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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Oct 14. 2023

하룻밤에 다 읽는 경제 에스프레소 금융

밤새워 읽고 싶을 만큼 재미있는 돈 이야기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옷, 음식, 집을 의미하는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생활하는 데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요소들이다. 


우리는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매 끼니를 위해 장을 보고 음식을 주문한다. 계절이 바뀔 때면 최신 트렌드에 뒤처질세라 쇼핑몰을 들락거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독립을 하고 가족을 이룬 다음에는 안락한 주거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지상 최대의 과제다. 


이는 현대인들의 소비생활 패턴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식품, 의류, 주거 분야는 소비생활의 중요도 순위에서도 부동의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이런 양상에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2019년 한국소비자원의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금융이 옷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 


2년 뒤 조사 결과에서는 집마저도 제치고 2위 자리로 올라섰다. 


의식주가 아니라 금식주라 불러야 할 판이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금융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다양한 금융상품들의 기능과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까?


불행히도 이에 대해 선뜻 만족할 만한 답변을 내놓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범람하듯 쏟아지는 서적들 가운에 굳이 이 책의 서문을 들춰보고 있는 것도 어쩌면 금융 지식에 대한 갈증이 그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금융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에 비추어 보면 금융이란 쇠를 의미하는 금자와 녹이다는 융자가 결합한 것으로 금전의 융통, 즉 돈에 대한 수요과 공급에 따라 자금이 이전하는 것을 뜻한다. 


금융에 해당하는 영단어인 Finance는 태생적으로 조금 다른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는 끝을 의미하는 라틴어 finis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래 빚을 청산하거나 대금을 지불한다는 의미로 쓰이던 말이었다.


그러다가 18세기 이후 영미권에서 finance를 돈을 마련하고 관리하는 행위를 일컫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 금융을 알지 못하고서는 이제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금융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부터 역사적인 내용을 살펴봄으로써 금융에 대해서 좀 더 쉽게 재미있게 알아보도록 하자. 


Ⅰ. 변방의 금융업자들 : 유대인과 롬바르도


기독교가 고리대금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지만, 실상 이 시기에도 금융은 필요악과 같은 존재였다. 


교회는 신도들로부터 거둬들이는 막대한 재산을 관리해야 했고, 교회나 수도권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유럽 각국의 통치자나 영주들 역시 전쟁을 치르거나 호화로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똑같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유대인도 처음부터 금융업에 활발히 종사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자 징수를 금지하는 성경의 내용은 이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 농지를 소유할 수도, 군인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할 수도 없던 이들이 생계를 위해 주로 택한 것은 상업이었다. 


그러던 중 유대인은 성경 구절을 통해 금융업에 종사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냈다. 


외국인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더라도 형제들로부터는 이자를 받지 마라 (신명기 23장)


고리대금은 같은 형제인 유대인을 대상으로 할 때만 금지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대인이 아닌 자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를 근거로 유대인은 일반적인 상업 형태를 벗어나 금융업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유대인은 늘 박해받던 처지에 있었지만 금융에서만큼은 예외였다.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던 탓에 금융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전문가 역할을 했다. 이들의 주요 고객 중 하나는 당시 지배계층인 교회나 통치자들이었다. 


이들은 교회법에 따라 기독교인에게 돈을 빌릴 수 없었으므로, 자금이 부족할 때면 늘 유대인의 도움을 받았다. 


중세 시대에 억눌려 있던 금융의 기능이 이들을 통해서나마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세계 금융시장을 쥐락펴락하는 유대인의 막강한 영향력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최초의 국제 금융 조직


신앙과 청빈의 상징, 템플 기사단


제1차 십자군 전쟁의 결과 기독교인들은 우여곡절 끝에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했다. 하지만 약 10만에 달했던 십자군의 주축은 정식 군대라고 보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인생 역전을 꿈꾸며 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가난한 농민과 부랑인들이 대다수였다. 


이들은 전쟁 과정에서 크고 작은 약탈 행위를 자행한 거슨 물론, 이슬람교도와 유대인을 이교도로 몰아 무참히 살해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이슬람교도들의 증오나 적개심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예루살렘 탈환 후 수많은 기독교인들의 순례가 이어졌는데, 순례 도중 재산을 빼앗기거나 목숨을 잃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꼭 종교적 반목 때문이 아니더라도 거금을 소지한 채 장거리 여행에 나섰다가는 범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이런 연유로 1119년 아홉 명의 경건한 기사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가 바로 템플기사단이다. 


정식 명칭은 그리스도와 솔로몬 성전의 가난한 기사들이었다. 주요 업무는 성지로 향하는 순례자들을 범죄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었다. 


