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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ndmer Oct 15. 2023

도요타 이야기

스스로 생각하고 진화하는 현장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도요타는 전 세계에 공장이 52곳이 있는데, 켄터키 공장은 그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크다. 


7천 명에 이르는 직원이 연간 완성차 50만 대, 엔진 60만 기를 만든다. 


켄터키 공장에는 엔진 공장, 샤시 부품을 만드는 기계 공장, 조립 공장 외에 프레스 공장과 용접 공장도 있어 전체적으로 일관 생산을 하고 있다. 


생산 차종은 캠리, 아발론, 벤자, 렉서스이다. 


매년 전 세게에서 4만 명이 넘는 사람이 찾아오는데, 디즈니랜드보다 넓다 보니 걸어서 견학하는 것은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고 효율도 좋지 않다.


그래서 견학 온 사람은 골프 카트처럼 생긴 4인승 전기 자동차를 타고 공장을 둘러본다. 


켄터키 공장을 둘러보는데 2시간 정도가 걸렸다. 


도요타는 일본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1위 기업이다. 


현재에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내연기관차를 판매하고 있고 최근 엔저를 힘입어 판매량을 늘려나가고 있다. 


하지만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으로 불리는 시간 동안에 도요타도 기업 가치가 매출 성장만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앞으로 변화하는 전기차 시대에 도요타를 어떻게 봐야 할지 최근에 관심이 많이 생겼다. 


도요타는 어떤 기업이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Ⅰ. 도요다 가문의 역사


도요타 자동차를 창업한 도요다 기이치로는 엔슈 지방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출생지는 시즈오카현 후치군 야마구치로, 지금은 고사이시가 되었다. 


아버지는 자동직기를 발명한 도요다 사키치로, 2차 세계대전 전에는 일본의 발명왕으로 교과서에도 실렸던 메이지시대의 걸물이다. 


도요다 부자가 큰 자산을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엔슈의 목화 산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사키치는 무명베를 짜는 자동직기를 발명해 판매했으며, 본인도 이를 사용해 방직업에 진출했다. 


사키치가 만든 회사는 목화라는 지역의 산물을 활용했다. 그리고 아들인 기이치로는 목화로 번 돈으로 자동차를 개발해 도요타 자동차의 기초를 쌓았다. 


만약 두 사람이 시즈오카나 아이치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태어났다면, 만약 두 사람이 목화를 만나지 못했다면 일본에서 자동차 산업이 탄생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도요다 부자와 목화가 자동차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키치는 직기를 발명해 특허를 받았지만, 제로에서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개량을 거듭한 결과물이었다. 


직접 기계를 움직이면서 문제점을 찾아낸 다음 궁리를 거듭해 그 문제점을 없앰으로써 능력을 향상하거나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도요다 사키치는 사생활을 돌보지 않고 직기 개량에 몰두했다. 일도 하지 않고 직기에만 매달리는 그를 아버지는 한심하게 여겼고, 결국 사키치는 집을 뛰쳐나왔다. 


첫 아내인 다미도 질려서 그의 곁을 떠난다. 사키치는 남겨진 큰 아들 기이치로를 친가의 어머니에게 맡기고 30세에 재혼하기 전까지 직기 개량에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쏟았다. 


1896년 사키치는 일본 최초의 동력직기인 도요타식 기력 직기를 완성했다. 동력원은 스팀엔진, 즉 증기기관이다. 


그러나 스팀엔진만으로는 동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석유가 원료인 전기식 발동기를 보조적으로 사용했다. 


사키치는 자동직기와 관련해 발명왕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의 진수는 직기의 속도를 높인 것이 아니라 문제가 발생한 순간 기계 운전을 중지시키는 장치를 고안한 것이었다. 


사키치는 성능을 향상하기보다 불량품 발생을 막고 싶어 했다. 


이런 관점에서 기계를 바라보는 발명가는 없다. 


