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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신웅 Feb 13. 2023

다음 소희

끝내 무너지는 소희와 유진을 바라보며

정주리 감독의 영화 <다음 소희>는 건조한 사건 기사에 살을 붙이고, 뜨거운 피를 흐르게 해 기어이 나를 울린다. 내 가슴이 흘리는 눈물은 감동이 아니라 미안함과 부끄러움, 무력감으로 버무려진 속죄의 눈물이다.

나는 이 작품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두 주인공이 끝내 무너지는 과정을 담은 영화라 말하고 싶다.

이미 여러 기사에서 언급한 대로 이 작품은 콜센터로 현장실습을 나갔던 실업계고등학교 학생이 노동착취를 견디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 왜 아직 19살밖에 되지 않았던 청춘이 절망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우리 사회가 어떻게 한 개인을 처참히 무너뜨리고 착취하는지 이 작품은 담담하면서도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그 과정에서 어설픈 해법을 제시하거나 뜬구름 잡는 희망을 철저히 배제해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무엇보다 작품을 다 본 후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다.



<다음 소희>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는 나뉘지만, 전반부와 후반부의 공통점은 어떻게 주인공이 심리적으로 무너지는지 그 과정을 따라간다.

우선 전반부의 소희는 가슴에 품었던 부푼 희망이 어떻게 분노로 바뀌고, 그 분노가 체념과 절망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후반부 유진 또한 처음에는 감정의 동요가 없는 냉정하고 차가운 내면이 어떻게 불같이 타올랐다가 끝내 허무하게 좌절하고 가라앉는지 보여준다.

이 작품은 극적인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는 부류는 아니지만 보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 이유는 격렬하게 요동치는 인물들의 내면을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겪는 상황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전반부에 소희가 끝내 극단적인 선택으로 향해가는 과정은 작품을 본 대부분의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술자리에서 자신과 친구를 험담하는 남자들과 싸우고, 자신을 속인 동료를 그냥 지나치지 않는 외향적인 성격의 소희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정 힘들었으면 그냥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있었을 텐데. 충분히 소희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 같은 선택을 한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이 발휘된다. 바로 소희는 자신을 둘러싼 관계에 관한 책임감 또한 강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집안의 부모님을 위해, 자신을 믿는 학교 담임 선생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해, 또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는 선배를 생각하며 소희는 쉽게 자신이 겪고 있는 부당함을 차버리지 못한 거다. 이걸 감독은 설득력 있게 구체화하며 극의 개연성을 확보한다.



<다음 소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역시 구멍가게로 들어오는 가녀린 빛을 담은 장면이다. 마치 소희는 그 빛을 보고 결심을 한 것처럼 작품에서 그려지기도 한다. 소희는 자신의 추운 발에 내려앉던 빛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안식의 빛으로 생각하진 않았을까? 숨 막히고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그저 언 발을 녹이는 작은 빛 정도만이라도 누릴 수 있는 안식을 향해 고요한 호수걸어갔던 것은 아닐까?

또 유진은 소희가 앉았던 자리에서 똑같이 발에 내려앉던 빛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유진은 그 빛을 보며 소희가 원했던 작은 안식을 이해하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볼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건 바로 작품을 다 본 후, 겪게 될 무기력과 자괴감에 오래 머무르지는 말라는 것이다. 물론, 2시간 동안 겪은 고통스러운 감정 노동에 지쳐 바로 잊어버리는 이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처럼 작품을 보고 난 후, 꽤 오래 자괴감과 무기력에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에 너무 매몰되면 이 작품을 본 의미마저 없어지기 때문에 결코 오래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다음 소희>는 우리가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외면했던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그렇다면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는 자신을 더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감정을 극복하고, 끝내 분노의 감정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 조금이라도 커지고, 그만큼 우리는 주변에 소희와 같은 이들을 마주칠 확률을 줄일 수 있다.     


2023년이 됐다 하더라도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과 차별, 그리고 착취. 이 구조로 돌아가는 사회 안에서 굴종을 강요당하는 개인. 그렇게 소모되는 나와 너.

사회는 이 구조에서 제외된 소수의 운 좋은 이들로 우리의 사고를 마비시키고, 경쟁과 굴종을 부추긴다. 너도 저런 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며 현혹하고, 또 현혹당하는 동안 사회 구조는 더욱 견고해진다. 모순과 부조리가 극에 달해 누가 봐도 이건 아니라 생각이 들지만, 이걸 바꾸는 건 어려운 일이기에 결국에는 무력감만 남는다. 도대체 이 사회를 어디서부터 바꿔야 한단 말인가.

그렇더라도 이렇게 머무를 수는 없다. 용기를 내 유진처럼 세상에 소리라도 질러야 한다. 작은 소음에 그치더라도 반복되고, 겹치고, 그렇게 커지면 다시 한번 세상을 변화시킬 무기가 될 수 있다.


 난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번 이 깨달음을 내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부터 소환했다.

그래서 <다음 소희>가 너무나 고맙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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