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를레앙

#215 사카로크라시

by 조이진

사카로크라시

7년 전쟁이 끝날 때 세계의 이목은 쿠바에 쏠렸다. 아바나는 아메리카의 열쇠였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졌지만, 쿠바를 되찾고 싶었던 스페인은 영국 의회에 필사적으로 로비했다. 영국 의회는 자메이카의 설탕 자본에 의해 장악돼 있었고, 자메이카 자본가들은 쿠바에 비하면 아직 습지에 불과하지만, 너무나 광대한 미개척의 새로운 땅 플로리다를 원했다. 200여 척의 배로 몰려와 모로 성을 점거하고 아바나 시내를 향해 대포를 퍼부어 댄 지 11개월 만에 영국인들은 아바나를 떠났다. 차고 어두운 비구름을 이고 살았던 영국인들에게 열대 우림의 쿠바 기후는 견디기 어려웠다. 스페인 백작이 아바나에 스페인 왕실 깃발을 올렸다. 플로리다에 살았던 스페인 사람들은 짐을 싸 다시 스페인의 땅이 된 아바나로 되돌아갔다. 스페인 사람을 대신해 영국에 대적해 싸워준 노예 156명을 해방했다. 노예들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전투에서 한 일을 상세히 설명하고 증인을 내세워야 했다. 훨씬 더 많은 노예들이 전투에 참여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결국 해방되지 못했다. 스페인은 노예 없이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끌려 나온 노예들이 아바나 시내를 향해 포탄을 쏟았던 모로 성을 보강했다. 백작은 스페인 국왕에게 ‘이제는 스페인에서도 모로 성이 보일 정도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베리아에서 아바나가 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스페인이 아바나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분명히 이전과 달라졌다. 국왕은 아바나 시내에 정규군인 4,000여 명과 보충 병력 6,000여 명을 상주시키며 훈련했다. 아바나 레알 푸에르사 옆 아르마다 광장에 이들의 무기가 늘 정비되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영국이 했던 것처럼 많은 노예가 다시 아바나 항에 들어왔고, 배들이 설탕과 담배, 마호가니 목재를 싣고 수시로 북미와 유럽으로 떠났다. 이때 스페인이 수출한 설탕 선적량이 연간 1만 톤에 달했다. 영국이 지배할 때보다 다섯 배나 되는 양이었다. 그런데도 스페인에 설탕은 여전히 지엽적인 작목에 불과했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쿠바산 시가가 유럽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기 때문이다. 시가는 스페인 왕실에 현금 그 자체였다.


스페인이 다시 아바나의 주인이 되었지만, 장악력은 그전과 같을 수 없었다. 스페인 진영에서 7년 전쟁의 유일한 수혜자는 쿠바 크리오요들이었다. 영국은 11개월의 짧은 기간만 쿠바를 지배했지만, 아바나의 크리오요들은 둔감하고 이기적인 스페인 왕실과는 매우 다른 영국 스타일을 경험했다. 영국은 상업과 이윤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상업주의 가치관을 갖은 나라였다. 더구나 쿠바 엘리트들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영국에 수출할 때 무관세 혜택까지 주었다. 오직 스페인으로 보낼 때만 세금을 부과했다. 유럽 여러 항구로 수출할 수 있도록 수출항을 열어주기도 했다. 이 조치로 빈사 상태의 쿠바 상업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영국은 레알 콤파니아도 기업 가치를 산정해서 쿠바 크리오요 자본가에게 매각해 주었다. 같은 시기였지만 스페인은 여전히 전제주의로 통치하는 반면 영국은 중상주의를 지나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전화하고 있었다. 영국은 왕실의 논리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로 통치하고 있었다. 이미 프랑스 식민지 아이티나 영국 식민지 자메이카에서는 설탕 산업이 급성장했다. 반면 쿠바에서는 스페인 왕실의 규제로 설탕 산업이 여전히 유치 단계에 머물렀다. 담배 농사는 소규모 농업으로 적합했지만, 설탕은 자본 집약적인 성격이 짙다. 많은 수의 노예를 동시에 투입하는 노동 집약적이고, 복잡하고 특수하게 고안된 기계 설비가 필요한 당시로서는 대단한 규모의 장치 산업이었다. 대량으로 농사지을 대단위 토지와 벌목할 나무가 충분한 산을 배후지로 두어야 하는 등 사업의 규모가 담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 수익도 역시 담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쿠바에서는 설탕 산업의 가능성이 아직 잠들어 있는 채로 있었지만, 영국이 설탕 산업의 가능성을 깨워준 것이다. 영국은 대량으로 흑인 노예를 쿠바로 수입했다. 단 11개월 통치하는 동안 4,000명 이상 끌어왔다. 영국은 쿠바를 떠날 때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 자산을 쿠바 크리오요들에게 상식적인 가격으로 매각했다. 만일 스페인 왕실이었다면 터무니없는 값을 요구했을 것이다. 영국은 아바나 크리오요들에게 영국의 또 다른 이점도 보여주었다. 해군력이었다.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으니 아바나 크리오요들도 비교우위의 가격으로 설탕을 유럽 시장에 직접 판매할 수 있음을 경험했다. 영국군이 쿠바에서 철수해 북미와 영국으로 되돌아갔다. 시가 시장도 커졌다. 마침 미국도 독립 혁명을 이루어냈다. 쿠바 크리오요 자본가들도 독립의 자신감이 붙어갔다. 이러던 차에 스페인이 다시 쿠바에 되돌아와서는 레알 콤파니아를 반납하라고 종용했다. 쿠바인 주주들이 스페인 왕의 명령을 거절했다.


