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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아버지카페 딸 Aug 18. 2022

진정한 커피의 맛.

나는 사람이 그리 진중하지 못할 뿐더러, 가볍기까지 하다. 그래서 쉽게 마음을 다치고, 그만큼 마음을 닫는 일도 쉬었다. 한번 닫힌 마음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나중에혼자 끌어안고  끙끙대는 병이 되기까지 했다. 그 무렵에 미얀마에 가서 대략 석달 쯤 머물면서 명상을 배웠다.  


... 그래서, 명상을 하면 좀 사는 게 나아져요?


내가 명상을 배웠다고 하니, 많은 사람이 묻는다. 결론적으로 많이 나아지긴 했다.  그렇다고 갑자기 전에 없던 금전적 풍요가 찾아왔다거나, 우리엄마아빠에게서 물려받지 않은 여신의 몸매나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거나, 또 두자리수 덧셈을 하면서도 낑낑대던 두뇌가 전자계산기를 머릿 속에 밖아놓은 듯 명석해진 것은 아니다. 곰곰 생각해봐라. 우리가 사는 현실은 지극히 물리적 상식이 통용되는 세계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저마다의 시간과 질량이 있고. 그에 따른 운동 속도가 존재한다. 그건, 물이나 공기도 마찬가지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지 않은 몸매를 갖기 위해서는- 뼈를 깎을 만큼의 고통이 수반 되는 운동이나 성형을 하지 않더라도- 이전의 몸매에서 새로운 몸매로 가기 위한 물리적 변화와 시간이 필요하다.  오래된 건물을 헐고 다시 짓는 과정을 생각해봐라. 그건 돈도 마찬가지고, 지능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아프리카 초원에서 발견된 인류 최초의 여성 루씨에서 지금의 인류가 될 때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320만년이나 된다. 그와 같은 물리적 변화가  우리 마음이 만들어내는 그림만큼 쉬울까?  나도 참으로 가볍고 무게감 없는 위인이긴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가볍고 변덕스럽다. 우리가 인지하고 자각하지 않는 이상, 아무런 무게감이나 속도감, 심지어 시간관념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예전에 비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처럼 사는 것이 많이 편해졌다.  이쯤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내가 현실과는 동떨어진 '정신승리'를 거둔 것이 아닐까를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런 종류의 것이라면 나도 스스로에게 한마디를 보태고 싶다. 에구, 불쌍한 것... 혀도 끌끌 차줄 수 있다. 쯧쯧쯧.   사람들은 또 나에게 묻고 싶어질 것이다.


... 도대체 뭐가 그리 달라졌길래.


글쎄. 내가 앞서 이야기를 질질 끄는 이유는 이야기하기가 참 난해하기 때문이다. 홀로그램처럼 잠깐잠깐 떠 올랐다가 이내 사라지는 내 마음의 그림을 어떻게 말로 옮겨야 할까. 지금 내 글을 읽고 있는 사람이라면, 잠시 머릿속에 선명한 노란색의 수선화 하나를 떠 올려봤음 한다. 그게 우리 눈에 보이는 수선화와 같은 모습인가? 퍼뜩, 머리속에 그 비슷한 심상이 떠 올랐다 사라지지 않는가? 내 마음도 당신과 같다.


그래도 한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하다. 명상을 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내 안에 전에 없던 공간의 개념이 생겼다는 것이다. 조금 부끄럽긴 하지만, 태어나서 근 삼십년 넘게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개념이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공간감이 생기고 나니, 그제서야 '나' 외에 다른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더라. 내가 상처받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때, 그들도 똑같이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받고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다는 사실. 마음의 상처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모두가 똑같지 않다는 사실도 알았다. 상처의 가장 보편적인 원인 중 하나인 폭력을 예로 들면. 누군가는 작은 폭력에도 움츠리고 주저 앉지만, 또 누군가는 더 큰 폭력, 더 큰 파괴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여 따라한다는 사실. 그건, 폭력이 아니더라도 거의 마찬가지라는 사실.


그런데, 이게 다 '커피의 진정한 맛'과 무슨 상관이냐고?


상관이 있지, 왜 없겠어. 우리나라 말은 끝까지 다 들어봐야 된다고, 오후 세시면 어김없이 우리 카페를 찾아와 티타임을 갖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종종 말씀하곤 하셨다.  내 안에 공간감이 생겼다는 사실은, 바꾸어 말하면 지금껏 평면적이고 밋밋하던 세상이 입체감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와 마찬가지다. 내가 아직 직장인이었을 때, 중국의 내 몽고 지역으로 출장을 갈 일이 있었다.  처음엔 남의 나라 땅에 왔다는 사실에 어디를 가든 무척이나 설레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종일토록 대략 여덟시간쯤 산도 없고 계곡도 없고, 마치 옛날 윈도우 배경화면 같던 평지를 달리고 또 달리려니 나중에는 지루하다 못해 짜증이 다 날 지경이었다. 이런 인생을 아주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라면, 우울증이나 몇몇 중독에 빠져 살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 마음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토록 밋밋하고 평면적이며 무미건조한 내 마음에 전에 없던 산이 생기고, 계곡도 생겨서 구경할만한 '경치' 라는 것이 생겼다.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겠는가? 내 눈앞에 솟아있는 저 바위는 어떤 모양인지, 저 멀리 솟아있는 만년설산은 얼마쯤 가야 만날 수 있는지, 저 언덕 너머로 보이는 빨간지붕집은 길 가는 나그네에게 얼마나 인심이 후할런지. 아니면 어느 숲, 어느 골짜기 아래 잠자리를 정해야 검은 하늘에 소금처럼 흩뿌려 놓은 별을 구경하며 잠들 수 있는지...


그건, 커피맛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나에게 쓰기만 했던 커피맛도 언젠가부터 입체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커피가 꼭 쓴맛은 아니더라. 내가 어줍지 않게 커피 공부를 하며 읽은 몇몇 책에서는 커피는 대략 스물 일곱가지의 맛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절대미각 장금이가 아닌 이상, 그 많은 맛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언젠가부터 커피의 쓰디쓴 맛 아래에 단맛과 신맛, 그리고 전에는 생각조차 못했던 장미향과 딸기향 그리고 평생 맡아보지 못했던 이국의 향기가 숨어 있었다. 컴컴하고 어두었던 나의 커피 세계에 하늬바람에 오렌지 향이 가득 묻어있고, 빛바랜 하얀 팬스 아래 야생장미가 한껏 피어난 아프리카의 커피 농장이, 그리고 짙은 초코릿 향과 나무향을 뿜어내는 남미의 우림 어딘가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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