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잔디밭
우리 다시 한번 힘을 내자고. 결국, 이 마음을 고백하도록 잔디밭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었나 보다.
용산주공아파트 3동과 14동 건물 뒤에는 작은 잔디밭이 있다.
지금은 잔디를 정리하지 않아 걷기가 불편할 정도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입주민들의 생활공간을 확장시켜준 소중한 공간이었다.
잔디가 깔끔하게 정리됐던 시절, 사람들은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서 고추와 무를 말리고, 빨래를 널기도 했다. 또 가끔은 몇몇 집이 의기투합해 삼겹살을 구워 먹기도 했다. 당연히 여름밤이면 텐트를 치고 잠을 청하던 누군가도 있었다. 그때는 잔디밭 옆에 8차선 도로가 뚫리지 않았던 시절이라 조용하고 꽤 운치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나도 텐트에서 자고 싶다고 떼를 쓰다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아파트에 아직 공동체 문화가 남아있어 이웃집과 함께 김치도 담그고, 식사도 함께 하고, 음식도 서로 나눠먹던 일이 잦았다. 우리 집은 103호, 104호 가족들과 특히 친했다. 그 가족들도 이제 모두 용산주공아파트를 떠났지만, 어머니는 여전히 103호, 104호 아주머니들과 교류하며 지내고 계신다.
잔디밭은 당연히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도 했다. 나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일 학년 때까지, 열 명 남짓한 아이들과 테니스공으로 야구를 하고 낡은 공으로 축구를 했던 추억이 선명하게 가슴에 새겨 있다.
초등학교 시절엔 또래보다 키가 조금 컸기에 동네 아이들과 함께 뛰어노는 일에 빠지는 일은 없었다. 또 아버지가 야구방망이와 글러브 등을 쉽게 사주시곤 해 아이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도 물론 다른 초등학교(그땐 국민학교였다) 아이들과 시합을 하는 등 열심히 축구와 야구를 했지만, 나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허물없이 잔디밭에서 공을 갖고 노는 시간이 더 행복했다.
언제였던가? 우리끼리 야구를 하고 있을 때 1층에 사는 형이 우리를 불러 모아 야구 교실(?)을 즉석에서 진행한 적도 있었다. 포수가 공을 잡는 법, 투수가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법 등을 알려주며 꽤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야구를 했었다. 그 형도 이젠 몸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건너 건너 들었던 것 같다. 가진 건 없지만 홀로 남은 어머니를 지극히 모신다는 그 형. 이제는 형이라고 부르기도 뭐하지만, 오랜만에 생각이 난다.
내가 잔디밭에서 신나게 뛰어놀던 그때는 바야흐로 모든 게 풍요롭던 1990년대 초반이었다. IMF의 절망이 모든 걸 뒤덮을 것이라 예상도 못 하던 시절. 더군다나 이제 갓 사춘기에 접어들었던 내가 이런 시대적 배경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저 언제나 집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이 있었고, 주말에는 삼겹살도 자주 먹어 가끔 다른 게 먹고 싶기도 했던 배부른 시절. 대학에 입학한 큰 형은 대전에 있어 거의 볼 수 없고, 고등학생이던 둘째 형도 무슨 일을 하는지 도통 모른 채 밤에 잘 때만 잠깐 볼 수 있던 그 시절.
지난달, 고향에 들른 김에 사진을 찍으려고 용산주공아파트를 천천히 돌아다니다가 잔디밭에 발길이 멈춰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두서없이 끄적였지만 내 유년의 추억이 담긴 작은 잔디밭을 생각하며 나는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걸까?
아니다. 무언가를 얘기하고 싶다기보단 위로받고 싶은 거겠지.
그럼, 나는 무슨 위로가 필요한 걸까?
지금껏 살아온 내 삶이 그럭저럭 괜찮았다는 위로를 받고 싶은 걸까?
나이를 먹을수록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기 점점 힘들어지는 걸 실감하면서 자연스레 위로받는 일도 줄어드는 걸 깨닫는다. 그래서 함께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됐던 동무들과의 추억이 떠오르는 것 같다. 물론, 그때는 그게 위로 인지도 몰랐지만.
잔디밭에서 함께 뛰어놀았던 아이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이름도 얼굴도 흐릿한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나와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을까? 모두 어딘가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당차게 삶을 헤쳐나가고 있을까? 그러면 다행이겠지만 더러 누군가는 세상을 떠나기도 했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끝 모를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삶을 저주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은 나처럼 그 시절, 작은 잔디밭이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여기며 신나게 뛰어놀았던 순간을 문득 떠올릴까?
어딘가에 있을 그들에게 이제 우리가 추억을 함께 공유했던 용산주공아파트가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단 말을 해주고 싶다. 물론, 언제 무너져 내릴지 정해지진 않았지만 지금 남아있는 이들이 모두 떠나고 나면 곧 새로 들어설 아파트 단지를 위해 용산주공아파트는 소멸을 받아들일 것이다.
용산아파트의 소멸을 전하며 그곳에서 짧게나마 함께했기에 행복했었다는 말도 덧붙이고 싶다.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이 다가올 새로운 시절을 용기 있게 맞도록 힘을 준다고.
인생의 전반전을 보내면서 깨달은 삶의 진실로 위축될 대로 위축된 나지만 그래도 이곳, 용산주공아파트에서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잊은 그대들과 함께 웃고 뛰어놀았던 추억으로 다시 힘을 내 후반전을 뛰겠다고. 그러니 그들 중 누구라도 나보다 더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희망을 놓지 말라 말해주고 싶다.
우리 다시 한번 힘을 내자고, 말이다.
결국, 이 마음을 고백하도록 잔디밭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