Ⅱ. 과부족 없는 상태, 저스트 인 타임


고르모 공장은 전례가 없는 규모였다. 주조, 단조 같은 철재 가공 공정, 기계 가공, 기계 조립, 프레스, 도장 최종 조립 등 자동차를 일관생산하는 흐름을 고려해 설계한 이 공장은 일본에서 자동차 전용 공장의 모델이 됐다. 


그리고 이때 기이치로는 저스트 인 타임을 생산 시스템의 기본 개념으로 도입했다. 


그는 공장이 완공되기 전에 이루어진 잡지 취재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동차 공장의 경우는 질뿐만 아니라 양의 측면에서도 재료가 매우 중요합니다. 


부분품의 종류만 해도 2천~3천 가지에 이르는데, 이런 재료나 부분품의 준비와 재고를 잘 생각하지 않으면 불필요한 자본이 들어가서 완성 차의 수가 줄어들죠.


저는 이를 과부족 없는 상태, 다시 말해 정해진 생산량에 대해 필요 이상의 노력과 시간을 들이지 않는 상태로 만드는 것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낭비와 과잉이 없는 것, 부분품이 이동하고 순환하는 과정에서 기다리거나 하는 일이 없는 것, 저스트 인 타임으로 각 부분품이 갖춰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도요타 생산방식의 양대 기중인 저스트 인 타임과 자동화의 개념은 2차 세계대전 이전, 고르모 공장이 완공된 시점에 이미 있었다. 


오노 다이이치가 도요타 생산방식을 만든 사람이 아니라 체계화시킨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Ⅲ. 도요타의 재출발


1945년 9월 일본을 점령한 GHQ (General Headquarters, 연합국 총사령부)는 제조 공장 조업에 관한 각서를 발표했다. 


일본 자동차 회사는 승용차를 생산해서는 안 된다. 트럭은 만들어도 된다. 


물류를 담당하는 트럭은 일본 부흥에 꼭 필요하므로 GHQ도 생산을 금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다시 트럭을 생산할 수 있게 되자 기이치로는 미꾸라지 양식이나 냄비 가마솥 생산 같은 다각화를 중단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원재료나 부품을 금방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구매 담당이었던 하나이 마사야를 비롯한 사원들은 원재료를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싸고 질 좋은 순정부품은 좀처럼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그런 까닭에 트럭 생산을 재개하기는 했지만 월간 생산량은 500대에도 미치지 못했다. 


결국 1945년 3,275대, 이듬해에는 5,821대를 생산했을 뿐이다. 물론 전부 트럭이었다. 


승용차의 경우, 생산은 금지됐지만 연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점령 정책의 일환으로 도요타와 닛산 같은 자동차 회사는 점령군으로서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차량 수리를 도급받게 됐는데, 덕분에 미국 자동차 구조를 알게 됐다. 


수리 대상은 주로 지프와 트럭이었으며, 승용차의 경우는 크라이슬러에서 만든 플리머스가 많았다. 


도요타 사원들은 플리머스를 수리하면서 미국 자동차에서 우수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흡수해 승용차 개발에 참고했다. 


GHQ의 민주화 정책은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큰 힘을 갖고 있었던 재벌 기업에는 가혹한 조치였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생긴 회사나 도요타 같은 벤처기업에는 일종의 규제 완화였다. 


재벌 기업의 힘이 약해진 덕분에 벤처기업들이 새로운 시장에 당당하게 진출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일본 경제가 활성화됐다. 


Ⅳ. 혼신의 힘을 쏟아 만든 첫 승용차


패전 직후부터 GHQ의 점령이 끝나기까지 7년 동안, 일본 사회뿐 아니라 세계도 급격히 변했다. 


냉전이 시작되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국가들이 독립했다. 원자폭탄뿐 아니라 수소폭탄도 개발된 핵전쟁이 현실감을 띠게 됐다. 


전 세계가 휘말린 큰 전쟁이 끝나면서 인구는 계속 증가했다. 


국가를 불문하고 새로운 소비자가 탄생한 것이다. 소비자가 증가하면서 수요가 다양화됐고, 이에 발맞춰 자동차도 발달했다. 


