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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Aug 18. 2022

내가, 아직 철을 모르더라.

 


얼마전 여의도에 있는 남동생네 가게에 들렀다. 제 볼일만 보고 썡 하니, 집으로 가는 나에게 남동생이 한마디를 했다. 그냥 가지 말고, 여기저기 드라이브라도 하면서 가라, 했다. 그리고 나는 별다른 버성김 없이 그대로 그 말을 따랐다. 봄이 되어서 마음이 설레거나 기분이 들떠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냥, 하라니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껀수만 있으면 너 나 할 것없이 쏟아지는 식구들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서였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집에서는 나이많고 시집도 안간 딸이 꽃구경 조차 하지 않는 것도 잔소리를 하기에 좋은 껀수에 들어갔다. 


나는 애써 기름값을 써서 여의도 벚꽃길을 돈 다음, 서강대교를 타고 신촌을 지나서 사직터널 근처에서 올라가는 북악산길로 차를 몰았다. 나도 모르는 새 벚꽃망울이 촘촘하게도 맺혀 있었다. 사실, 거기까지는 무덤덤하기만 했다. 봄이니 봄꽃이 피는구나 했을 뿐이다. 나 혼자 덤덤하게 구비구비 고갯길 사이를 차로 누볐다. 이번엔 아스팔트길과 이어진 비탈벽에 개나리가 한창이었다. 그런데 어째, 예전에 보던 개나리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내 마음 속에서 폭포수마냥 장관을 이루던 꽃대궐은 아니었던 지라, 조금은 볼 품 없고,  성긴 느낌도 있었으며 초라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올 무렵, 남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윤중로 벚꽃길이며 북악스카이 웨이까지 야무지게 돌고 왔단 말에 남동생이 나를 어린 여동생 어르듯 했다. 아궁, 우리 재요 참 잘했어요. 정수리 쓰담쓰담. 그 말에 나는 매친 것,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 밖에 귀로 들었으면 거북살 스러웠을 몇 마디를 혼자서 조용히 주어 삼켰다. 그리고 나는 무심결에, 아니 사실은 할 말이 별로 없어서 남동생에게 북악스카이웨이길에 핀 개나리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옛날에 보던 개나리 장관은 다, 어디갔을까. 하고. 지금까지 나를 한껏 어린애 취급하던 남동생이 아주 짧게 대답했다. 늙어서 그래.  아직 정신을 못차린 내가 다시 남동생에게 누가, 하고 물었다. 이번에도 대답은 짧았다. 누나. 


남동생이 뜬금없이 물었다. 누나, 우리가 어릴 때 먹던 이유식 먹어본 적 있어? 언젠가 우리가게에 놀러왔던 사촌의 아들 녀석에게 병에 든 이유식을 떠 먹인 적이 있었다. 부끄럽지만 그 때, 어릴적에 먹던 맛이 떠올랐다. 호기심이 들어  이유식 병 겉에 묻은 것을 슬쩍 맛보았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기억과는 달리, 몹시도 밍밍한 맛에 고개를 도리질한 기억이 있다. 아무리 애라지만, 이걸 무슨 맛으로 먹는담.  내 이야기를 들은 남동생은 어이없다는 허허 하고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어른들이 먹고 마시는 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자극적인지. 그건, 우리가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촉감도 아이들에게는 마찬가지일 거란 이야기를 했다. 뿐만 아니다. 어른의 눈으로 보는 세상과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얼마나 다른지도 이야기 했다.  그런 까닭에 예전에는 한없이 크고 넓었던 초등학교 운동장은 손바닥만하게 느껴지고, 예전에 우리 남매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다가 우다다 달려나가던 집앞 골목은 어른 한사람이 겨우 드나들만큼 좁은 길이었단 걸 알게 되는 거라고.  (내 이야기가 소설도 아니고, 대략 그런 의미의 이야기들을 나눴다. )


 굳이 밍밍한 맛의 이유식이 아니더라도, 어릴적 사진에 등장하는, 프릴과 레이스가 자글자글하게 장식된 원피스나 리본달린 블라우스가 아니더라도. 나는 어른이 되어가며 그 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화려하며 때때로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것들을 너무나 많이 경험하고 살았다. 아이들이 모르는, 짜고 쓰고 달며, 때때로 똠양꿍스프처럼 시큼하고 칼칼하지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맛을 알고 있는 만큼, 우리의 미각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건 사람의 감정이나 기분도 마찬가지이고, 해가 바뀔 때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봄과 여름 가을 겨울의 모습도 그와 같을 것이다. 요즈음 세상의 어린것들이 아무리 영악하고 어른스럽다고 해도, 분노가 사무쳐 웃음이 나오는 조우커가 가진 비애의 깊이를 어찌 알 것이며, 내 앞으로 밀려드는 업무량이 유난히 많은 날 저녁, 고추 다섯개가 그려진 매운맛 짬뽕이나 마라탕에 밥을 푹푹말아 떠 먹는 엄마, 아빠의 심정을 어떻게 알까. 그것을 아는 만큼 우리의 삶은 봄날 꽃대궐을 이룬 개나리 넝쿨만큼 화려하고 풍성하며, 그 사이사이 양념으로 피어난 진달래 빛깔만큼 진하고 노골적이다.


그러나 정작 유감스러운 것은 그 풍성하고 화려해야 하는 삶이 어는 순간 무감동해졌다는 사실이다.  떄문에 내가 사는 세상에 앞서의 이야기처럼 결코 새롭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이쯤해서, 나 혼자만을 예로 들려니, 자칫 이야기가 반성문처럼 되어 가는 것 같아, 우리를 슬쩍 끼워 넣어볼까 한다.  그간 우리는 지금껏 살아온 삶의 피로감으로 인하여, 또는 지금까지의 습관적인 경험으로만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새로운 삶을 발견하거나 탐험하기를 잊어 버리지 않았나 싶다. 습관으로 그냥저냥 사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현실의 한 순간이 아니라, 과거 기억속의 한 순간이다.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오십줄에 들어서건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직도 어린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봄의 어느 순간이었다. 떄로는 스무살의 어느 순간이었을 때도 있고, 또 때로는 다른이의 인생에 빗대어 내 인생의 어느 때를 이야기할 수도 있다. 지금 내가 사는 순간은 2022년 4월 어느때이고, 지금만큼 새로운 것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이와 같은 삶의 태도에 대해 '늙었다'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노인에게 말하는 늙음과는 다르다. 마음의 늙음이다. 마음이 늙으면 세상은 무감동해지기 마련이고, 내 입장에서 마땅해지기 마련이다. 새로운 것을 새롭게 볼 줄 모른다. 새로운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은 순전히 내 기억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다. 결국, 나중에 가서는 철을 모르는 때가 온다.  내가 내 인생의 어디쯤에 있는지, 내가 사는 지금은 어느 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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