기사단의 새로운 부업


십자군 전쟁은 그 후로도 13세기말까지 이어졌다. 교황과 유럽의 왕실은 이 기간 템플기사단에 지속적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기사단은 초창기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성지회복과 기독교인 보호라는 본연의 임무보다는 부업에 더 치중했다. 바로 금융업이었다. 


템플기사단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십자군의 주요 길목마나 지부를 만들어두었다. 


유럽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수백여 개 지부는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네트워크를 능가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환전, 결제 같은 금융 거래 경험도 축적할 수 있었다. 


템플기사단의 허무한 몰락과 숨겨진 재산의 행방


금융이라는 부업에 몰두하는 동안, 템플기사단은 교황이나 왕실도 무시하기 어려운 초정부기관으로 성장해 갔다. 


이들이 유럽 전역에 걸쳐 보유한 영지는 9천 곳에 달했다. 연간 수입 규모는 영국 왕실의 200배 수준이었다.


풍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템플기사단은 암흑의 중세 시대, 유럽의 경제와 금융을 떠받치는 중추와도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진 막대한 재산과 영향력은 다른 한편으로 재앙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285년 프랑스 왕위에 오른 필립 4세는 템플기사단의 주요 고객 중 한 명이었다. 당시 프랑스 왕실은 십자군 전쟁과 주변국과의 연이은 분쟁으로 인해 템플기사단은 물론 유대인들에게도 거액의 빚을 지고 있었다.


정상적인 채무상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자, 필립 4세는 빚을 면하기 위한 방안을 찾는데 골몰했다. 


유대인들에게 진 빚은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국외로 추방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템플기사단에 대해서는 다른 방법을 동원했다. 우상숭배와 신성모독, 부정부패의 혐의로 단원들을 모조리 체포하고 기사단을 와해시키는 것이었다. 


필립 4세의 밀서를 통해 1307년 한 해에 프랑스에서만 3천여 명의 단원이 체포되었다. 


또한 전임 교황을 살해하고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5세를 협박해 유럽 전역에 있는 단원들을 체포하고 기사단의 해산을 명하도록 했다. 


단장이었던 자크 드 몰레를 비롯한 주요 단원들이 화형을 당하고 기사단의 재산은 몰수되었다. 


필립 4세의 빚에서 비롯된 정치적 계산으로 인해 템플기사단은 허무한 종말을 맞고야 말았다. 


Ⅱ. 은행가라 불린 사람들


금융이라는 무대의 새로운 주역, 환전상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간 충돌을 불러온 사건이지만, 유럽과 중동, 아시아 지역 사이의 교역이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이들 지역의 길목에 위치한 지중해 인근 도시들은 그로 인한 최대의 수혜 지역이었다. 


이탈리아의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피사 같은 도시들이다. 


이 도시들 천혜의 지리적 장점을 바탕으로 12세기말 이후 무역과 금융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다. 


템플기사단의 해체로 야기될 법한 금융의 공백 상태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훗날 네덜란드와 영국으로 금융 중심지가 이동하기까지 약 4~5세기 동안, 금융이라는 무대의 주역은 단연 이탈리아인 차지였다. 


당시 지중해 인근으로 몰려든 상인들이 거래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다른 지역에서 사용하는 화폐가 제각가이라는 점이었다. 


상인들의 이 같은 어려움을 해결해 준 것은 다름 아닌 환전상이었다. 


환전상은 화폐의 무게와 순도, 금속의 종류 등을 토대로 화폐의 교환가치를 평가했다. 상인들은 이들이 산정한 교환 비율에 따라 자신의 화폐를 다른 종류의 화폐로 쉽게 교환했다. 


화폐의 가치를 측정하고 교환해 주는 일은 꽤나 정교한 작업에 해당했다. 


이 때문에 환전상은 그 대가로 교환 대금의 1~2퍼센트 정도를 수수료로 부과했다. 교회법에 따라 이자를 받는 것은 금지되었으나 돈과 돈을 교환해 주는 것은 물물교환의 일종으로 평가되어 교회법의 제한을 비켜갈 수 있었다. 


Ⅲ. 돈이 돈을 낳는 원리


런던탑과 잉글랜드 왕실의 추락한 신뢰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욕구는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누구에게나 공통적이다. 17세기 중반까지, 잉글랜드에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준 곳은 런던탑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왕실 조폐국이 자리하고 있던 터라 군인들의 경비가 삼엄했다. 


은행이 나타나기 이전, 런던의 상인과 자산가들은 런던탑에 화폐를 보관해 두는 것으로 이러한 불안감을 잠재울 수 있었다. 


사정이 급변하게 된 것은 1640년 7월 찰스 1세가 갑작스러운 조치를 내린 이후였다. 


선대로부터 대영제국 왕위를 물려받은 찰스 1세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왕실의 재정 적자였다. 


