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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Sep 22. 2023

일본이 온다

일본의 부상, 한국 경제의 위기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최근 일본의 경제적인 변화의 바람이 심상치가 않다. 


잃어버린 30년을 벗어나서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오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뭔가 성과가 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만 해도 일본은 우리와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기술적인 격차나 문화적인 격차가 존재하는 나라였다. 


소니와 아이와 파나소닉으로 대비되는 카세트 플레이어나 플레이스테이션, 세가 세턴 같은 오락기기에서부터 하이 테크로 불리는 볼펜까지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우수하다는 생각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가 일본 못지않은 아니 더 낫다는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고 실제로 글로벌 평가에서도 일본보다 나은 기업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나아가 일본은 앞으로도 지속해서 경제정체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이 절대적이었다. 


최근에는 이런 예상과 달리 일본의 부상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물론 아직 완전한 부상을 말하기에는 이른 감이 있지만 예전과는 확실히 다른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보인다. 


그런 일본은 과거 어떤 이유로 추락하게 되었는지 정말 침체의 터널을 지나 부활을 하게 될 것인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Ⅰ. 버블이 꺼진 자리에 불황 블랙홀이 열리다. 


일본 경제는 4번의 커다란 경제적 쇼크 때문에 장기 침체에 빠졌다. 


첫 번째 쇼크는 1985년의 플라자 합의였다. 


플라자 합의는 미국과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의 5개국 재무장관과 중앙은행장들이 미국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 모여서 달러화 약세와 엔화 강세를 유도하기로 한 합의를 말한다. 


달러 강세로 무역수지 적자에 허덕이던 미국이 달러화 약세를 유도함과 동시에 계속해서 무역흑자를 내고 있던 일본을 압박해 엔화 강세를 유도했다. 


이 합의에 의해 당시 1달러당 240엔대였던 엔화가 1주일 만에 8.3% 내려가며 엔화 강세로 전환되더니 2년에 걸쳐 120엔대로 급격히 절상 되었다. 


이러한 엔화 강세는 일본의 수출 기업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환율변동으로 말미암아 미국 시장의 판매가격이 급등한 것이다. 


일본 기업은 대미 수출에 큰 타격을 받았고, 일본 경제도 급속하게 엔화발 불황에 빠져들었다. 


수출이 큰 타격을 받자 일본 정부는 내수를 진작시켜 불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기준 금리를 낮추는 등 시중에 돈을 푸는 조치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 기업들의 대미 수출이 시차를 두고 회복되기 시작했다. 


기업들이 뼈를 깎는 원가 절감 노력 등을 통해 환율 충격을 흡수해 나간 것이다. 


그러자 수출 기업들이 벌어들인 외화와 일본 정부가 푼 돈까지 합쳐져 일본 내에 돈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풀린 돈이 주식과 부동산에 몰렸고, 자산버블이 급속하게 생겨난 것이다. 


일본의 주식과 부동산 가격의 변화를 보면 전후 고도성장기에 꾸준히 상승하던 주식과 부동산 가격이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급격히 상승했다. 


닛케이 주식이 4배 이상 올랐고, 6대 도시의 땅값 역시 3배 이상 올랐다. 


이러한 자산 가격의 가파른 상승과 지나친 과열을 정부가 막아야 했지만, 일본 정부는 이것을 막지 못했다. 


그러다 거의 폭발 직전까지 급등한 1990년 경에 일본 정부는 그제야 긴축 조치를 시작한다. 


은행의 부동산 대출을 금지하고 기준 금리를 확 내리는 등이 조치를 단행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가 너무 급작스럽고 강력하다 보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이번에는 주식과 부동산이 급락하기 시작했다. 


1990년에는 주식이 1991년에는 부동산 가격이 급격하게 추락했음을 알 수 있다. 


한때 4만 엔 가까이 갔던 닛케이 평균 주가는 1만 엔 이하로 떨어졌고, 1991년에 300까지 간 부동산 가격이 2005년에 100까지 하락했다. 이러한 자산의 급락은 버블기에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한 수많은 개인과 기업에 타격을 주었고, 그 영향으로 일본 경제 전체가 크게 휘청이게 된다. 


충격에 빠진 일본 국민들은 버블의 발생과 붕괴를 가져온 정부의 무능을 질타하며 투표로 심판했다. 


그 결과 전후 안정을 구가했던 자민당 정권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재임 기간 1년을 넘기지 못하는 수상도 여러 명 나왔다. 


때문에 경제대책들도 일관성 있게 추진되지 못했고 미봉책만 남발되었다. 


Ⅱ. 연속된 경제 쇼크와 개혁의 실패


일본 경제가 1997년에 두 번째 쇼크를 경험하게 된다. 


대개 1997년이라고 하면 우리 국민들은 IMF 경제 위기를 많이 떠올린다. 


아시아발 외환위기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주어 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에 일본도 큰 어려움에 빠졌다. 버블붕괴 후 근근이 버티던 일본 경제가 본격적인 불황에 빠진 것이 바로 이때부터다. 


