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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Oct 25. 2022

This is me

나는 아직, 기꺼이 망가져 본 적이 없다.   

영화의 개봉 연도나 유행으로 따지면 퍽 늦었지만. 요 근래 나는 영화 위대한 쇼맨(The Greatest Showman/2017)에 나오는 삽입곡 중 하나인 'This is me'에 푹 빠져있다. 노래의 힘찬 곡조와 의미 있는 가사도 좋지만, 노래가 나오는 영화의 장면들이 사람의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노래를 처음 듣고 나서 그것을 계기로 유튜브를 뒤적거려서, 'This is me'를 부른 다른 가수의 커버 곡을 들어보기도 하고, 노래를 부른 케알라 세틀의 연습장면을 훔쳐(?) 보기도 했다. 단연, 영화 속에서 케알라 세틀이 분한 레티 러츠가 부른 노래가 최고였다.  내 생각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레티 러츠는 세상에 수염 난 여자 중에 가장 멋진 여자가 아닐까, 싶다. 나도 그녀처럼, 내 안의 뜨거운 열정과 외침을 멋지게 토해내고 싶다는 생각에 노래의 가사를 외워보기도 했지만. 나이 탓인지, 영어 실력 탓인지, 입이 내 뜻대로 돌아가지를 않았다. 


사실 알고 보면. 여자에게 수염이 나는 일이 그다지 희한한 일은 아니다. 남반구 대륙이나 미크로네시아 지역에 오래전부터 살았던 원주민 여성들은 턱에 수염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뉴질랜드나 피지, 그 주변을 여행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면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여성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수염 여인 레티 러츠가 살았던 시대에는 그와 같은 일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결코 비정상적인 일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시대적인 배경, 사회의 폭력적인 편견과 무지에 의해 그녀는 인격 그 자체를 무시당했고, 괴물 취급을 받았다. 침침한 빨래 공장의 이불빨래 뒤에서 푸념 삼아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녀가 화면의 맨 중앙에서 수염 난 자신의 모습을 당당하게 드러낸 채, 춤을 추는 모습에서 나는 그냥, 단순한 후련함을 넘어서 통쾌함을 맛봤다. 요즈음으로 따지자면, 


나, 수염 났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런 느낌이었달까?


영화가 아닌, 우리의 현실 이야기를 해 보자. 누구든 갑자기 레티 러츠와 같이, 수염 난 여자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누가 되었든, 설사 그것이 나 자신이라도.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망가졌다'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말의 속 뜻을 가만히 살펴보면, 망가짐의 이면에는 뭔가 '정상적인 모습'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일종에 우리 삶의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정상적인 기준'에 도달하기 위해서-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생의 일부분을 혹은 전부를 쏟아부으며 산다. 뿐만 아니다. 우리가 일평생을 살면서 갖춰야 할 '정상적인 모습' 또한 다방 면화되어 있다. 외모, 학벌, 성품, 계급화된 직업과 직군, 자산의 규모, 결혼의 유무, 자녀의 유무 등등... 지금은 예전 시대에 비해 많이 느슨해졌다고 해도, 앞서 이야기한 조건들을 골고루 갖추지 못하면 '정상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여겨진다. 뭔가, 생에 굴곡이 심한 사연이 많은 사람처럼 취급받곤 한다.  그건, 나만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우리가 정상적인 조건, 또는 정상적인 모습으로 그려놓은 기준은 '정상' 이라기보다, 퍽 도달하기 어려운 이상적인 모습이나 목표치일 경우가 더 많다. 정상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이에 속해야 하고, 그것이 평범함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마음으로 품고 있는 '정상'은 모두가 도달하고 싶은 산 꼭대기의 정상점 같은 것이니 말이다.  


우리가 마음으로 그리는 '정상'은 사람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 방면으로 완벽한 사람을 일컫고 있다. 때문에    우리 대부분은 정상적인 범위에서 -저마다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거리가 있는 삶을 사는 셈이 되었다. 시각을 바꾸어 우리가 '정상'이라 일컫는 완벽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중 대부분은 레티 러츠와 같이 망가진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금수저로 태어나거나,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 이미 망가진 채로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정작, 스스로의 망가짐에 대해서는 그다지 용감하지 못하다. 


나는 현실 속에서도 레티 러츠와 같은 통쾌한 사람들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특히 텔레비전에 간간히 비치는 개그우먼들의 활약상을 볼 때마다, 그녀들의 당당함과 아름다움에 존경스러움을 보낼 때가 있다. 어릴 적엔 그녀의 우스꽝스럽고 엽기적인 모습에 생각만으로도 폭소가 터졌다.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커다란 희생과 분명한 존중이 없으면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은 철이 들고도 한참 지나서였다. 조혜련 씨의 골룸 분장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후배들이 그 비슷한 분장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웃음을 선사할 때, 나는 이따금씩 그녀들에게 경외심과 존경심이 들곤 했다. 그건 신분 높은 왕이나 나이 많은 어른에게 드리는 입에 발린 경배가 아니라, 한 인간이 인 또 다른 인간에게 느낌으로 가지게 되는 마음이다. 부러움과 동경이기도 했다. 그녀들의 당당함 앞에서 나는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곤 했었다. 


박나래 씨가 '나 혼자 산다'에서 보여주었던 모습도 빠질 수 없다. 그녀가 인기 연예인이어서, 호의적으로 본 것은 아니다. 나도 닳고 닳은 중년의 아줌마라서- 박나래 씨와는 아무 상관없지만- 연예인들에 대해 꼭 좋은 이야기만 진실로 믿는 사람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살고 있는 값비싼 주거지나 화려한 살림살이 때문도 아니다. 사실은 그녀의 너무나 압도적인 모습 때문에 집이 바뀐 것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습다 못해 흉측한 분장을 한 그녀가 모든 스케줄을 소화 한 뒤, 그 분장 그대로 집으로 돌아와서 덤덤하게 분장을 지우는 모습이 방송을 탔다. 나는 그녀가 그 모든 과정에서 스스로를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가 마주하고 있는 거울 속 모습이야 말로, 이 보다 더 망가질 수 밖에는 없는 형편이었으니까. 내가 보기에는 수염 난 레티 러츠의 외모는 그녀에 비해 '양반'이고도 남았다. 


이쯤 해서 나는 스스로에게, '이게 나야!, This is Me!'라고 외칠만한 내 마음속에 알맹이가 있는지를 반문해본다. 나 또한 마음으로 정해놓은 '정상적인 모습' 은 에베레스트 꼭대기에 걸어두고, 스스로를 자책하며 사는 사람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아무리 망가져도 꿋꿋하게 살아남아서 나의 길을 가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에 대해서는 인색하기도 하거니와 용감하지도 못하다. 다만, 나와 남을 비교하면서 정상이 아니라고 손가락질할 뿐이다. 


과감히 망가져야, 그 안에 나 자신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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