자국민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기도 하고, 주변국들을 상대로 외교적 노력도 펼쳐보았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더 이상 돈을 빌리기도 어려워 파산 위기에 놓이게 된 찰스 1세는 급기야 마지막 수단을 강구했다. 


런던탑에 보관되어 있던 13만 파운드 상당의 화폐 인출을 금지하고, 이 돈으로 왕실을 빚을 갚는 데 쓰려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사람들은 런던탑에 보관했던 돈을 모두 인출하여 새로운 보관 업자를 찾아 나섰다. 


이들의 눈에 띈 것은 골드스미스라 불리던 런던의 금세공업자들이었다. 


금세공업자들은 최고의 값어치를 지닌 귀금속을 대량으로 다루던 사람들이었다. 


크고 튼튼한 금고는 그들에게 필수품과도 같았다. 런던탑을 제외하면 이보다 더 안전한 장소를 찾기는 어려워 보였다. 


Ⅳ. 왕실의 은행, 은행의 은행


현대 중앙은행의 효시, 영란 은행


1694년 영국에서는 현대 중앙은행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영란은행이 탄생했다. 


영란은행은 처음부터 중앙은행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설립된 것은 아니었다. 


그 출발은 민간 소유의 상업은행 형태로, 영국 왕실이 겪고 있던 재무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당시 프랑스에 맞서 9년 전쟁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1690년 비치헤드 전투 패배 이후 해군 전력이 궤멸되다시피 했다. 


영국 왕실이 해군을 복원하고 전쟁을 이어가려면 120만 파운드 규모의 자금이 필요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연 14% 이자까지 제시하며 추가로 국채 발행을 시도했지만 이것도 여의치 않았다. 


이즈음 윌리엄 패터슨이라는 상인이 자금 마련을 위한 새로운 해법을 제시했다. 바로 영란은행을 설립하는 방안이었다. 


상인들이 120만 파운드를 모아 영란은행을 설립하면, 이 은행을 통해 왕실에 필요한 돈을 빌려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상인들의 참여를 유도할 보상이 필요했다. 따라서 영국왕실은 빌린 돈에 대해 8% 이자와 4천 파운드의 수수료를 영란은행에 지급하기로 했다. 


정부의 수입 지출 관리 권한과 함께, 지폐를 발행할 수 있는 특권까지 부여했다. 이러한 연유로 탄생하게 된 영란은행은 명실공히 왕실을 위한 은행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영란은행 지폐가 보편적으로 쓰이게 되자, 금세공업자를 비롯한 민간은행들 역시 영란은행에 계좌를 개설하는 것이 일반화되고 은행들의 송금이나 결제 업무를 하게 되었고 영란은행은 은행을 위한 은행의 역할까지 맡게 된 것이었다. 


영란은행은 현대 중앙은행 제도의 효시로 볼 만했다. 


 Ⅴ. 금융으로 세상을 지배한 로스차일드가


엄청난 수익을 거둔 채권투자


1815년 6월 워털루 전투의 패배를 계기로 나폴레옹 시대는 막을 내렸다. 


전쟁의 기운이 사그라들자, 막대한 자본을 축적한 로스차일드가는 이내 새로운 분야로 눈을 돌렸다. 채권투자였다. 


당시 영국의 전비 조달에 주로 활용되었던 콘솔은 연 3% 이자를 영구적으로 지급받을 수 있는 채권이었다. 


하지만 기나긴 전쟁으로 영국의 재정 상황이 악화되고, 콘솔은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액면가 100파운드짜리 콘솔이 불과 60파운드 내외 가격으로 거래되는 상황이었다. 


전쟁 이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네이선에게 이는 타고난 금융 감각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기도 했다. 


콘솔에 거금을 베팅하기로 한 것이다. 그는 영국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상 부채는 줄고 국가 재정은 더 탄탄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달리 해석하면 영국 정부가 발행한 콘솔의 지급이 확실히 보장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에 따라 콘솔의 인기와 가격이 상승할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이 같은 판단이 서자, 네이선은 1815년 7월 무렵부터 싼값에 콘솔을 사들였다. 


가문의 재산 대부분이 투입되었다. 


불안해진 형제들은 조금이라도 이익이 났을 때 국채를 매각하자고 했다. 그러나 네이선은 1년이 넘도록 꿈쩍하지 않았다. 


1817년 7월 국채 가격이 액면가 대비 80퍼센트 수준으로 가파르게 상승하자, 비로소 국채를 내다 팔기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 국채가격이 최고점에 달했을 때는 대부분의 국채를 매각하고 난 뒤였다. 


가문의 전 재산을 국채에 투자하고 40% 이익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네이선이 가문의 총사령관으로 불리게 된 이유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글을 마치며 ]


금융의 역사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부분은 세 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십자군 전쟁 이후 만들어진 템플기사단의 성장과 몰락의 과정이다. 


