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 하반나
하반나
아바나La Havana를 영국이 차지했다. 모든 것이 영국식으로 바뀌었다. 이름도 영국식인 하반나The Havannah로 바뀌었고 약탈도 영국식이었다. 본디 이 도시의 이름 아반 또는 아반니는 다이노들이 지도자라는 뜻으로 부르는 말이었다. 스페인 약탈자들이 그 말을 아바나라 바꿔 부르더니, 영국 약탈자들은 하반나라고 불렀다. 아바나 침공을 지휘하던 영국 백작은 공세를 앞두고 선원들에게 “우리는 이제 유대인들처럼 부자가 될 것이다. 아바나는 돈키호테처럼 어설픈 녀석들이 금을 긁어모아 길을 만들어놓은 곳이다. 그 금은 우리 것이다. 마음껏 뜯어와도 좋다”라고 말한 뒤 발포 명령을 내렸다. 30여 척의 군함과 200여 척의 상선에서 내린 영국인은 군인이 12,000명, 10,000명의 해적 상인, 2,000명의 노예, 600여 명의 자유 흑인 군인이었다. 본디 해적 떼였던 이들은 약탈에 흠씬 취했다. 군인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스페인은 영국군의 약탈에 대항할 수 없었다. 그런 형편치고는 스페인의 저항도 끈질겼다. 프라도 총독은 노예를 이용했다. 아바나 노예들에게 전투에 참여하면 노예 신분에서 풀어준다고 했다. 압도적인 전력 우위에도 영국군이 고전했다. 목숨을 걸고 전투에 뛰어드는 아바나의 물라토와 흑인들 때문이었다. 노들이 소망한 자유, 자유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이미 자유 신분인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자신들이 자유 시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사탕수수를 자르는 칼 마체테를 쥔 13명의 노예가 총으로 무장한 14명의 영국군이 지키는 모로 성을 공격했다. 프라도 총독은 모로 성을 되찾은 노예들을 즉시 해방하고 자유를 주었다. 날마다 전투 지원자가 늘었다. 스페인 군인이 포기한 아바나를 노예들이 지켰다. 자유야말로 가장 강한 전투력이었다. 전투로 죽은 노예의 수가 스페인인들보다 훨씬 많았다. 이들의 숫자가 역사에 기록된 것은 스페인 왕이 이들의 죽음을 역사에 남겼기 때문이다. 재물인 노예를 잃은 노예 주인들에게 스페인 왕은 그 수만큼 세금을 감면하여 보상했다. 노예들은 스스로 보상하고자 했다. 이때 싸운 노예 출신 목수 아폰테Aponte가 흑인 노예들이 영국인들과 싸워 아바나를 지켰다는 내용을 담은 그림첩을 그렸다. 플랜테이션 노예들이 글자는 읽을 수 없어도 그림은 볼 수 있었다. 그림이 봉기를 선동했다. 이 무렵부터 쿠바에는 수많은 노예 봉기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폰테가 주도한 반란(1812)이었다. 반란과 봉기는 같은 말이다. 보는 자의 위치가 다를 뿐이다. 아폰테는 노예제 폐지와 식민지 폭정 타도, 차별 없는 사회, 쿠바 독립을 기치로 내세우고 대규모 봉기를 주도했다. 플랜테이션과 설탕공장을 불태우고, 아바나의 무기고를 털었다. 백인을 죽였다. 기득권을 잃을 스페인은 이를 반란이라 했고, 기득권을 타파할 유색인들은 이를 봉기라고 불렀다. 쿠바에서 반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쿠바 흑인과 물라토들은 이 반군의 유산을 이어받아 스페인을 축출하고 독립과 노예 해방 투쟁을 계속해갔다. 그 끝에 피델 카스트로의 혁명이 있었다. 전쟁은 많은 것을 바꾼다. 쿠바에서 벌어진 스페인과 영국,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터가 된 쿠바에 이제 독립 혁명의 씨앗이 뿌려졌다.
