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반도체 전쟁의 최후 승자가 될 것인가
[ 글을 시작하기 전에 ]
반도체 전쟁이 시작되었다. 국지전이 아니라 세계대전이고 단기전이 아니라 장기전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분쟁은 기업 간의 경제적 이유 때문이었지만 최근 상황은 차원이 다르다.
세계는 코로나 팬데믹에 의한 반도체 수급 문제가 다른 산업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것을 경험했다.
또 미중 간 패권 경쟁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분야가 반도체 기술이란 것을 인지하면서, 각국은 반도체 기술 확보다 국가 산업 및 안보에 필수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자국 내에서 반도체 개발과 생산을 하기 위해 세금 혜택과 법률 제정 등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다.
반도체는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한 전략물자가 될 것이고 더 고도화될 것이고 더 많은 수요가 창출될 것이다.
그런 반도체 칩은 어떤 형태로 전략적으로 이동되고 의미를 가지게 되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Ⅰ. 우리는 대만 반도체 산업을 원합니다.
1985년 대만의 실세 장관 리궈칭은 모리스 창을 본인의 타이베이 집무실로 불렀다.
리궈딩의 도움을 받아 TI가 대만에 첫 번째 반도체 설비를 세운 지 거의 20년 만의 일이었다.
그 20여 년간 리궈칭은 TI의 의사 결정권자들과 탄탄한 관계를 맺고, 미국에 갈 때마다 팻 해거티와 모리스 창에게 연락하고 만났으며 다른 전자 회사들도 방문했다.
TI의 뒤를 따라 대만에 공장을 세우라고 권하기 위해서였다.
1985년 리궈칭은 대만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자리에 모리스 창을 앉혔다.
리궈칭이 말했다. 우리는 반도체 산업을 원합니다. 말해 보시오. 돈이 얼마나 필요한지
1990년대는 세계화라는 단어가 최초로 널리 쓰이기 시작한 시대였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의 국제 분업과 공급망은 페어차일드 초창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만은 1960년대부터 의도적으로 반도체 공급망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국내에 일자리를 제공하고 더 나은 기술을 획득하며 미국과의 안보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1990년대부터 대만의 중요성이 커지기 시작했는데 이는 TSMC의 눈부신 성장 덕분이었다.
모리스 창이 만든 TSMC는 시작부터 대만 정부의 든든한 지원을 받고 있었다.
1985년 대만은 전자 분야에 특화된 연구소를 설립하면서 모리스 창에게 그 기관을 이끌도록 했다.
당시 대만은 해외에서 만든 칩을 가져와서 테스트하고 플라스틱이나 세라믹 패키지에 부착하는 등 반도체 조립에서 아시아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
대만 정부는 미국의 RCA로부터 반도체 제조 조립에서 아시아를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였다.
대만 정부는 미국의 RCA로부터 반도체 제조 라이선스를 받아 1980년 UMC라는 반도체 제조 업체를 설립한 바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제조 업계에 뛰어들었지만 UMC는 첨단 기술에서 경쟁할 역량이 되지 못했다.
대만에는 반도체 산업과 관련해 일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대만이 가져가는 이윤은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큰 몫은 칩을 설계하거나 최신 칩을 만들어 내는 기업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대만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려면 다른 곳에서 설계하고 생산한 칩을 조립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했다.
리궈딩 장관을 비롯해 대만 관료들이 너무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모리스 창이 대만을 처음 방문했던 1968년 대만은 홍콩,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와 경쟁 중이었다.
이제 삼성과 한국의 다른 거대 재벌이 최신 메모리 칩 생산을 위해 돈을 쏟아부으려는 참이었다.
비록 삼성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지만,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한국이 반도체 조립에서 생산으로 나아간 경로를 모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반도체 공급망의 가장 밑바닥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대만은 끝없이 노력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중국이 세계 경제에 편입되면서 대만은 일하지를 잃어버릴 위험에 놓였다.
바야흐로 경제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고, TI 경영진을 만나던 대만의 관료들이 하소연했다.
중국과 가격 경쟁을 해서 이길 수는 없었다. 대만은 첨단 반도체를 스스로 생산하는 나라가 되어야만 했다.