재무구조가 부실한 많은 한계 기업들이 도산했을 뿐 아니라 이 기업들에 대출해 준 금융 기관도 함께 부실해졌다. 


부실화된 금융 기관 때문에 추가 대출을 받지 못해 흑자도산하는 기업도 연쇄적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익도 잘 내고 경영도 잘하는 회사가 단기적인 자금을 변통하지 못해 도산하고 마는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에서는 복합불황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실물경제와 금융 부문이 서로 엮이면서 함께 불황을 맞았다는 뜻이다. 


이 시기에 일본 경제는 전후 처음으로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또 안정적이던 실업률도 5%대로 급등했다. 특히 전후 처음으로 청년들의 취업이 어려워졌는데 이때를 제1기 취업빙하기라고 부른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전후 처음으로 생산 가능 인구까지 감소하기 시작한다. 


생산 가능 인구가 줄면서 경제의 활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부터 일본 경제는 본격적인 디플레이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수요가 약하니 기업은 가격을 낮추고 소비자는 가격이 더 떨어질 것을 예상하고 구입을 미뤘다. 


이 시기에 소매 시장에서는 할인판매 가격파괴 같은 단어가 일상화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중앙은행의 기준 금리를 제로 수준까지 인하하면서 경기를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한번 빠졌던 디플레이션의 악순화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버블경제 붕괴 후 근근이 버티던 일본 기업과 국민은 본격적으로 경제 위기를 체감하게 되었다. 


이러던 차에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이 다시 한번 일본을 덮친다. 


이것이 일본 경제의 세 번째 쇼크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미국에서 발생해 유럽으로 전이된 경제 위기였지만 당시 일본도 자본주의 경제 진영의 큰 축이었기에 유탄을 맞았다. 


일본 경제는 2009년 -5.4% 성장률을 기록하며 전후 최대의 하락 폭을 기록했다. 


또 실업률도 5.5%로 급등했으며 특히 청년들의 취업이 더욱 어려워졌다. 이때부터 제2의 취업 빙하기를 경험한다. 


이번에는 엔화 강세까지 겹쳐 엔화 강세, 수출 악화, 수입 물가 하락, 디플레이션 심화라는 악순환에 일본 경제가 다시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일본 국민들은 이러한 경제 위기를 자민당 정권으로는 더 이상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2009년 민주당으로 정권을 교체하는 정권 심판을 단행했다.


Ⅲ. 아베노믹스는 왜 반쪽짜리가 되었나?


아베는 2012년 12월부터 2020년 9월까지 역대 최장기간 집권한 총리였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일본경제재생본부를 설치하고 분배 위주 정책에서 성장 위주 정책으로 경제 정책을 재선 회했다. 


그리고 3개의 화살이라는 경제 정책을 바탕으로 아베노믹스를 시작했다. 3개의 화살이란 과감한 금융 완화와 적극적인 재정, 감세와 규제 완화 정책이었다. 


그중에도 특히 과감한 금융 완화 정책은 2년 사이에 통화량을 2배로 늘리는 소위 차원이 다른 금융 정책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8천 엔이던 주가가 1만 5천엔 수준으로 회복되었고, 시중에 다시 경제의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또 통화량 증가에 따른 엔저 효과로 수출 기업들이 살아나기 시작했고 외국인 중심의 관광산업도 활성화되었다. 


이러한 아베노믹스의 최대 수혜자는 기업들이었다. 지속적인 산업 부양책과 규제 완화, 통화 공급과 엔저 효과 등으로 기업들의 이익은 확실히 개선되었다. 


더구나 주식 시장이 활황으로 돌아섰고 부동산 시장이 회복되면서 소비가 일부 개선되었고, 미미하지만 디플레이션이 인플레이션으로 전환되기도 했다. 


기업 경기가 회복되자 정규직 고용이 늘기 시작했고, 비정규직 고용도 함께 늘면서 실업률도 크게 낮아졌다. 


하지만 아베노믹스는 반쪽짜리 개혁이었다. 기업을 중심으로 한 공급 사이드의 정책은 혜택을 톡톡히 보았지만 가계를 중심으로 한 수요 사이드는 여전히 뒷전에 밀려나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나서서 기업들에게 임금인상을 종용했지만 기업들은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이용해 현금을 쌓아두기에 바빴다. 


Ⅳ. 센카쿠 분쟁과 혐중 정서의 시작


2010년은 일본인들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해였다. 특히 보수 우익들에게는 치욕의 해이기도 했다. 


먼저 2010년에 일본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의 자리를 중국에게 내주었다. 


일본은 1968년 서독을 누르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일본은 오랜 세월 동안 탈아입구, 즉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의 일원이 되겠다는 강한 욕망을 가지고 근대화와 경제발전을 추진했다. 


그런 일본이 드디어 유럽의 선두국가 서독을 누르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니, 얼마나 강한 자부심을 가졌겠는가?


중국에 세계 2위 자리를 내어준 것은 그런 일본인들의 자부심이 크게 손상되는 일이었다. 


그간 일본은 아시아를 비근대적인 국가들로 치부했고, 특히 중국을 지나라고 비하하며 내심 낮추어 보았다. 


