨달았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세금의 눈으로 보면 또 다른 세상이 보인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어딘가에는 세금과 관련된 내용이 있다.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은 마리아와 요셉이 그곳에 세금 신고를 하러 갔기 때문이다. 


세금이 없었다면 인간은 달에 첫발을 내딛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 간에도 세금 문제가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참정권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여성들이 공장에 투입되어 소득세를 납부하면서부터 허용되었다. 


자연재해에도 세금 이야기가 나온다. 세금을 내는 새로운 노동자 계급이 출현한 것은 흑사병으로 중세의 봉건제도가 사실상 무너졌기 때문이다. 


또한 재난 뒤의 재건 과정에도 세금은 등장한다. 런던 대화재가 발생한 후 도시 재건에 필요한 기금은 주로 석탄에 부과한 세금으로 충당했다. 


   Ⅲ. 세금 구조를 바꾼 흑사병


오늘날 봉건제도로 알려진 중세의 통치제도는 근본적으로 세금으로 엮인 구조였다. 꼭대기에 왕이 있었다. 신으로부터 통치권을 물려받았기에 부의 근원인 모든 토지를 소유한다. 토지의 일부, 약 4분의 1은 왕이 갖고 나머지는 교회와 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그 대가로 귀족들은 생산물, 수입, 노동력의 일부, 그리고 왕의 요구가 있으면 기사와 병사를 제공하며 충성심을 바쳤다. 


이처럼 생산물, 수입,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토지와 보호를 제공받는 역학구조는 먹이사슬을 타고 내려가 사회 최하층의 농노까지 적용되었다. 


농노는 로마 노예의 후손이었다. 그들은 기사, 귀족, 교회, 왕 등 지주에게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대략 일주일의 반은 지주의 토지에 가서 일하고 나머지 시간에 지주에게 받은 자신의 땅뙈기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추수 후에는 수확물의 일부분을 바쳤고 영주가 운영하는 방앗간에서 곡물을 빻고 또 일부분을 바쳤다. 


가축을 도살하면 고기를 바쳐야 했다. 이들은 토지에 예속된 몸이어서 토지주가 바뀌면 새로운 주인을 따라갔다. 주인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타 지역으로 이주할 수 없었으며 만일 도망가면 범법자가 되었다. 


농도의 신분은 기사나 귀족처럼 세습되므로 몇 세대가 지나도 노예 같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봉건제도는 근본적으로 세금 구조였다. 군사력으로 유지되는 통제 및 지배 체계였다. 


그런데 1300년대 중반에 흑사병이 터졌다. 유럽 전체 인구의 60퍼센트에 해당하는 5천만 명이 사망했다. 특히 인구의 90퍼센트가 모여 사는 농촌지역에 타격이 컸다. 


통계치마다 다르긴 하지만 영국의 인구는 600만 명에서 200만 명으로 3분의 2가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전역에 걸쳐 봉건제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한 역사가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하인들의 일손이 부족했다고 기록하였다. 


농노는 부족했지만 관리되지 않고 버려진 땅은 남아돌았다. 그 결과로 임금이 상승하고 지주의 수입은 감소했다. 반면에 1340년에서 1380년 사이에 농촌 일꾼들의 구매력은 40퍼센트나 상승했다. 


많은 농노들이 돈을 내지 않고도 자유의 몸이 되었다. 질병에서 살아남은 농노들을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 영주들은 자유를 주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토지에서 일한 대가를 주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농노들이 처음으로 돈을 만지기 시작했다. 임금 상승을 저지하기 위해 귀족들은 법 제정으로 맞섰다. 1349년 흑사병이 런던을 강타한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때 임금과 물가에 상한선을 정하는 법안이 통과되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2년 후 노동자 법령이 반포되어 농부, 마구 제조인, 재단사, 어부, 정육업자, 양조업자, 제빵업자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직업의 임금에 일일 상한선이 책정되었다. 


1359년에는 거주지를 이탈한 노동자를 처벌할 수 있는 조항이 도입되었고 1361년에는 노동자 법령이 더욱 강화되었다. 


하지만 대세는 막을 수 없었다. 하층민들이 좋은 옷을 입기 시작해 때로는 귀족과 같은 수준의 옷을 입기도 했으며, 식생활도 개선되었다. 


이를 억제하기 위해 1363년 사치 금지법이 제정되어 식단을 제한하고 각 계층의 평민이 입을 수 있는 옷의 품질과 색상까지 세세하게 규제 했다. 