영국이 철수한 2년 뒤 아바나에서 이베리아로 가는 항구가 다변화되었다. 중남미 항해에 대한 세비야의 독점권이 소멸하였다. 카스티야 왕실은 오래전에 이베리아 북부 바스크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했다. 쿠바에서 갈리시아 항구 라 코루냐La coruña로 가는 항로가 새로 열렸다. 이것은 스페인과 쿠바가 새로운 관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더는 스페인 왕실이 쿠바 무역을 독점할 수 없음을 사실상 확인했다. 배는 물자만 실어 나르지 않는다. 사람들이 쿠바로 옮아왔다. 이베리아 북부는 바스크의 땅이다. 바스크는 상업에 강한 민족이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상업하여 산티아고 길을 만들어낸 민족이다. 그들이 이베리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이베리아의 북쪽 문의 주체들이었다. 바스크들은 카스티야의 식민지 정복자 군인들과는 접근이 달랐다. 바스크들이 쿠바에 들어오니 쿠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라 코루냐. 바스크 지역 항구가 열림으로써 세비야가 독점하던 아메리카 교역이 다변화되었다. 쿠바는 스페인 왕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영국이 떠난 뒤로 스페인과 카나리아에서도 대자본을 갖춘 상업가들이 설탕 사업을 위해 속속 쿠바에 들어왔다. 노예도 속속 대량 수입되었다. 대개는 스페인 왕이 챙겨가는 세금을 피해 밀수로 들여왔다. 쿠바는 점점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쿠바에서도 설탕 플랜테이션이 본격 활성화되었다. 설탕 한 방울은 피 한 방울. 피의 단맛으로 성장한 크리오요 세력이 아바나의 상류 문화를 형성했다. 설탕으로 부자가 된 쿠바 크리오요들은 패션과 오페라 하우스 문화에서도 파리지앵에 버금가는 수준을 누리며 살았다. 역사학자들은 이런 크리오요들이 지배하는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쿠바 사회를 사카로크라시saccarocracy 체제라고 했다. 영국에게 독립을 승인받자마자, 미국 자본은 즉시 쿠바에 투자를 시작했고 설탕 플랜테이션이 대거 개발되었다. 돈을 투입하니 이제는 쿠바를 합병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영국의 식민지 신세에서 탈피하자마자 주변국을 식민지로 삼고자 야욕을 드러냈다. 미국 자본이 쿠바에 들어오자 판이 달라졌다. 그동안은 스페인 왕실이 노예 수입을 제한하고, 스페인 말고는 다른 유럽 시장에는 쿠바의 설탕을 판매하지 못하게 해 왔다. 그러나 미국 자본이 스페인 왕실의 말을 들을 이유는 없었다. 노예 수급을 통제하고 이문만 챙겨간 스페인 왕실의 간섭도 받아줄 이유도 없었다. 미국의 자본이 침투한 사카로크라시가 쿠바를 바꾸기 시작했다. 쿠바에서 사탕수수밭이 벌판의 불처럼 빠르게 넓어졌다. 스페인이 포르투갈을 합병한 뒤 포르투갈의 오랜 사업인 노예무역도 스페인에 넘어왔다. 포르투갈은 주로 칼라바르Calabar 지역에서 노예를 사 왔다. 스페인 왕실이 쿠바로 노예를 수입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판매수익 때문이었다. 이제 쿠바에서 처음으로 흑인 노예들을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자본까지 투입되어 설탕 플랜테이션이 활발해졌으므로 노예수요는 폭증했다. 스페인 왕실은 노예를 대기 바빴다. 쿠바 항에 다른 나라의 노예선 입항도 허용했다. 이제 설탕이 쿠바의 황금 세기를 열었다. 쿠바의 자본주의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쿠바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노예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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