Ⅱ. 파운드리 비즈니스와 대만
고객이 설계한 칩을 생산해 주는 반도체 회사를 만드는 것, 그것은 아직 TI에서 일하던 1970년대 중반부터 모리스 창이 머릿속에서 굴려 오던 아이디어였다.
당시만 해도 TI, 인텔, 모토로라 같은 반도체 회사들은 대부분 스스로 설계한 칩을 만들고 있었다.
1976년 3월 창은 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TI의 동료 임원진에게 던져 보았다.
연산력이 저렴해지고 있으니 지금까지 반도체가 들어가지 않았던 수많은 기기를 위한 반도체 시장이 열릴 걸세. 그가 동료들에게 했던 말이다.
이렇게 전화기에서 자동차, 식기세척기까지 모든 제품에서 칩의 새로운 수요가 발생할 것이다.
창의 논리에 따르면 이런 제품을 만드는 회사들은 반도체 생산에서 전문성을 갖고 있지 못하니, 반도체 제조에 특화된 전문 기업에 아웃소싱할 것이다.
게다가 기술이 발전하고 트랜지스터가 작아지면 제조 설비의 가격과 연구개발 비용도 상승할 수밖에 없다.
칩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업만이 가격 경쟁력을 잃지 않을 수 있다.
TI 경영진은 설득되지 않았다. 1976년 당시, 반도체를 설계하지만 자체 제조 시설을 갖추고 있지는 않은 팹리스 기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모리스 창은 그런 회사가 곧 나올 것이라 했지만 어디까지나 예상이었다.
TI는 이미 충분한 돈을 잘 벌고 있었고, 그러니 존재하지도 않는 시장에 승부를 거는 건 너무 위험한 일로 보였다
그의 아이디어는 조용히 폐기되었다.
창은 파운드리라는 개념을 절대 잊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때가 무르익을 것이라 생각했다.
리궈딩 장관은 TSMC를 세우는 데 필요한 자금의 48퍼센트를 대만 정부를 통해 지원했다.
창은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인 필립스를 설득해 냈고, 5800만 달러의 투자금과 함께 기술 이전과 지식 재산권 라이선스를 제공받았다.
그 대가로 필립스는 TSMC 지분 중 27.5퍼센트를 차지했다.
나머지 설립 자본은 정부로부터 투자할 것을 권유받은 부유한 대만인들의 호주머니에서 나왔다.
Ⅲ. TSMC는 대만의 국가 프로젝트였다.
TSMC는 투자를 위한 실탄이 부족하지 않았다. 설립 첫날부터 TSMC는 일개 민간 기업이 아니었다.
바로 대만의 국가 프로젝트였다. 미국 반도체 산업과 깊숙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은 TSMC의 초기 성공을 가능케 한 필수 요소였다.
TSMC의 고객 대부분은 미국의 반도체 설계자들이었고, TSMC의 최고위급 직원 다수가 실리콘 밸리 출신이었다.
모리스 창은 TI 경영진 중 하나였던 돈 브룩스에게 1991년부터 1997년까지 TSMC의 대표직을 맡겼다.
브룩스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한테 보고하는 모든 직원, 내 아래로 직급 두 단계까지는 다들 어떤 식으로 건 미국에서 일해 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 모토로라, 인텔, TI 등에서 일했다. 199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TSMC의 판매 중 절반이 미국 회사를 상대로 한 것이었다.
게다가 TSMC 경영진 중 대다수가 미국의 가장 좋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공생 관계는 대만과 실리콘밸리 서로에게 이로웠다. TSMC이전에도 반도체 설계에 집중하면서 자체 제조 설비를 갖추지 않고 제조 공정을 아웃소싱하려는 작은 회사가 몇몇 있었다.
대부분 실리콘 밸리에 자리 잡고 있던 그런 팹리스 업체들은 종종 더 큰 반도체 기업을 설득해 유휴 설비를 빌려 자신들의 칩을 만들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체 생산 시설을 갖춘 회사들에 비해 언제나 차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더 나쁜 건 그렇게 협업하는 파트너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훔칠까 봐 늘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칩 제조 업체마다 조금씩 다른 제조 공정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자체 제조 설비를 갖추지 않는 것은 초기 비용을 극적으로 낮춰 주었지만, 동시에 경쟁자에게 의존해서 칩을 만들어야 했으니 이 비즈니스 모델은 위험할 수밖에 없었다.