도요타의 최고경영자인 도요다 기이치로는 패전 직후 재벌 해체와 과도경제력 집중 배제법 등에 대처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면서도 승용차 연구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리고 1947년 6월 GHQ는 1,500cc 이하 승용차 생산을 연간 300대까지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Ⅴ. 포드를 넘어서라


도요타는 공장과 공장 사이에 남은 부품을 보관하기 위한 공간과 사용되는 자원의 비효율에 주목했다. 


도요타가 이대로 포드 시스템의 아류에 머물러도 될까에서 시작하게 되었고 생산 방식의 개선을 고민했다. 


도요타는 저스트 인 타임을 실현할 방법을 끊임없이 궁리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중간재고가 생기는 구조 자체를 없애야 했다. 


그래서 다시 한번 포드 시스템을 철저히 이해해 보자고 생각했다. 포드 시스템 혹은 그 아류를 채용한 곳은 당시의 도요타 만이 아니었다. 


닛산은 미국인 엔지니어에게 배운 포드 시스템을 토대로 한 생산 시스템을 사용했고, 이스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느 공장에나 중간재고가 있었다. 같은 시스템을 기반으로 삼은 까닭에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미국 국민의 평균 연 수입이 600달러로 추정되는 시대에 이 차의 가격은 850달러였다. 


그때까지 2천 달러 미만 자동차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처음부터 파격적인 가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T형 포드는 매년 가격을 인하해 1925년에는 290달러가 됐다. 


대량 생산으로 가격을 낮춘 전형적인 예이다. 그래서 양산품을 만드는 제조 공장들이 앞다퉈 포드 시스템을 채용했던 것이다. 


크라운의 개발


도요다 직기 시절부터 기이치로의 꿈은 일본인의 머리와 손으로 본격적인 대중 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생전에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부사장이 돼 기술을 총괄하던 에이지가 그 뜻을 이어받았다. 


1955년 도요타는 크라운을 발매했다. 앞바퀴에 독립현가 방식, 뒷바퀴에 3겹 리프스프링 현가 방식을 채용해 악로에서도 편안한 승차감을 실현했고, 운전 중 클러치 조작이 편하도록 더블클러치를 밟지 않아도 변속할 수 있는 싱크로메시가 달린 상시 물림식 변속기를 채용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특징은 관음 여닫이라 부르는 도어였다. 


관음상을 넣어두는 장의 문처럼 한가운데서 좌우로 여는 방식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 택시 회사가 승객이 편하게 타고 내릴 수 있다면 환영했다. 


업무용을 의식한 도어 설정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나카무라를 비롯한 개발진은 시장조사 결과를 참고하면서 세계 최첨단 기술을 도입해 크라운을 만들었다. 


크라운은 월간 생산량 천대를 달성했고 개인 오너용 모델을 개량한 크라운의 디럭스판을 내놓자 이 차 또한 날개 돋친 듯이 팔렸고, 택시 회사도 이 디럭스판을 구입했다. 


결국 초대 크라운은 마이너체인지를 반복하며 7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자국산 승용차가 됐다. 


여담이지만 크라운의 판매가는 공무원 초임 급여의 116배에 달하며 일반 회사원이 10년 동안 벌어야 겨우 마련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Ⅵ. 무역마찰과 자율규제


도요타는 전체 생산량의 5분의 1을 미국에 수출할 만큼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어들였다. 


1981년 1월 미국에 레이건 정권이 들어섰고 그는 정식으로 일본제 자동차의 자율 규제를 요청했다. 


전미자동차노동조합 (UAW United Automobile Workers)도 그렇고 통상 대표도 그렇고 미국 측은 왜 직설적으로 일본 자동차 수입을 금지한다라고 단언하지 못했을까? 


여기에는 사정이 있었다. 미국 자동차는 일본 자동차나 폭스바겐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유럽 시장에서는 수출도 꽤 많이 하며 분전하고 있었다. 


만약 미국 정부가 수입 규제를 실시하면 다음에는 미국 자동차가 유럽 시장에서 수입 규제를 당하게 된다. 


