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유치원
나는 그 시절의 이면을 세월이 지난 후에야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용산아파트는 그 시절에도 묵묵히 내가 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산주공아파트 14동 현관문 앞에 서서 엄마의 손을 잡고 마지못해 걸음을 내딛던 35년 전, 한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엄마의 손을 꼭 쥐고 4층 계단을 내려와 3동을 지나쳐 작은 아파트 쪽문을 나서면 바로 맞닥뜨리는 2차선 도로. 10여 미터 길이의 횡단보도를 손을 들고 건넌 후 충주중학교 담을 따라 200여 미터를 더 가면 나오던 곳.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단체생활을 했던 곳, 친구를 사귄 곳, 그리고 몇몇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는 곳.
바로 유치원이다.
제대로 된 기억, 내 삶의 궤적을 더듬을 수 있는 출발점은 6살 때부터다.
가족여행으로 온양온천 도고 수련원에 놀러 갔던 일. 거기서 처음 타 본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했던 기억, 독립기념관에 가서 본 참수당한 의병 사진 때문에 며칠 동안 잠을 못 잤던 기억, 탄금대에 우리 가족과 둘째 이모 가족이 함께 놀러 가서 사진을 찍었던 일, 그리고 용산주공아파트의 토끼 놀이터와 거북이 놀이터에서 형들과 신나게 놀았던 기억.
그리고 유치원에 다녔던 일이 생각난다. 유치원의 이름은 호암유치원. 유치원에서 나는 처음으로 친구를 사귀었다. 그 친구와는 초등학교 때 헤어진 후 고등학교에 가서 다시 만났지만, 유치원 시절 단짝 친구가 고등학교 때도 친구가 될 수는 없었다.
여전히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그 친구는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을까?
그 친구와 손을 잡고 환하게 웃으며 찍은 사진이 여전히 내 앨범 속에 담겨 있다.
호암유치원이 있던 곳에 지금은 장애인복지관이 들어서 있다. 그 옆에는 목욕탕과 스크린 골프장이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힘겹게 버티고 있다.
어린 시절에도 나는 내성적이었다. 엄마의 품에서 떨어지려 하질 않아 유치원에 가려면 엄마는 항상 나를 떼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엄마에게 크게 혼난 적도 있다. 아마 이번에도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고 떼를 쓰며 도저히 엄마 말을 듣지 않아 그랬겠지?
지금 생각하면 좀 심하다 싶지만 그때 엄마는 어찌나 화가 나셨던지 나를 발가벗겨 현관문 밖에 세워뒀다. 난 또 펑펑 울면서 5층으로 올라가 5층 아주머니에게 살려달라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었지. 5층 아주머니가 웃으며 나를 데리고 4층, 우리 집으로 향하던 모습도 또렷이 기억난다.
그때는 왜 그랬을까? 그때는 그러니까 1986년, 서슬 퍼런 제5공화국 정권의 막바지였다. 평범한 이들에게까지 그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전달돼 폭력이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시절들. 그게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분위기.
물론, 그 관성은 꽤 오래도록 우리 사회에 남아있었다. 마치 군대를 연상시켰던 조직 문화들. 나 같은 성향의 개인이 숨쉬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숨쉬기 힘든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86년.
그때 내 세상은 용산아파트와 호암유치원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시고, 가족밖에 모르던 엄마는 집안일에 몰두하고, 둘째 형은 초등학생, 큰형은 이제 막 중학생이 됐던 그때.
나는 이제 많은 역사책을 통해 그 시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잘 알고 있다.
민주화를 위한 수많은 이들의 노력, 그리고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지 못하던 노동자들의 절규, 이를 막기 위한 기득권의 야만.
나는 그 시절의 이면을 세월이 지난 후에야 다른 이들의 눈을 통해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용산아파트는 그 시절에도 묵묵히 내가 보지 못한 모든 것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산주공아파트가 그대로 있는 동안 반경 200여 미터의 모든 것은 변했다.
모든 게 변할 동안 용산주공아파트는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받아 작고 초라해졌다.
작고 초라해졌기에 용산주공아파트는 이제 사라지려 한다. 변해버린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내가 모르던 그 시절을 묵묵히 지켜봐 온 용산주공아파트.
이제는 내가 용산주공아파트의 마지막을 묵묵히 지켜보려 한다.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