TSMC의 출범은 모든 칩 설계자들에게 의존할 만한 파트너를 제공하는 일이었다.
TSMC는 절대 칩을 설계하지 않고 그저 만들기만 하겠노라고 모리스 창은 약속했다.
우리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그저 만들기만 하겠노라고 모리스 창은 약속했다.
우리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터였다.
10년 전 카버 미드는 반도체 생산의 구텐베르크 혁명을 예언했지만 활판 인쇄와 반도체 제작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었다.
그 옛날 독일의 인쇄업자는 인쇄업을 독점하려다가 실패했다. 구텐베르크는 자신이 만든 기술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막지 못했고 결국 저자와 인쇄소 모두가 혜택을 보았다.
반도체 산업에서 모리스 창의 파운드리 비즈니스 모델은 새로운 저자 즉 팹리스 칩 설계 기업이 나올 수 있도록 했다.
그로 인해 모든 종류의 기기에 칩이 탑재되고 연산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누구나 저자가 될 수 있게 한 이 디지털 시대의 인쇄 기술은 인쇄업의 독점과 맞물려 있었다.
반도체 제조의 경제학은 무자비한 합병을 불러왔던 것이다.
가장 많은 칩을 생산하는 기업은 이미 그만 한 강점을 누리고 있으며, 그 위에서 수율을 끌어올리고 더 많은 고객을 유치하며 자본을 동원할 수 있다.
TSMC의 사업은 1990년대 내내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제조 공정은 쉼 없이 개선되었다.
디지털 시대의 구텐베르크가 되고자 했던 모리스 창의 계획은 그에게 훨씬 더 큰 힘을 실어주었다.
당시에는 이 사실을 깨달은 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모리스 창과 TSMC 그리고 대만은 세계 최신 반도체 생산을 독점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Ⅳ. 리소그래피 전쟁
캘리포니아 산타클라라 인텔 본사 회의실에 앉아 있던 존 카루더스는 인텔의 CEO 앤디 그로브에게 2억 달러를 요구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인텔의 연구개발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카루더스는 큰 승부를 걸곤 했다.
일부는 통했지만 안 그럴 때도 있었는데, 그래도 인텔 엔지니어들의 평균 타율은 업계 그 누구보다 좋은 편이었다.
1992년 인텔은 다시 한번 세계 최대의 칩 제조사로 군림하고 있었다. 인텔의 역량을 PC용 마이크로프로세서에 집중한다는 그로브의 결단에 힘입은 성과였다.
현금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돈은 곧 무어의 법칙을 현실화하는 일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카루더스의 요청은 인텔의 통상적인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훌쩍 뛰어넘은 것이었다.
그 업계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카루더스는 현존하는 리소그래피 방법론이 곧 한계에 봉착할 것이며, 차세대 반도체가 필요로 하는 더 작은 집적회로 제작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리소그래피 회사들은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248 혹은 193 나노미터의 파장을 지닌 심자외선광을 사용하는 장비를 내놓고 있었다.
하지만 칩 제조사들이 그보다 더 정교한 리소그래피 장비를 요구할 날이 머지않았다.
카루더스는 13.5 나노의 파장을 지닌 극자외선을 원했다.
파장이 짧을수록 칩에 새겨 넣을 수 있는 기능과 부품 또한 작아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단 한 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이 극자외선을 도구로 써서 대량 생산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Ⅴ. ASML
네덜란드 회사인 ASML은 1984년 네덜란드 가전 회사 필립스의 내부에 있던 리소그래피 분과가 떨어져 나와 설립된 회사였다.
공교롭게도 그때는 반도체 가격이 폭락하면서 GCA의 사업이 기울어질 무렵이었으니, 우연치고는 무서운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ASML이 위치한 곳은 벨기에의 국경과 맞닿아 있는 네덜란드 도시 펠트호번이었는데, 이곳은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정상급 회사가 자리 잡을 만한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반도체를 만들고 있긴 했지만 실리콘밸리나 일본에 비하면 확연히 뒤처져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ASML은 전 세계 각지에서 공급받은 부품을 조립하여 리소그래피 시스템을 만들기로 했다. 핵심 부품을 타 회사에서 공급받는 것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지만 ASML은 그 위험과 함께하는 방법을 익혀 나갔다.