그래서 레이건 정부는 일본 정부에 그쪽에서 말을 꺼낸 형식으로 자율 규제를 해주시오라고 고압적으로 요청한 것이다. 


메이지 유신 이래 세계에 진출한 일본의 제품은 많다. 그러나 생산 시스템이 미국에 진출하고, 그 후 세계 표준이 된 것은 도요타 생산방식이 유일하다. 


그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높게 평가돼도 좋은 쾌거인데, 신기하게도 누구 하나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도요타의 경우는 겸손한 것이 아니라 어?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거야?라고 신기해하는 것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 글을 마치며 ]


도요타의 역사에 대해서 중요한 사건 3가지를 다시 짚어보도록 하자. 


첫 번째는 도요타의 시작은 무명베를 짜는 자동직기가 그 시발점이 되었다. 


목화솜을 면으로 만드는 자동직기를 좀 더 효율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노력한 도요타의 사이키의 노력을 통해서 도요타는 기술적인 개발을 위한 모태로 하는 기업으로 태동하게 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자동직기의 성능을 향상하는 것보다 불량품 발생을 막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도요타는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정신이 기업의 본질에 녹아있다고 보인다. 


기술의 발전에만 매달리지 않고 기술을 분석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데에 스스로 고민하는 기업 문화가 뿌리 깊게 있다고 보인다. 


두 번째는 도요타의 생산 공정인 저스트 인 타임이다. 


제조 업체는 사업을 시작함과 동시에 재고의 수준을 적절하게 관리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재고는 다양한 연유로 발생하게 되는데 판매량이 줄어들면서 재고가 발생하는 것이 일차적인 문제점이다. 


판매량이 줄어들게 되어도 공장 생산자들을 놀릴 수는 없으니 최소한의 수량을 계속해서 만들어내야 한다.

 

감산을 하게 되면 완성제품의 평균 단가가 상승하는 효과가 만들어지게 되어서 일정 수준의 생산량을 지속해서 유지해야 한다. 


이럴 때에 생산량을 좀 더 콤팩트 있게 관리해서 과잉 생산을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판매량을 대응하는 제조 역량을 가지고자 하는 것이 도요타 저스트 인 타임의 핵심이다. 


여기에 더해 도요타의 저스트 인 타임은 불량품의 관리에도 매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불량품의 비율이 어느 수준인가에 따라서 생산량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 때문에 제조업체의 표준이라고 할 수 있는 6 시그마 기법 같은 것을 도입하였고 백만 대에 한 대 정도로 불량품을 제어하는 것을 목표로 했기도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도요타는 제조 공정과 자동화 공정, 양산품의 품질 관리까지 혁신적으로 개선할 수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도요타는 미국의 견제 속에서도 스스로 발전을 거듭해 성공한 회사라는 점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은 승용차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고 트럭만 제조하게끔 산업 구조가 재편이 되었다. 


이 상황 속에서도 도요타는 트럭 생산을 하면서 미국 자동차의 수리를 도맡아 하면서 연구를 거듭했고 언젠가 오게 될 자동차 생산과 판매의 시기를 기다려왔다. 


이후 미국의 승인으로 인해서 자동차를 판매할 수 있게 되었고 역작인 크라운을 만들어내면서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주름잡는 발판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버블 경제 이후 도요타의 기업 가치도 저평가되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지금 자동차 산업의 가장 큰 테마는 전기자동차이다. 전기자동차에서 가장 높은 판매량을 보여주고 있는 기업은 테슬라이다. 도요타는 아직 전기자동차 부문에서 이렇다 할 판매량이나 성과를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도요타다 지금까지 해 온 방식이 낭비의 효율적인 관리나 불량품 관리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새로운 기술 발전에 뒤처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내연기관차의 판매가 어려워지게 되고 전기차로 전환되는 것이 현대 산업의 가장 큰 흐름이다. 


아직 도요타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하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생산 역량과 개발 역량, 그리고 내연기관차의 판매를 통해서 쌓은 기술력을 감안하면 전기자동차 시장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도요타의 미래 전략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참고 도서 : 도요타 이야기 ( 노지 츠네요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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