청일전쟁과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은 침략의 대상이었고 만주국처럼 위성국가를 세워서 지배하던 국가였다. 


그러던 중국에 세계 2위 자리를 빼앗긴 것은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했다. 


중국은 13억 3천만이 넘는 인구대국이 아닌가? 1억 2천만의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던 2010년 9월 일본에 치욕적인 일이 발생했다. 센카쿠 열도는 중국과 영토분쟁이 있던 지역이었다. 

일본은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중국은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해 왔다. 


다만 일본이 먼저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기에 중국이 문제를 제기할 때만 양국이 부딪히는 곳이었다. 


2010년 9월 7일 오전, 센카쿠 열도 주변에서 조업하던 중국 어선과 일본의 해상보안청 순시선이 충돌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상보안청은 이를 의도적인 공무집행 방해로 간주해 중국 어선 선장을 체포했다. 


이에 중국은 강력히 항의하며 선장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일본은 오히려 구속기간 연장을 발표하며 대항했다. 


그러자 중극은 일본 기업인 4명을 군사관리구역 불법촬영 협의로 구속하고, 또 전자제품과 자동차 생산에 필수적인 희토류의 대일본 수출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중국의 이러한 압력행상에 못 견디고 일본은 9월 24일 중국인 선장을 석방했지만 중국은 일본 기업인 4명 중 3명만 석방하고 1명은 외교카드로 계속 잡아두었다. 


이에 일본인들이 격분해 10월 2일 도쿄에서 센카쿠 열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대규모 방중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중국 사람들도 이에 뒤질세라 시안과 청두 등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를 했다. 


이러한 양국 국민의 시위는 2012년까지 계속되었고 일본과 중국의 갈등은 양국의 제품 불매 운동으로도 연결되기도 했다. 


[ 글을 마치며 ]


역사적으로 일본이 부상하게 된 이 유과 추락하게 된 이유를 살펴본 뒤에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일본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의 전략적인 지원으로 인해서 경제 안정이 단기간에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에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자체 기술력이 합쳐지면서 전후복구가 예상보다 쉽게 이뤄졌으며 한국 전쟁까지 발생되면서 일본은 예상 밖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내게 된다. 


나아가 일본 기업들은 전쟁 패배에 따른 절치부심한 직원들의 기술력 발전에 힘입어 세계를 뒤흔들만한 새로운 제품들을 내놓게 된다. 


이는 일본이 제2의 경제 대국이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지만 이는 다시 미국에 위협이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미국은 일본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플라자합의를 통해서 일본 엔화를 평가 절상하게 된다. 


일본이 추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엔화의 평가절상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엔화 평가절상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품 경쟁력을 만들어냈고 나아가 재무 관리를 발전시킴으로써 원가 절감을 통한 경쟁력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후 미국 일본 반도체 협정이 발생하게 되고 한국과 대만 등의 나라에서도 반도체가 생산되게 되면서 일본은 점체 세계 경제에서 영향력을 잃어가게 된다. 


결정적으로 중국이 자국 시장을 개방하면서 일본은 세계 경제에서 담당하게 되는 비중이 줄어들게 되고 일본은 중국에 세계 2위 자리를 내주게 된다. 


이후에도 일본 엔화는 지속해서 강세를 유지하게 되고 엔화 강세로 인해 수출 경쟁력을 떨어지게 되었지만 수입 제품의 가격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게 됨으로써 일본 경제는 디플레이션의 늪에 빠지게 된다. 


일본 국민들은 자국에서 생활하고 소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현금이 최고의 자산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금리를 통해서 은행에 저축하는 가계의 비중을 줄이고자 했지만 가계는 은행에 있던 현금을 집에 쌓아두는 형태로 변화했을 뿐 소비가 늘지도 않고 투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경제 침체를 벗어나고자 정부 기업 가계의 3대 축 중에서 정부가 먼저 나서서 금융 완화 정책을 만들기로 한다. 


이를 통해 수출 경쟁력을 높이려고 하였지만 이미 경쟁력이 사라진 일본 기업들은 늘어난 매출이나 손익을 재투자하지 않고 현금으로 쌓아두었고 경제 활성화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기업만 배가 부르게 되는 효과가 나타나게 되고 가계는 현금성 자산이 줄어드는 현상을 겪게 되면서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낮아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아베노믹스는 약간의 성과를 만들어내고 멈추게 된다. 


현재는 기시다 총리의 새로운 경제 정책이 진행되고 있는데 YCC로 대표되는 무제한 양적 완화 정책이다. 


이로 인해서 일본은 역사상 최저의 엔저 상태를 만들어내고 있고 기업의 수출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는 형태이며 외국인 투자자본도 유입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나아가 일본 정부는 예전과 달리 기업들에게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주식 관리를 기업에 요청하고 있고 PBR 1배 이상, 배당금 확대, IR Report를 영어로 발행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재의 성과는 1년 정도의 변화된 성과일 뿐 아직 완벽한 턴어라운드가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기조를 지속해서 유지해 나간다면 일본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형태의 경제 발전을 이루어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앞으로도 일본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 


참고 도서 : 일본이 온다. (김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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