일본 경쟁사들은 모든 것을 자체 제작하려 애쓰고 있었던 반면에 ASML은 시장에 존재하는 최고의 부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ASML이 극자외선 장비 개발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다양한 부품을 종합하며 시스템을 구축하는 능력은 ASML의 가장 큰 장점으로 거듭났다.
ASML의 두 번째 강점은 네덜란드에 있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 미국과 일본 사이에 무역 분쟁이 심화되고 있던 그 무렵, ASML은 중립 지대로 보였다.
미국 회사들은 ASML을 니콘이나 캐논을 대체할 신뢰할 만한 대안으로 여겼다.
가령 미국의 D램 스타트업 마이크론은 리소그래피 장비를 필요로 할 때 일본의 두 거대 회사보다 ASML의 것을 선호했다.
니콘과 캐논은 마이크론이 D램 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일본 기업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ASML이 필립스를 모태로 출발했다는 역사마저 놀라운 방식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대만의 TSMC아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던 것이었다.
필립스는 TSMC의 창업단계에서 투자했던 회사로, 신생 파운드리 기업에 반도체 제조 노하우와 지식 재산권을 제공하며 협력했다.
결국 ASML은 판매 시장을 안고 출발한 셈이 되었다. TSMC의 팹이 필립스의 반도체 제조 공정을 따라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 TSMC에 났던 화재 사고도 도움이 되었다. TSMC는 화재 보험금을 받아 19대 리소그래피 장비를 구입하였던 것이다.
ASML과 TSMC는 반도체 산업의 변방에서 작은 회사로 출발했지만 함께 성장해 나가며 파트너십을 쌓아 나갔다.
그런 요소가 없었다면 컴퓨터와 반도체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 글을 마치며 ]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 국가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반도체를 만들기 위한 소재 부품 장비의 경우는 일본과 네덜란드가 매우 강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웨이퍼가 만들어진 다음에 반도체 칩을 생산하기 위한 제조 공정은 대만, 한국, 미국이 이끌고 있고 중국의 경우도 만만치 않은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상황이다.
이후 패키지는 한국과 대만이 주도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리고 반도체 설계와 특허와 관련된 분야는 미국 영국 중국 한국이 이끌어가고 있다.
여기에서 반도체를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로 구분하게 되면 각각의 공정에서 국가별로 강한 나라와 아닌 나라가 다시 나뉘게 되지만 큰 틀에서는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한 나라의 주도적인 반도체 리딩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고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은 반도체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고 중국도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현대 반도체 산업의 발전 방향이라고 보인다.
이 중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산업은 시스템 반도체와 관련된 분야이다.
미래의 반도체는 성능을 기반으로 발전을 할 것이기 때문에 시스템 반도체를 설계하고 제조하는 국가와 기업의 능력이 매우 중요해질 것이다.
여기에 더해 첨단 반도체의 설계와 제조, 사용까지의 가치사슬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포함되지 않는다면 미래 인공지능 시대에 기술 주도권을 갖기는 힘들 것이다.
지금 현재 상태는 미국과 대만 그리고 유럽, 일본의 공조가 매우 긴밀하고 유기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인다.
미국은 새로운 반도체의 설계를 담당하고 대만은 제조를 담당한다.
그리고 유럽은 새로운 제조 공정이 가능할 수 있도록 장비를 제공한다.
일본은 반도체의 소재와 부품에 들어가는 원재료를 적절하게 공급해 주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반도체 칩은 미국과 유럽, 한국, 일본 등에 공급되고 있지만 앞으로는 중동과 중남미 등으로 확장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이 아직 우리 실생활에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분명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곁에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반도체 칩은 인프라로서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인공지능을 발전시키는 기폭제 역할도 동시에 해줄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도체의 발전과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기업에 대해서도 함께 알아 둘 수 있도록 하자.
참고 도서 : 칩워 ( 크리스 밀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