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 산업은 한 때 세계 반도체의 절반을 지배했었다.
현재는 영향력이 부족해 보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직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국가이다.
그런 일본의 반도체 산업의 역사를 한 번 되짚어 보도록 하겠다.
일본 반도체의 역사는 오늘날의 소니 (당시 도쿄 통신 공업)에서 시작된다.
소니의 공동 창업자 이부카 마사루가 미국 여행 중 벨 연구소가 발명한 트랜지스터 특허가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당시 기술료는 2,500달러 정도로 적은 금액은 아니었지만 천문학적인 큰 금액은 아니었다.
주위에서는 진공관으로도 충분한데 굳이 트랜지스터 기술을 살 필요가 있느냐는 만류가 있었지만 이부카는 이 작은 부품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 확신하고 전 재산을 털어 특허를 산다.
이때 산 2,500달러 종이 한 장이 훗날 일본을 세계 경제 2위로 만드는 티켓이 되어주는 것을 보면 이부카 마사루는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는 사람이었다.
특허를 가져온 일본 엔지니어들은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목표는 하나, 이동하면서 들을 수 있는 라디오를 만들어보는 것이었다.
1955년 일본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 TR-55가 탄생한다.
이전까지 라디오는 거실에 두고 온 가족이 듣는 기구였는데 일본이 이를 휴대가 가능한 제품으로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미국의 트랜지스터 특허는 일본으로 건너와 이동식 라디오의 근간이 되어주었고 Made in Japan이 붙은 공산품들을 작고 정교한 일본 가전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주게 된다.
그리고 반도체 기술은 일본으로 건너와 가전제품의 핵심으로 자리 잡으며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릴 정도로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자리매김한다.
가전용 반도체로 돈을 번 일본은 이제 더 큰 꿈을 꾸게 된다.
바로 컴퓨터의 주요 부품 중에 하나인 메모리 (DRAM) 시장으로 진출을 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가 나서서 경쟁 관계에 있던 일본 기업들의 힘을 하나로 뭉쳐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게 중재를 했다.
미국 IBM을 이기기 위해서 히타치, NEC, 후지쓰, 미쓰비시, 도시바 5개의 회사가 한 자리에 모이게 된다.
4년간의 공동 연구 끝에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미세 공정 기술을 확보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일본은 전 세계 D램시장의 80%를 장악하며 세계 전자시장의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었다.
그렇지만 얼마 못 가 일본은 반도체 산업에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일본 반도체가 미국 시장을 80% 이상 점유하자, 위협을 느낀 미국이 강력한 브레이크를 걸었다.
1986년 미국은 미일 반도체 협정을 강요한다.
일본산 반도체 가격을 높게 유지해라와 일본 시장 내 외국산 점유율을 20% 이상 보장하라는 것이 골자였다.
가격 경쟁력을 잃은 일본 반도체는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타 미국의 지원을 받은 한국의 삼성전자가 가격 우위를 무기로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다.
여기에 일본의 장인 정신도 일본 반도체 산업의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일본은 대형 메인프레임 컴퓨터(슈퍼컴퓨터)에 들어가는 수명이 25년이나 되는 고가의 고품질 반도체를 만드는데 집착했다.
하지만 세상은 PC 시대로 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25년가는 비싼 칩보다 3~5년 쓰고 바꿀 수 있는 저렴하고 성능 좋은 칩을 원했다.
삼성전자는 적당한 품질에 싼 가격으로 PC시장을 공략한 반면, 일본은 최고 품질만 고집하다 시장의 트렌드를 놓쳤다.
장인 정신과 반도체 트렌드를 모두 따라잡기에는 일본 산업의 발전이 더디게 변화한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반도체 산업의 막대한 투자비도 일본 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반도체는 엄청난 투자가 필요한 도박 같은 산업인데 가전 회사의 경영진들은 반도체에만 수조 원을 쏟아붓는 결단을 내리기 어려웠다.
반면 한국은 총수가 직접 결단하는 오너 경영 체제를 기반으로 위기 상황에서도 수조 원씩 베팅했고, 대만은 제조만 전문으로 하는 TSMC 모델로 전문성을 극대화했다.
일본 반도체들은 투자도 적절하게 하지 못했고 시점 차이는 기술 격차로 나타나고 산업 경쟁력이 순식간에 한국과 대만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반도체 산업의 가치 사슬에서 아직 독점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소재 부품 장비 때문이다.
반도체 공정은 수백 단계의 정밀 공정으로 이루어지는데 일본의 소부장이 없으면 삼성전자나 TSMC의 최첨단 라인도 멈춰버릴 정도로 독보적이다.
소재는 반도체 웨이퍼 위에 회로를 그릴 때 필요한 특수 화학물질들로 일본은 90%가 넘는 시장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포토레지스트(감광액) : 빛에 반응하여 회로를 그리는 액체이다. 특히 최첨단 미세 공정인 EUV(극자외선)용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기업(JSR, 신에츠 등)이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불화수소 (에칭가스) : 회로를 깎아내는 세정 및 식각 공정에 쓰인다. 극도로 높은 순도 일명 12 Nine (99.9999999999%)이 필요한데 일본의 스텔라, 모리타 등이 이분야의 장인이다.
대체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배합 비율만 안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수십 년간 쌓인 데이터와 정제 기술이 필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후발 주가가 따라잡기 힘들다.
장비에서는 기계 공학의 정점으로 반도체를 만드는 기계들 역시 일본제가 필수이다.
도포 현상 장비 (Coater & Developer) : 감광액을 바르고 현상하는 장비에서 도쿄일렉트론은 세계 시장 점유율 약 90%를 차지한다.
이 장비가 없으면 노광장비가 있어도 무용지물이다.
검사 및 측정 장비에서도 나노 단위의 미세한 회로가 잘 그려졌는지 확인하는 전자현미경이나 검사 장비 역시 일본이 꽉 잡고 있다.
일본 소부장의 진짜 무서운 점은 병목 지점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강력한 소부장 경쟁력을 바탕으로 다시 제조 역량에 도전하고 있고 지속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