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 황금열쇠
황금열쇠
1555년 7월, 허리케인이 지나갔다. 아바나만 입구에 있는 감시병이 깃발을 흔들었다. 흩날리는 깃발의 몸짓이 다급하여 무척 불안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배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총독이 척후 기마 둘을 보내서 만 안으로 들어오는 배들의 정체를 확인하라 했다. 상황이 파악되기도 전에 두 척의 배에서 해적들이 쏟아져 내렸다. 200 넘는 무장한 이들이 제법 잘 훈련된 군사처럼 대오를 정렬하더니 진군했다. 아무도 나서서 저항하지 못했다. 다이노들이 약탈자 스페인 사람들을 바라만 보았듯이 스페인 사람들도 해적들의 약탈과 행패를 지켜보기만 했다. 약탈자들은 맨 먼저 레알 푸에르사의 출입문을 부쉈다. 그리고 그들의 깃발을 올렸다. 콜럼버스가 다이노의 섬마다 스페인식 이름을 붙인 것으로 스페인 땅이라고 했듯이 해적들은 깃발을 올림으로써 자신들의 영토라고 선언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린 지 30분 만에 끝난 일이었다. 목격자들은 “어찌나 빠르게 일어난 일인지라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라고 증언했다. 이 해적의 우두머리는 자크 드 소르다. ‘절멸의 천사’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악명 높은 해적이다. 그는 16세기 카리브에서 가장 두려움의 대상인 해적이었고 파괴의 상징이었다. 그는 ‘나무 의족’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프랑스 해적의 수하에 있었다. 프랑스에 신교가 퍼질 때였다. ‘나무 의족’도 신교도였고, ‘절멸의 천사’도 프로테스탄트였다.
이날 30분간의 맹렬한 습격이 프로테스탄트가 유럽 밖에서 가톨릭 교황의 보물을 빼앗은 최초의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800년 동안 이슬람을 상대로 종교 전쟁을 했던 유럽은 이제부터 구교와 신교가 싸우는 종교 전쟁에 휘말렸다. 예수는 하나인데 예수가 예수를 죽이는 기괴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예수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황금을 위한 전쟁이었다. 절멸 천사가 아바나 몸값으로 30,000페소를 요구했다. 마드리드와 가톨릭교회로서는 응할 수 없었다. 그 대가로 아바나는 파괴되고 무너진 레알 푸에르사는 다시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때 가톨릭교회와 병원, 집만은 살아남았다. 집은 해적들이 묵을 숙소였고, 병원은 자신들을 치료하기 위해 놔두었다. 교회를 불태우지 않은 것은 신앙심 때문이 아니었다. 신을 모욕하기 위해서였다. 해적들은 먼저 가톨릭 사제들의 옷을 벗겼다. 해적들이 망토로 만들어 입었다. 성배와 다이아몬드가 장식된 성배 안치기는 자루에 쓸어 담았다. 처녀 마리아의 상을 막대기로 쿡쿡 찔렀다. 그리고 드레스를 하나씩 벗겼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몸을 사지 절단했다. 그리고 장작불에 태워 순교시켰다. 역사는 반복되었다. 가톨릭이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다른 종교에 했던 방식 그대로 신교는 가톨릭을 따라 했다. 유럽의 신구 기독교 간 종교 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가톨릭이 다이노를 진멸할 때는 비극이더니 기독교끼리 서로 진멸하려는 전쟁은 희극이었다. 박멸 천사는 아바나 근교 코히마르도 방문했다.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둘러보았다. 6명의 흑인 노예를 인질로 삼고 출장비 명목으로 몸값을 달라고 요구했다. 