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길냥이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곳에 여전히 남은 녀석들. 그들은 오늘도 자신만의 구역을 배회하며 용산주공아파트를 지킨다.
오른쪽 다리가 안으로 굽어 발바닥이 아니라 발등으로 걸음을 걸었던 보은이.
길냥이로 살아서 그런지 애교가 많아 항상 놀아달라고 내 발목을 물던 보은이는 이제 세상에 없을 거다. 보통 길냥이의 수명이 2~3년이라고 하니 7년 전 잠시 함께했던 보은이는 어딘가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겠지. 그래도 나는 내 덕에 보은이가 조금이나마 고양이로서의 삶을 더 행복하게 누리다가 떠났을 거라 믿는다.
연한 갈색 털에 눈망울이 선했던 보은이는 친구의 회사에 자주 나타나던 길냥이였다. 보호센터로 보내진 후 안락사를 기다리던 보은이를 내가 데려와 두 달 정도 키웠다. 키웠다기보다 잠시 맡았다는 말이 더 어울리겠네. 그때가 대전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둘째 형과 함께 살던 때였다. 월세를 얻었던 곳이 방 두 개와 거실이 있던 꽤 넓은 곳이라 보은이가 혼자 생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아 그런 결정을 내렸다. 친구가 캣타워를 사주고 간식도 사주며 새롭게 시작될 보은이의 삶을 응원해줬다.
지금도 보은이에 대한 몇몇 추억이 생생하다. 창틀에 올라 하염없이 밖을 내다보던 모습, 잠시 방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신나 몸을 뒹굴던 모습, 내가 출근하기 위해 화장실에서 샤워기를 틀어놓고 머리를 감으면 밖에서 쪼그려 앉아 나를 호기심 있게 쳐다보던 모습, 그리고 그때 잠시 어항에 기르던 작은 거북이를 바라보며 어떻게든 잡으려 노력하던 귀여운 모습까지.
두 달 정도 함께 생활하는 동안 정이 꽤 들었지만, 나는 그때만 해도 ‘중성화’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그래도 최대한 본능적으로 사는 게 보은이에게 맞지 않을까 고민하던 중 엄마가 아는 분이 밖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는 얘기를 듣고 그분께 다시 보은이를 데려다 주기로 했다. 집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고양이로서의 본성을 지키며 밖에서 마음껏 뛰어놀다가 때가 되면 떠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처럼 보은이는 새로운 곳으로 간 후, 다시 길냥이의 본성을 되찾았다고 들었다. 친구들을 사귄 보은이는 자주 집을 나갔고, 2, 3일에 한 번 집에 들러 사료를 먹다가, 나중엔 아예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영역 다툼에 밀려 도태된 것인지, 아니면 무리와 함께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나마 자유롭게 살았다면 그걸로 된 거라고 믿는다.
보은이라는 이름은 그 당시 개봉했던 일본 애니메이션 ‘고양이의 보은’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그래도 내 덕에 조금이나마 더 살 수 있었으니 나중에라도 은혜를 갚으라는 생각에 그런 이름을 지었는데 살다 보면 보은이에게 보답을 받을 날이 올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미 보은이에게 많은 보답을 받았는지도 모르지.
추석 연휴 기간 용산주공아파트 단지를 천천히 걷다가 마주친 길냥이들을 볼 때마다 보은이가 생각났다.
그중 한 녀석은 아직 어려 보였는데 사람을 좋아했다. 내가 다가가니 피하지도 않고 오히려 다가와 애교를 부리며 놀아달라고 했다. 사진을 찍어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좋은 사진들을 찍을 수 있었다. 잠시 그 녀석과 놀아주느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반면, 다른 길냥이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우선 사람을 심하게 경계해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눈에는 눈곱이 끼고, 콧물이 줄줄 흐르고, 털도 많이 빠진 것이, 눈동자마저 흐려 딱 봐도 ‘얼마 남지 않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지만, 나이를 먹어 영역 다툼에서 밀린 뒤 오래도록 먹지를 못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다툼의 과정에서 큰 상처도 입었겠지. 용산주공아파트 단지 몇 곳에 사료와 물을 담은 그릇이 놓인 고양이 급식소가 보였지만 아마 이 녀석은 그 사료와 물을 먹지 못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겨우 놀이터에 숨은 그 녀석의 모습을 멀리서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또 다른 녀석은 열심히 단지를 돌아다니며 나를 별로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가가면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내가 서 있으면 자기도 서서 나를 노려보는 모습이 꽤 당당했다. 용산주공아파트에 터를 잡은 지 꽤 된 것 같은 모습에 괜히 오면 안 될 곳에 내가 온 건 아닌지 무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사실, 이날 용산주공아파트를 찾은 이유는 다른 녀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우리 가족이 떠나기 전 14동 401호에 아직 살 때 집에 올 때마다 자주 마주쳤던 녀석. 하얀 털이 잘 정돈된 모습에 길냥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품위가 느껴지던 녀석이었다. 우아하게 걸음을 옮기던 모습을 보며 용산주공아파트와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던 녀석. 한가한 추석 연휴에 그 녀석은 어디에 있는 건지 단지를 두세 번 천천히 돌며 찾아봤지만 끝내 만날 수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곳에 여전히 남은 녀석들.
그들은 오늘도 자신만의 구역을 배회하며 용산주공아파트를 지킨다.
아마 이 녀석들의 주요 식량은 급식소의 사료와 사람들이 버리는 음식쓰레기가 아닐까 싶은데, 음식쓰레기의 양이 점점 줄어들고, 급식소에 사료를 줄 이들이 모두 떠나면 이 녀석들마저 이곳을 떠나게 되는 걸까? 아니면 계속 머물고 싶어 하는 녀석들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용산주공아파트가 먼저 재개발이 시작돼 허물어지는 것은 아닐는지.
녀석들이 천천히 거니는 단지 내 모든 곳에는 내 소중한 추억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추억을 되새기며 이 녀석들을 만나는 재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용산주공아파트는 그래도 아직 꽤 많은 이들에게 소중한 공간이다.
그래서 더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