영국의 강력한 적은 자유를 소망하는 흑인과 물라토만이 아니었다. 기후 또한 영국을 끝없이 괴롭혔다. 영국과 아바나는 기후가 천양지판이다. 허리케인 다음에 뜨겁고 습한 날씨가 이어지었다. 견디기 어려웠다. 깨끗한 물도 구할 수 없었다. 황열병, 이질도 심했다. 검은 피를 쏟으며 병사들이 죽어 나갔다. 스페인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지 두 달 만에 3,000명의 영국인이 죽었다. 노예선이 다니는 카리브와 유럽을 휩쓸었다. 영국이 플로리다를 영구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스페인이 양허하는 조건으로 아바나를 스페인에 돌려주었다. 산업혁명 이후로 교황은 영토 문제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었다. 영국이 쿠바를 쥐고 있는 동안 쿠바는 많은 것을 새로 경험했다. 우선 영국은 아바나에 가톨릭교를 강요하지 않았다. 종교라는 철갑을 벗은 아바나는 한결 자유로워졌다. 이뿐 아니라 영국은 사유 재산권도 인정했다. 스페인 국왕처럼 모든 재산이 다 왕의 것이라고 하여 재산을 빼앗아 왕실 소유로 만드는 일도 하지 않았다. 아바나의 사업가들이 스페인보다 영국의 정책을 환영한 것은 당연했다. 아바나 플랜테이션 사업가들이 딸들을 데리고 무도회장에 드나들었다. 딸들은 영국군 장교들과 사교춤을 추며 어울렸고 장교들은 밤마다 달콤한 세레나데를 불렀다. 아바나의 사업가들은 영국이 스페인을 전쟁에서 이기자 영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무엇보다도 설탕 산업에서 영국과 쿠바는 호흡이 잘 맞았다. 설탕과 영국의 공통점은 둘 다 노예 수탈과 무척 가깝다는 점이다. 아바나의 신흥 엘리트들은 노예 노동을 통한 설탕 수익에 탐닉했고, 길어진 전쟁을 치르면서 비용이 많이 든 영국인들은 전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노예 수급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했다. 유럽과 북미에서 설탕은 지배층의 부유한 신분을 상징했다. 공장제도가 발전하면서 삶과 사고방식,식습관에도 변화가 몰려왔다. 악조건의 생활환경에 놓인 빈민과 하급 노동 계층도 설탕의 단맛에 빠졌다. 가난할지라도 홍차나 커피에 설탕을 넣어 먹어야 했다. 산업혁명이 진척될수록 부르주아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설탕을 듬뿍 넣은 홍차와 커피를 주는 일이 늘어났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음식 대신 설탕으로 열량을 채워야 했다. 설탕을 듬뿍 넣은 커피는 기운을 돋워주고 따뜻해서 커피를 마시면 영양분을 섭취하는 듯한 착각을 받았다. 귀족의 전유물이던 설탕이 산업혁명 이후로 노동자들의 마약이 된 셈이다. 노동자들이 설탕은 가짜의 양분이라는 것을 서서히 알기 시작했다. 설탕 소비량이 늘어나자 분노도 함께 늘어났다. 영국이 쿠바에서 설탕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80년 뒤에 카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낭독했다.
왕실이나 먹던 설탕을 노동자들까지 대량 소비하는 시대가 되었다. 설탕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운명을 또 휘저었다. 카리브의 숲은 베어졌고, 그 자리에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이 이식되었다. 그 무렵 아프리카에 살던 총인구 110만 명 가운데 삼분의 이에 해당하는 사람이 노예로 끌려와 카리브해에서 설탕을 만들다 생을 마쳤다. 설탕이 가져다준 수익은 엄청났다. 영국은 카리브해에서 바라바도스Barbados라는 작은 섬을 소유했지만, 그 섬에서 만드는 설탕이 그 어떤 사업보다 좋은 돈벌이였다. 그때 영국은 이미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호주 같은 식민지보다 카리브의 작은 섬 바르바도스가 훨씬 큰돈을 벌어주는 식민지였다. 영국은 1,625년부터 쿠바를 차지하기 전인 1750년까지 125년 동안 35만 명을 설탕 농장에 끌어넣었다. 쿠바를 차지할 무렵에는 자메이카의 설탕 생산량이 바베이도스를 능가했다. 자메이카라는 영국의 새 진주에는 51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노예의 유기물이 녹아들었다.
이때 아바나 주위에는 설탕 플랜테이션이 100여 개도 아직 되지 않았다. 노예도 4천여 명 정도였다. 영국 식민지 자메이카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아바나의 몇 안 되는 설탕 사업가들은 새로운 지배국이 된 영국이 어떤 나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설탕을 생산하는 나라, 바다를 장악하여 아메리카 대륙에 노예를 공급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나라가 영국이었다. 스페인이 영국에 항복했을 때 쿠바 사업자들은 이제 쿠바에도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바베이도스와 자메이카를 능가하는 돈벌이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영국을 파트너 삼아 대서양의 돈이 아바나만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할 때가 되었다고 여겼다. 영국도 화답했다. 영국은 곧바로 스페인이 부과한 막대한 세금을 없애주었다. 사업자들에게 가장 큰 혜택은 세금 축소다. 아직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미 13개 주 식민지에서 자본가들이 아바나로 사업을 확장했다. 영국이 점령하던 몇 개월 동안 700척이 넘는 북미의 배가 아바나만을 드나들었다. 영국이 아바나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북미와 아바나를 왕래하는 배는 통틀어 20여 척도 되지 않았다. 배는 설탕과 담배를 싣고 떠났다. 뉴욕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섬은 베드로우 섬이다. 이 섬 주인 베드로우는 미국 상인의 이름이다. 그는 이 무렵에 쿠바와 거래해 큰돈을 벌어 이 섬을 소유하게 되었다. 어찌나 많은 물자가 북미에서 실려 왔는지 이 교역에 불만을 품은 스페인 관리는 저 많은 물량을 소비하는 데 몇 년씩은 걸릴 것이라고 투덜댔다. 쿠바에서 설탕 산업을 시작한 것은 콜럼버스와 스페인이었다. 이것을 크게 확장하고 상업적으로 기틀을 만든 것은 영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