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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Aug 18. 2022

나를 보라.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은 역사가 오래된 텔레비전 프로그램일 뿐만 아니라, 그 만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방영기간이 이십년 가까이 되다보니, 근래에는 단순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영역을 넘어선 것 같다. 책으로 출간된지는 한참이 지났다. 그것도 무려 세트로 나와 있다. 얼마전 찾아보니 유튜브나 어플까지 제작되어 있더라. 나는 한사람의 진행자나 강연자가 나와서 처음부터 끝까지 단조롭게 끌고가는 프로그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쩌다 텔레비전을 틀었다가 즉문즉설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끝까지 다 보게된다. 


즉문즉설의 가장 큰 매력을 꼽으라면, 진행자인 법륜스님이 '정답'을 강권하지 않는 것에 있다. 나의 개인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성직자가, 그것도 스님이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 것은 법륜스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미덕이 아닐까 한다. 스님이란 직업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직업이 가진 기능 자체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형편은 어떠한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세대의 학창시절을 떠 올려보면, 답을 정해놓고 학생을 가르치는 것 만큼 손쉬운 학습 방법도 없다. 정답은 무조건 외우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즉문즉설이란 프로그램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질문자가 즉시 묻고, 답변자가 즉시 질문을 풀어서 이야기 하는 묘미가 있다. (사실, 알고보면 질문자의 질문을 미리 접수 받기는 하지만) 때문에 법륜 스님의 대답은 문제의 답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떄 다른 경우가 많다. 몇 회의 어떤 질문이라고 딱 꼬집어서 말 할 수는 없지만. 내 기억에는 꽤나 비슷한 종류의 질문이 그것도 여러번 등장했던 것 같다. 아마도 답변이 정해져 있지 않기 떄문에, 그래서 정답이 없는, '즉문즉답'이 아닌 '즉문즉설'이 성립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이와같이 엇비슷한 질문에도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즉문, 즉 상담자의 질문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나오는 질문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한 개인의 특별한 경험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생명체의 삶도 똑같은 형태를 지닐 수는 없다. 한 어머니의 뱃속에서 똑같은 생일에 태어난 똑같은 모습의 쌍둥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유일무이하다는 의미는 그만큼의 희소성과 특별함을 의미한다. 즉문즉설에 나오는 상담자들의 질문 또한 비록, -그들의 삶을 -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그저 그런, 또는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는 사소한 고민일지라도 한 개인에게 있어서는 어느 질문 하나,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심각하고 중요한 질문일 수 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스님의 답변 또한 딱히, 답이랄 것이 없는 것이 대부분, 상담자의 질문을 다시 한번 풀어서 되집어 보는 경우가 많다. 질문을 되집어 다시 상담자에게 물음을 던지면서 옥신각신하기도 하고,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며 웃음을 자아낸다. 알고보면, 질문 그 자체에 답이 있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스님의 진짜 내공은 질문 속의 진짜 핵심을 끄집어 내는 통쾌함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든 과정을 오랫동안 우리 안에 품어두고 있던 고민과 의문에 비추어 보며서 공감을 하게 된다. 사실은 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고민을 나 혼자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마음의 위로가 더 큰 인기 비결인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좋은 프로그램을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시청하고 공감하는 경우가 있다. 알고보면 그다지 답이 중요하지 않은 프로그램임에도 상담과정에서 도출된 결론을 정해진 답으로 여기는 경우다. 사실, 여기서 그치면 한 개인의 시청 소감쯤으로 여기련만. 이 정답인듯 정답아닌, 정답같은 답변으로 잣대를 삼아 주변을 재단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다. 


프로그램에 너무나 몰입한 나머지, 스님이 짧은 시간에 내 놓은 답변을 격하게 공감하고, 그 공감을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여긴다. 이쯤되면 조금 과한 표현이긴 해도, 


법륜스님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분이다. 

나는 법륜스님의 말씀을 격하게 공감한다. 

그러므로 나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다. 


이와 같은 결론을 마음 속에서 도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즉문즉설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조금만 찬찬히 뜯어보면.  법륜스님의 말씀이 통쾌하기는 해도, 고지식하게 세상에 적용하면 그만큼 골치 아픈 일도 없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세요.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렇게 하세요. 지나치게 무모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쉽게 따라 할 수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스님의 대답 대부분, 우리의 삶속에서 문제가 생겨난 과정에 비해 대단히 짧은 시간에 내놓은 답이기 때문이다. 스님이라고, 우리의 삶을 직접 살아보고 대답을 내 줄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 세상의 모든 깨달음은 나의 내면을 향한 것이지, 외부를 향한 것이 아니다. 나의 경험 속에서 만들어진 나만의 특수성을 다스림으로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내면의 공감을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적용시킬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가진 대답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이 세상에 정답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문즉설을 아무리 많이 시청하더라도 내 아내의 바가지를 해결 할 수 없고, 내 자식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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