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주공

7. 국민학교

by 고귀한 먼지
주어진 조건에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삶을 이어가는 선량하고 위대한 보통 사람들을 나는 내가 창작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고 싶다.


1.JPG 용산주공아파트 정문 모습. 40년이 지났지만 분식집이 있던 자리에 도로가 생긴 걸 빼면 국민학교를 다니던 시절,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 항상 보던 모습 거의 그대로다.


‘국민학교’라는 말은 이제 사라졌지만 내 기억엔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는 단어다. 이 단어 안에 담긴 추억과 인연, 그리고 성장의 얘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 얘기를 본격적으로 하려면 아마 장편소설 한 편 정도는 완성하고도 남을 거다. 그만큼 유년의 기억은 나이를 먹어도 바래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국민학교라는 단어를 떠오르게 만드는 기억의 단추 역시 용산주공아파트다.

용산아파트 바로 앞에 내가 6년간 다녔던 남산 국민(초등) 학교가 있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문방구가 두 개 있고 서점이 하나 있었는데 꽤 오래 자리를 지키던 문방구는 이제 분식집으로 간판을 바꿨다.


용산주공아파트와 국민학교가 연결된 그 시절의 아련한 기억이 반갑게 떠오른다.

먼저 내가 오갔던 등굣길과 하굣길. 지금은 걸어서 5분이면 학교 정문에 도착하지만 어린 시절의 걸음으로는 10분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아파트 정문을 지나 당시에는 벽돌로 이어진 담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학교 정문이 나왔다. 정문 앞 맞은편에는 충주여고 정문이 자리 잡고 있어 그 문을 드나드는 누나들의 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그때는 그 문 안의 세상이 어찌나 궁금했던지. 간혹 예쁜 누나를 보면 그 어린 나이에도 괜히 설레곤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거나 술래잡기 등을 하며 놀다 보면 바로 옆에 용산주공아파트가 보였다. 그러면 더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커지곤 했는데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굣길에도 난 언제나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교는 정문과 후문, 그리고 쪽문 등 총 세 개의 문이 있었는데 쪽문으로 나오면 시내로 이어지는 개천이 있었고, 후문으로 나오면 바로 오락실이 나를 반겼다. 난 오락을 잘하진 못했지만, 항상 뒤에서 다른 친구들이 하는 오락을 구경하는 쪽이었다. 그러다 나도 게임이 하고 싶으면 조금 인기 없는 게임기로 가 소심하게 오락을 즐기던 그런 아이였다. 당시만 해도 쪽문은 좁은 골목으로 바로 이어졌기에 주로 친구들과 나오지 않고는 혼자 잘 드나들지 않았다.


정문을 통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꼭 정문 앞 문방구와 서점을 들렀고, 그다음으로 아파트 정문 옆에 자리 잡은 분식집도 빼놓지 않고 친구들과 찾았다. 문방구 앞에서 뽑기를 하거나 몇백 원짜리 불량식품을 사 먹고, 또 분식집에서는 종이컵에 담아 파는 떡볶이를 거의 매일 먹었었다. 그 맛은 지금도 기억난다.

분식집 바로 옆에 있던 게시판도 떠오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몇 칸으로 나뉜 게시판에 종이 포스터를 붙여 영화 홍보를 하거나 광고를 하곤 했다. 주기적으로 바뀌던 영화 포스터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난 아마 영화에 대한 꿈을 그때부터 키웠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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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를 다니며 나는 비로소 용산주공아파트의 다른 집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유치원 시절까지는 우리 집과 103호, 104호가 내가 아는 아파트의 모습 전부였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 친구를 사귀고, 과외를 받으며 15동에도 가보고, 9동에도 가보고, 2동에도 가보며 용산아파트의 다른 모습들을 발견했다.


확실히 그때는, 우리 집이 결코 작다고 느끼진 않았다. 용산주공아파트는 18평과 15평, 그리고 13평으로 구성됐기에 18평이었던 우리 집보다 평수가 작은 친구 집에 가면 괜히 우쭐해지기도 했던, 철없는 아이의 모습이 지난 내 모습이었다.


그때쯤 나와 친구들은 아파트 단지 내에 우리만의 비밀장소를 만들기도 했다. 아파트 건물 지하에 몰래 음료수를 보관하던 곳을 알게 됐던 건데, 아마 환경미화원분들의 쉼터였을 것이다. 거기서 몰래 음료수도 훔쳐먹고, 장난감도 숨기며 우리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설렘과 들킬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던 시절이었다.




지금 떠오르는 기억 말고도 용산주공아파트와 국민학교를 연결하는 내 기억은 많다. 그 기억 속에서 함께했던 이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지. 얼굴도 가물거리고 이름은 당연히 모르지만 내 기억에 선명한 자국을 새긴 사람들. 그들은 이 시절을 잘 견뎌내고 있는지.

특히, 살다가 문득 떠오르곤 하던 궁금한 이들이 몇몇 있다.


첫 번째 사람은 내가 1학년 때 문방구를 운영하던 주인아저씨다. 그때 그 아저씨의 나이는 아마 지금 나보다 더 어렸을 것이다. 내가 그분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 건 문방구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와 수업을 마치고 함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방구에 들러 쭈쭈바를 사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보다 두 학년 정도 위였던 한 남학생이 문방구에서 물건을 훔치다 주인아저씨에게 걸린 일이 있었다.

아저씨는 경찰 부른다며 그 남학생에게 겁을 줬고, 나와 친구를 가리키며 이렇게 어린애들도 돈을 내고 정직하게 사 먹는데 부끄럽지도 않냐며 질책하셨다.

처음 그런 상황을 겪어봐서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분명 칭찬을 받은 것 같아 괜히 기분이 좋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분으로 그 아저씨를 기억하는 건 아니다.

그때 내 눈에 가장 선명하게 들어온 모습은 주인아저씨의 화난 얼굴이 아닌 왼쪽 손이었다. 하얀 면장갑을 낀 의수(義手). 아마 플라스틱이나 나무로 제작된 의수였을 것이다. 태어나 처음으로 손이 없는 사람을 본 것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며 왜 왼손 전부를 잃었을지 나름 상상을 한다. 공장에서 사고를 당했을까? 아니면 다른 사고가 있던 걸까?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삶이 쉽지 않으셨을 텐데 떳떳하게 노동하며 삶을 이어갔을 그 아저씨가 생각난다.


아마 그 어린 나이에도 난 그 아저씨에게 동정의 마음을 갖고 있던 것이 아닐까? 동정이라는 감정이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그분을 응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에 절망하는 가운데 주어진 조건에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삶을 이어가는 선량하고 위대한 보통 사람들을 나는 내가 창작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삼고 싶다.




올 추석 연휴를 고향에서 보내며 용산주공아파트 14동 401호에서 초등학교로 이어지는 그 시절 등굣길을 다시 걸었다. 생각에 잠기지도 전에 학교 정문 앞에 다다른 날 발견하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문에서 바라본 용산주공아파트의 모습은 어디에서 보든 역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정겨웠다.


지나온 삶의 발자취를 돌아본다는 건, 더 큰 걸음을 내딛기 위한 준비과정이란 걸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깨닫는다.

용산주공아파트를 통해 40년간 이어진 인생의 궤적을 또렷이 기억해 내는 일, 그 일이 앞으로 내가 갈 길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직 그 길이 뚜렷하진 않다. 왜냐면 아직도 기억해 내야 할 게 많이 남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분간은 용산주공아파트에 대한 추억을 다시 내 앞에 펼치는 일을 쉬지 않을 생각이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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