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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Oct 17. 2022

뜨거운 포옹

얼었던 마음을 녹이는 세상 간단한 방법

일요일 아침.   


등산로에 있는 우리 카페는 기온이 변덕스러우면 장사가 잘 안 된다. 10월 들어서 기온의 곡절이 한두 번 요동치고 나서는 매출이 영 시원치가 않았다. 일요일 아침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길을 지나는 등산객은 많은 데, 커피를 마시러 오는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 대략 열 시쯤 되어서 우리 가게의 오래된 단골손님 한 분이 나타났다. 매주 일산에서 우이동까지 발걸음을 하시는 어르신이다. 참담하긴 하지만, 일요일의 첫 개시 손님이었다. 그것도 큰아빠 같은 단골손님이라니. 어찌나 반가운지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냥, '오셨어요' 악수를 하는 것도 모자라서 냉큼 두 팔을 벌려 어르신을 안아드렸다. 어허허 세상, 이런. 어르신의 입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세상 반가운 너털웃음이 터져 나왔다.


분주하지만, 별다를 것 없는 일주일 간의 안부인사가 서로 오갔다. 어르신은 그 사이 내가 내온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일산에서 우이동까지 꼬박 한 시간 오십 분. 어르신의 입에서 고된 여정을 달래는 거친 숨소리가 함께 흘러나왔다. 커피가 맛있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르신과 내 사이에 들떠있던 기분이 서서히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어르신이 말했다.


오늘은 아침에 기분이 아주 그만이야.

왜요?

이렇게 아름다운 여성이 아침부터 나를 꼭 안아주니 마음이 확, 풀렸어.


나는 어르신의 말씀에 실소를 터뜨렸다. 물론, 어르신이 나를 어른 대접을 해주시긴 하지만, 정말 여성으로 바라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쉰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나는 어르신에게 우리 '강아지'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다. 다만, 가벼운 포옹으로 마음이 확, 풀렸다는 어르신의 말씀에 괜스레 내 마음이 쓰였다. 마음이 풀린 느낌만큼 외롭고 쓸쓸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어르신은 일평생 사시던 곳을 떠나서 얼마 전 일산으로 이사를 하셨다. 마나님의 병환 때문이었다. 이 댁 또한 일주일에 두세 번 요양보호사와 일하는 아주머니가 들르긴 하지만, 대개는 덩그마니 두 양주 분만 집에 남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밖에는 근처 마트에 어르신 혼자 나가 장을 보거나 두 양반이 서로를 의지해 병원에 가는 일이 전부다. 이사를 가시고 나서는 인근 지리에 밝지를 못하니 산책을 다니시거나 사람을 새로 사귀는 일이 쉽지는 않다. 나는 눈치 없는 척, 자제분들을 자주 찾으시라, 속 없는 소리를 했다. 이미 내 속을 빤히 들여다본 어르신은 일부러 입을 삐죽이시면서 우리 아버지를 샘내신다. 느이 아버지는 참 좋겠다. 마나님도 안즉 건강하고, 너처럼 이쁜 강아지랑 살아서.


나도 안다. 어르신의 자제분들 또한 이미 그들의 삶이 있고, 나이가 나보다 많은 사람들이다. 그들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대학을 졸업한 지 이미 오래이고, 군대에 다녀온 손자도 있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뺨을 비비고, 예쁜 강아지 노릇을 할 시기는 지났다. 그와 같은 행동이 그들의 나이나 정서로 볼 때, 한없이 어색하고 쑥스러운 행동이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나는 누가 먼저가 되었든. 어르신이 되었든. 그 자제분이 되었든. 그들이 일주일, 혹은 보름에 한번, 한 달에 한 번을 만나는 사이더라도. 그 어색하고 쑥스러운 포옹을 이따금은 서로를 어루만지는 마음으로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우리가 서로를 포옹하면서 느끼는 따뜻함은 아무리 높아봤자, 우리의 체온 이상은 아니다. 이 세상 아무리 많은 미사여구와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그 모든 감정의 시작은 36.5도를 전후한 우리  몸의 온도와 그 밖의 몇 가지가 전부다. 실망스럽긴 하지만, 물리적인 조건은 언제나 그렇듯 매우 단순하고 삭막하다.


그 마저도 온전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컨디션이나 외부의 기온에 따라서, 서로 간의 거리와 느낌에 따라서, 심지어는 신체의 부위에 따라서 우리가 마음으로 느끼는 체온의 변수는 수도 없이 존재한다. 그래서 마치 두 사람이 한 몸인 듯 맨몸을 부둥켜안고 열렬히 서로를 느껴야만 그 비슷한 온도를 느낄까, 말까 한다.


그냥, 서로의 체온을 느낀다는 상상만으로도 조금 민망스러운 생각이 들긴 하지만. 사실, 그 체온 비슷한 따뜻함이 우리 주변에서 이뤄 내는 일들은 아름답다 못해 경이로울 지경이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 온도는 말할 것도 없다. 우리가 대중목욕탕에서 이용하는 물의 온도는 대략 38도에서 40도 안팎이다. 그 정도의 온도에도 우리는 무심히 탕 속에 발을 담갔다가 앗 뜨거워, 소리치며 호들갑을 떤다. 조류가 알을 품어 부화시키는 온도 또한 우리의 체온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겨울이 지나 봄이 되어 대지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온도는 우리의 체온에 채 못 미치는 온도다. 폼페이의 최후가 생각나는 화산 폭발의 용암이나, 무쇠를 녹여서 만든 용광로 안의 시뻘건 쇳물이 가진, 강렬하고 파괴적이기까지 한 온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온도이다.  


다시, 포옹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아마도 열렬한 포옹을 하며, 서로를 느끼는 그림의 대명사는 클림트의 '키스'가 아닐까 한다. 그림 자체로는 앞서 언급한 야하고 민망한 장면, 혹은 두 남녀의 열렬하고 격정적인 키스 장면을 담았을 뿐이다. 게다가 워낙, 대중을 상대로 하는 상업용 매체로 남발 아닌 남발을 한 경우라서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순전히 내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클림트의 그림을 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 움트는 열정과 화해를 경험한다고 한다. 그도 모자라,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라고 한다.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마음이 감동하고 눈물이 난다는 것은 얼었던 감정이 녹는다는 의미다.


우리가 그림을 보는 자리에서 누군가를 직접 부둥켜 껴안지 않더라도, 얼었던 마음이 녹는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안아 체온을 전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 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그와 같이 따사롭고 안온한 온도에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기도 한다. 알고 보면 우리의 사랑 또한 그다지 뜨겁고 격정적인 온도의 감정은 아닌듯 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뜻드미지근한 온도에 삶의 일부, 혹은 일생을 헌신한다. 사람은 물론이고 삶의 방향이 바뀐다. 그리고 매순간 충만함에는 감사를,  그렇지 못함에는 갈망을 몸부림친다.

 

요즈음.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있어도 나 혼자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누구의 탓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어쩌다 보니 처하게 된 자연적인 환경과 시대적 상황이 맞아 떨어져 그렇게 되어 버렸다. 때문에 우리 가게를 찾아오시는 어르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쉽게 마음이 얼어붙고, 메말라서 잘 녹지 않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따뜻한 체온을 나눠 주는 포옹을

함께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우리가 함께 나누는 36.5도. 그렇게 부담스러운 온도는 아니다.  


참, 사람은 봐가면서 해야 한다. 포.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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