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산티아고
산티아고
콜럼버스가 침공한 지 8년 지났다. 1,500년에 콜럼버스가 히스파니올라라고 이름 붙이기 전에 이 섬을 기스가야 또는 아이티라고 불렀던 다이노들은 80%가 죽었다. 1,530년에는 살아남은 이가 4%도 되지 못했다. 노동력이 빠르게 부족해졌다. 따라서 금 채취량도 줄어들었다. 기독교인들은 이제 노동력을 히스파니올라 밖에서 구해와야 했다. 바하마 제도와 쿠바의 원주민들이 포획되었다. 콜럼버스에 이어 두 번째로 신대륙 총독으로 부임한 콘키스타도르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de Velázquez는 콜럼버스의 2차 항해 때 배를 타고 카리브에 온 이달고다. 그가 1,511년에 히스파니올라와 가까운 쿠바섬의 오리엔테 일부를 정복했다.
처음에는 바라코아Baracoa에 쿠바섬의 수도를 두었다. 수도 이름을 ‘승천하는 성모 마리아Nuestra Señora de la Asunción’로 정했다. 너무 성스러운 이름이었다. 그래서 스페인 기독교도들도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다이노들의 고을 이름인 바라코아라고 불렀다. 이곳은 대서양에 접해있다. 그렇지만 대서양에서 카리브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만이기도 했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등줄기의 대서양 끝자락에 있으면서 히스파니올라까지는 불과 90km 정도 떨어져 있어 바라코아는 히스파니올라에서 꽤 가깝다. 다이노들은 카누로 2~3시간이면 도달했다. 다이노들은 이 해협을 건너 물건을 교환하고 섬에서 생긴 소식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화권이었다.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타운에 근거지를 잡고 난 뒤로 히스파니올라의 동족 다이노들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쿠바 다이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저승사자들이 떼로 몰려와 기스가야 다이노들의 씨를 말려 죽이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은 카리브의 구름보다 빠르게 이 섬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두려움에 치를 떨었지만 달리 방도는 없었다. 그때 벨라스케스가 바라코아에 상륙했다. 다이노들에는 올 것이 온 셈이었다. 벨라스케스가 왔을 때 그를 뒤따라 해태이가 400명의 기스가야 용사를 데리고 왔다. 히스파니올라에서는 이미 대항하기에 너무 늦었다. 해태이의 다이노는 벨라스케스의 스페인군을 상대로 몇 년에 걸쳐 대항하며 끈질긴 산악전투 끝에 해태이가 사로잡혀 화형 당했다.
1515년 벨라스케스가 쿠바섬에서 7개의 식민지 거점도시를 건설했다. 바라코아, 바야모, 산티아고, 트리니다드, 까마궤이, 산티 스피리투스, 아바나가 그때 세워졌다. 도시마다 판사와 보안관, 시의회와 서기관 같은 이들을 두었다. 도시마다 교회를 세웠고, 금을 채굴하고 제련소도 운영했다. 도시를 만드는데 다이노가 강제 노역 당했다. 벨라스케스가 산티아고 데 쿠바를 건설하고 수도를 산티아고로 옮겼다. 오늘날 산티아고 데 쿠바의 중심지인 세스페데스 광장에는 이 건물들이 모두 1520년을 전후해 완성된 벨라스케스 총독 관저와 교회, 시의회 의사당 건물이 있다. 이때는 쿠바에 흑인들이 노예로 수입되기 전이다. 산티아고는 1528년부터 1589년까지 스페인이 멕시코와 플로리다 등을 본격적으로 개척하는 시기 동안에 카리브 아메리카 전체를 통솔하는 총독 사령부가 되었다. 1556년 스페인은 총사령부를 아바나로 옮기고 1607년에는 아바나가 아메리카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다.
섬은 좁았다. 금도 나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자들은 한 번에 부와 신분을 바꾸려는 자들이었다. 많은 자들이 쿠바를 떠났다. 황금이라는 또 하나의 신을 좇아 멕시코로 떠났다. 아스테카 제국에는 황금이 많았다. 게다가 황금을 캘 노예로 삼을 다이노가 풀보다 많이 살고 있었다. 1517년과 1520년 사이에는 쿠바에 약 2,000명의 스페인 사람이 있었다. 1,520년부터 1,540년 사이에 80%가 떠나고 쿠바섬에는 단 150명 정도만 남았다. 그중에서도 수도인 산티아고에 남은 스페인 사람은 3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이 기간에 산티아고 데 쿠바의 주요 건물들이 지어졌다. 30명 정도에 불과한 스페인인들이 다이노들을 동원하여 대공사를 진행한 셈이다. 스페인인에 굴복한 가시관과 니다이노 계급의 지휘를 따르는 다이노들이 대공사에 동원되었다. 이 시기에 쿠바섬의 다이노들이 거의 죽어갔다. 아름다운 마을 트리니다드에는 단 한 명의 스페인 사람도 살지 않았다. 버려진 마을로 변했다. 쿠바 최초로 유럽인들이 이주한 도시 바라코아도 그랬다. 1544년에 작성된 문서는 섬 전체에 스페인 사람들은 122명만 남았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노예가 아닌 자유 상태의 다이노가 900명이 살고 있다고 했고, 노예들이 700명 살고 있다고 했다. 노예 가운데는 아프리카에서 잡아 온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예 중 다이노가 얼마나 되는지는 구분하지 않았다. 절반이라고 가정하면 이때 쿠바섬에서 다이노는 1,200명쯤 살아남았다. 콜럼버스가 상륙할 때 60만 명의 다이노가 살고 있었다. 이렇게 되는데 5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인구조사는 깊은 산마루에서 민족의 씨를 유지해가고 있던 씨마루아보들은 셈하지 못했다. 살아남아 씨를 지키던 자들이 산속에서 마을을 만들고 있었다. 이 시기 쿠바 총독 벨라스케스의 무덤이 산티아고 데 쿠바의 중심 건물인 아순시온 대성당 건물 지하에 안치되어 있다. 페르디난드 국왕은 쿠바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막아야 했다. 해태이와 과아마Guamá 같은 다이노 저항 세력을 불에 태워 죽인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자칫 다이노들에게 섬을 다시 빼앗길 수도 있었다. 그래서 쿠바를 떠나면 쿠바에 남은 재산과 노예를 모두 몰수하겠노라 선언했다. 그런 왕의 명령을 낭독할 관리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두 멕시코로 떠났다. 이렇게 쿠바 동부에서 유카탄으로 건너간 기독교인들이 아스텍을 짓밟고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를 침공했다. 1530년대의 일이다. 이때 쿠바에서 출항한 자들이 플로리다를 발견했다. 유럽인들 중에서 미국이라는 아메리카를 발견한 자들은 콜럼버스가 아니라 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