한편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나중에 백년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었다. 1377년 리처드 2세가 아직 미성년자일 때, 랭커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은 군사령관이면서 영국에서 가장 부유한, 실질적인 정부의 수장이었다. 


그는 점점 치솟는 전쟁 비용을 대기 위해 인두세를 부과했다. 귀족과 농민 모두가 대상이었고 귀족들도 찬성했다. 세금을 거두면서 자신들도 조금씩 챙길 심산이었다. 


평민들에게 이번 세금이 달랐던 점은 현물이 아닌 1인당 4펜스씩 현금으로 납부했다는 점이다. 


인력 부족의 결과로 생긴 변화가 반영되었다. 즉 평민들도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회성으로 끝날 예정이었지만 인두세는 2년 후에 또다시 실시되었다. 기대한 것만큼 걷히지 않자, 세 번째 인두세가 도입되었는데 15세 이상의 모든 사람에게 12펜스, 즉 1실링씩 정액으로 부과되었다. 


이는 노동자의 일주일 치의 임금과 맞먹는 금액으로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똑같이 납부했다. 결국 노동자 계층에게만 힘든 세금이었다.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납세자 등록을 피했다. 모금액이 적은 것을 보고받은 랭커스터 공작은 화를 냈다. 하지만 시민들은 이미 세금을 다 냈으며 더 이상 낼 수 없다고 반박했다. 


이후 농민의 난으로 이어지게 된다. 


   Ⅳ. 채무와 인플레이션은 숨은 세금이다. 


세금을 아무리 많이 거두어도 정부 지출액보다 항상 모자란다. 재정수지가 흑자를 기록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정부의 공약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려면 여러 다른 방안을 모색해야 하는데 그중 제일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채무다. 


물론 채무는 말 그대로 세금은 아니다. 그러나 정부가 이를 이용하는 방식을 보면 세금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미래로 이월되는 세금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했고 이를 완전히 상환한 것은 100년이 지난 2015년이었다. 사실상 우리 세대는 열심히 일해서 고조부 세대가 진 빚의 이자를 갚은 셈이다. 


사실상 우리 세대는 열심히 일해서 고조부 세대가 진 빚의 이자를 갚은 셈이다. 


현재 미국의 국가 채무는 22조 달러에 이른다.(현재는 더 많다.)


조지 부시 행정부 시절 두 밸로 늘었고 버락 오바마 정부 하에서 다시 두 배로 늘었다. 그리고 트럼프 정부를 거치면서 이제 미국은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이 100퍼센트를 웃도는 빚쟁이 국가가 될 지경에 있다. 


영국의 국가 채무는 2조 파운드이며 독일은 2조 1천억 유로, 프랑스는 2조 3천억 유로, 이탈리아는 2조 4천억 유로에 이른다. 


이 금액을 갈수록 더 커질 것이다. 거의 모든 선진국이 과도한 채무 문제를 안고 있지만 국가재정은 계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 결과 국가의 채무는 계속 증가했다. 


국가는 도대체 누구로부터 빌려오는 것인가? 미국의 경우 30퍼센트는 해외, 그중에서 중국과 해외 투자사에서 차입하고 30퍼센트는 사회보장 펀드나 연금펀드의 형태로 연방정부로부터 빌려온다. 


대부분의 부채는 화폐가치가 상당히 절하되지 않는 한 상환 가능성이 거의 없다. 거의 해결할 가능성이 없다고 보면 된다. 


[ 글을 마치며 ]


지금이야 시간이 지나서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생각이 되지만 영국의 창문세라는 것은 상당히 의아한 부분이 많이 존재한다. 


창문의 개수로 세금을 매기고 징수한다는 발상 자체가 뭔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당시 논리로는 창문을 많이 가지고 있는 건물은 규모가 크기 때문에 공평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지만 건물이 크다고 해서 창문이 더 특별하게 많았을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사람들이 창문을 없애는 효과를 만들어냈고 건강까지도 해치는 나쁜 세금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지금까지도 영국의 과거 건축물들이 창문이 존재하지 않는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기형적인 방편이라고 생각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리하지 않았지만 세금 외에도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으로 인플레이션이 있다고 생각이 된다. 


인플레이션은 물가 상승을 의미한다. 


물건의 가격이 상승하게 되면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이 가진 자산이나 소득과는 상관없이 모두 공평하게 적용이 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은 소득이 많은 사람보다 소득이 적은 사람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때문에 인플레이션은 소리 없는 도둑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이 부분도 분명히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 도서 : 세금의 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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