플랜테이션 농장주가 흑인 노예의 목숨값을 낼 리 없었다. 8월의 보름달이 환한 밤 박멸 천사가 농장주 대신 노예 6명의 목을 잘라 아바나 광장 한가운데 걸었다. 그들이 스페인이 보내온 배상금 2,200페소와 약탈한 황금 궤짝을 싣고 떠났다. 서양 역사는 오디세우스의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트로이를 파괴한 사건을 가장 잔인하게 진멸한 사례로 기억한다. 드 소로가 떠날 때 스페인 기록관은 “그리스가 트로이를 부술 때도 이렇게까지 부수지는 못했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1,580년 프랑스의 기록에 따르면 카리브 앞바다에 ‘해적들이 케이크처럼 둥둥 떠’ 있었다. 이 바다가 라로셸 항처럼 프랑스 해적선으로 가득 찼다고도 했다. 라로셸 항은 카리브와 지중해 일대에서 활약하는 프랑스 해적들의 근거지였다. 프랑스가 노예무역에 가담하자 이 항구는 프랑스 노예무역의 거점이 되었다. 라로셸의 해적이 프랑스 해군으로 전환된 뒤로 프랑스가 북아메리카 식민지 정복 전에 뛰어들었을 때 미시시피 유역을 점령해 가면서 루이지애나와 세인트루이스를 차지했다. 영국도 스페인이 잘 나가는 꼴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정복하여 귀한 향료를 싣고 항해하자 선박을 습격했다. 페루, 칠레, 남미에서 은을 싣고 오는 스페인 배도 공격했다. 카리브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구 전체가 동물의 왕국이 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해마다 100명의 해적 두목에게 스페인 화물을 공격할 수 있는 사략 면허를 팔았다. 그것이 100척의 배라는 뜻은 아니다. 한 명의 두목은 수십 척의 해적 선단을 운영하는 해운기업이었다.
스페인 왕실은 정신을 차렸다. 아바나가 너무 취약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1년 동안 신세계 전역에서 다이노들을 착취해 얻은 금은보화를 빼앗기면 스페인은 한 해 재정이 텅 비었다. 아바나를 방어하기 위한 대응책이 나왔다. 스페인 국왕은 문관이 아닌 무관을 아바나와 쿠바섬 전체를 통치할 식민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먼저 플로리다에 마련된 프랑스 해적 거점을 타격했다. 그리고 더 크고 단단한 레알 푸에르사를 다시 건설했다. 지금 아바나 아르마다 광장 옆에 있는 레알 푸에르사가 이때 세워졌다. 그리고 이 요새 꼭대기에 보다디야 동상을 풍향계로 만든 히라디야를 올렸다. 곧이어 두 개의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아바나만 입구 양쪽의 요새가 그것이다. 말레콘 쪽 산살바도르 요새가 1,600년에 먼저 완성되었다. 그 맞은편 언덕 높은 곳에 있는 모로 성은 1630년에 완성되었다. 3인의 동방박사 성이라는 이름이 아바나 모로 성의 본래 이름이다. 이 공사비는 모두 멕시코 금광에서 충당되었다. 이렇게 지은 두 개의 요새가 영국, 프랑스 해적들에게 스페인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었다. 이제 보디디야 시절의 아바나도 아니고, 천사가 박멸하는 아바나도 아니었다. 이곳에 설치된 대포들로 이제 어느 해적선도 함부로 아바나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 대포가 18세기까지는 멕시코와 페루 리마의 대포에 이어 아메리카 대륙에서 3번째로 큰 대포였다. 아바나는 1,000여 척의 배가 정박할 수 있고, 아메리카에서 가장 넓은 조선소를 갖춘 항구였다. 유럽 세계는 이 두 요새가 들어선 아바나를 일컬어 “아바나는 열쇠다. 이 섬을 여는 열쇠가 아니라 신세계 전체를 여는 열쇠다”라고 평했다. 이 성을 완성하고 펠리페 2세가 아바나에 도시를 상징하는 문양을 하사했다. 세 개의 성채가 있고 그 위에 열쇠가 있다. 열쇠는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세 개의 성과 황금열쇠를 도토리가 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