템플기사단은 최초에 만들어진 계기가 성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후 템플기사단은 주요 순례길마다 거점을 만들게 되고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력을 넓히게 되었다. 


여기에 더해 종교적인 위상과 왕권의 결합이 이어지면서 템플기사단은 거점을 더 폭발적으로 늘리게 되었다. 


여기에 금융업이 자연스럽게 덧입혀지게 되었고 템플기사단은 단순히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넘어서 상인들의 자유로운 통행까지도 도움을 주게 되었고 이들의 자산을 관리해 주는 역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들의 역할이 점점 더 커져나가면서 영국이나 프랑스보다도 큰 규모의 경제력을 갖게 되었고 이들에게 빚을 진 프랑스 국왕의 모함으로 인해서 템플기사단은 와해되고 만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금융이라는 산업은 안정성을 기반으로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개인의 자산을 안전하게 운영하기 위한 상인들이 템플기사단에 수수료를 내면서 자금을 위탁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점점 더 큰돈을 관리하게 되면서 경제력이 뒷받침되게 된다. 


신용을 쌓아나가면서 템플기사단은 금융업에서 확보한 위치를 자리 잡고 국가 간의 금융 산업을 대행해 주는 것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이처럼 금융업은 우리가 매일 활용하는 것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고 빈번하게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영향력이 점차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의 핀테크 산업도 이와 유사하다고 생각이 되는데 핵심은 결국 네트워크 효과와 안정성이라는 데에 있다고 보인다. 


두 번째는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탈리아에 위치한 환전상들의 활약상이다. 


지금은 기축 통화인 달러를 기준으로 각국의 수많은 화폐가 평가되게 되고 매일매일 시시각각 그 가치가 평가되게 된다. 


이런 시스템이 구축되기 이전에 지중해를 기반으로 유럽과 아라비아 상인들이 사용하는 제각각인 통화를 바꾸어주고 평가해 줄 만한 환전상이 필요했다. 


이들이 없으면 상인들은 물물교환에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이는 너무나도 큰 불편함을 야기하기 때문에 환전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환전상은 화폐를 교환해 주는 대가로 일정 수수료를 뗴어갔고 이 역시 금융업의 한 가지 분야라고 할 수 있겠다. 


현대의 무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화폐는 달러이다. 달러를 기준으로 물건의 가격이 평가되고 각국의 화폐는 다시 재평가 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환율의 변동에 따라 시장가격이 달라지게 되고 다양한 경제 효과가 발생되게 된다. 


결국 유통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환율의 변동은 누가 어떻게 통제하고 관리하는가에 따라서 영구적으로 막대한 이점을 챙길 수 있다. 


지중해의 환전상들이 만들어낸 기준 잣대가 결국은 현대의 기축통화가 만들어낸 환율의 변동과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화폐의 기준이 되는 기축통화를 가진 국가인 미국은 지중해의 환전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이점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세 번째는 국가를 상대로 금융업을 시작해 성공한 로스차일드가의 네이선에 대한 부분이다. 


전쟁을 하게 되면 국가는 막대한 돈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왕으로서 전쟁에 지게 된다면 왕권을 잃게 되고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발생하게 된 막대한 빚을 패전국에 전가함으로써 빚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어느 쪽으로 생각해도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국가로서는 무조건 이기는 것만 생각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얼마의 돈이 투입되는가는 전혀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이럴 때에 발생된 채권은 그 이전과는 다른 매수자에게 매우 유리한 조건으로 형성되게 된다.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서 국가가 신용도를 잃어버리게 될 경우 채권의 가격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그럴 때에 훗날 분명 국가의 신뢰도가 높아질 것이라고 판단이 되고 자신의 모든 재력을 투입해서 베팅할 만한 베짱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흘러 당시의 베팅이 효과적이었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현재의 시간에서 미래에 발생하게 될 예측력을 바탕으로 투자를 결정할 수 있는 인내,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투자의 과정을 지속시킬 수 있는 지혜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을 떠나서 과거에 네이선이라는 인물이 가문의 영향력을 크게 키울 수 있었던 일생일대의 결단과 지속해서 인내할 수 있었던 과정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알려준다. 


이 책에는 이 외에도 흥미로운 이야기와 투자자로서 고민해야 할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금융이라는 시스템에 대해서 배우는 것은 물론 금융 발전의 역사를 통해서 미래에 벌어지게 될 금융 산업의 중요성과 우리는 과거의 사례를 통해 미래에 어떤 기회를 찾아낼 수 있는지 그 힌트를 얻게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참고 도서 : 하룻밤에 다 읽는 경제 에스프레소 금융 ( 김종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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