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오를레앙

#216 뉴올리언스

by 조이진

뉴올리언스

스페인 정복자 소토는 뉴올리언스를 탐험했다. 강의 맨 아래 삼각주에 있는 뉴올리언스 지역에는 아주 많은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소토는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올라 오대호까지 진출했다. 스페인은 아메리카 전체에 너무나 식민지 땅이 많아서 금과 은이 나오지 않는 땅 따위는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그로부터 150년 지나 오대호 주변에서 원주민에게 모피를 수집하던 프랑스 가죽 상인들이 더 많은 모피를 찾아 다이노의 카누를 얻어 타고 6,000km 이상 내려와 미시시피 하류 뉴올리언스에 닿았다. 1682년의 일이다. 그들이 이 강을 메지피Messipi라 부르기 시작했다. 원주민들이 미치집michi-zibbi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이 메지피라고 부르던 강을 영국인들이 미시시피강으로 불렀다. 쥐티마자Chitimacha 족장이 프랑스인들을 맞았다. 고고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이들도 다이노다. 이들의 조상은 베네수엘라를 지나 쿠바에서 카누를 타고 건너왔다.

쥐티마자 원주민

6,000년 전부터 미시시피강을 중심으로 뉴올리언스와 루이지애나, 플로리다에 살았다. 풍요한 땅이라 옥수수, 감자 같은 작물이 잘 자라 인구가 크게 늘었다. 미시시피강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오대호와 뉴욕 버지니아까지 북미 전역에 퍼졌다. 지금 인디언 보호구역에 갇혀 있는 이들은 이들의 후손이다. 이들도 흰옷을 지어 입었고, 머리엔 상투처럼 정수리에서 머리카락을 틀어 묶었다. 머리뼈를 편두한 소년들은 머리칼을 느슨하게 땋아 길게 내렸고 새 깃털을 머리에 꽂아 장식했다. 이들도 쿠바 섬의 다이노들처럼 온몸에 문신을 새겼고, 귀족과 평민으로 엄격하게 나뉜 계급사회였다. 서로 다른 계급 간에는 혼인도 금했다. 여자들은 머리칼을 정갈하게 빗어서 가운데로 가르마를 타고 머리칼을 뒤로 내려 묶어 쪽을 지었다. 혼인한 귀족 여인은 어여머리를 올리고 장식했다. 곰, 개, 늑대 같은 동물을 씨족의 상징으로 삼았고 모계 혈연 체계를 가진 씨족사회였다. 진흙을 개인 집에 초가지붕을 올렸다. 채로 두드리는 북장단에 흥을 실어 노래 불렀다. 불에 구운 자기를 사용했고 대나무와 조릿대를 가늘게 벗긴 대오리를 엮은 네모꼴의 대나무 석작이나 함, 동근 바구니를 만들어 마늘과 물고기 같은 수확물을 담았다. 단일 직조 바구니는 그릇으로 쓰고, 이중으로 직조한 바구니는 함으로 썼다. 루이지애나 대나무 죽공예품은 지금도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유럽인들이 몰려들기 전에는 텍사스와 루이지애나, 플로리다 일대에서 이들이 가장 세력 강한 부족이었다. 따뜻한 마음의 씨를 지닌 다이노들은 프랑스인 나그네들을 친절히 맞아주었다. 그렇지만 프랑스인들이 가슴에 담아 온 마음의 씨는 다이노의 씨와는 달랐다. 지티마자족 다이노들은 프랑스와 12년 동안 길고 처절한 전쟁을 치러야 했다. 굴종을 거부한 다이노들은 끝내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은 프랑스인들의 노예가 되었다. 콜럼버스가 그리 했듯이 프랑스인들도 다이노 노예들에게 유럽의 독한 술을 먹였다. 굶주린 뱃속에 독한 술을 삼킨 다이노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쿠바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이노가 죽어 노예가 부족해지자 흑인들을 노예로 대거 수입했다.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 프랑스인들이 침략하기 전에 쿠바를 건너온 많은 다이노 민족이 살고 있었다.

루이 14세 때 프랑스인들이 처음 이 땅에 찾아들었으므로 프랑스인들에게 그 땅은 루이의 땅이었다. 루이지애나는 루이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어렵사리 목조 성책을 세웠지만 허리케인은 수시로 그것들을 부수고 날려버렸다. 삼각주에는 습지가 많고 수목이 울창했고 모기가 많았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땅은 아니었다. 노예도 들여와 봤지만, 프랑스인들은 이 땅에서 돈을 벌 궁리를 찾지는 못했다. 늘 전쟁으로 분주했던 루이 14세는 이 땅을 방치했다. 7년 전쟁에서 패한 뒤 프랑스는 영국에게 전쟁배상금을 내야 했다. 미시시피 동쪽 땅을 모두 영국에게 빼앗겼다. 1763년에는 역시 패전의 대가로 남은 미시시피 서쪽 땅을 부르봉 왕조의 사촌인 스페인 황제 카를로스 3세에게 되돌려주었다. 프랑스 편을 들어 7년 전쟁에 참여했다 패한 스페인은 플로리다, 필리핀을 이미 영국에게 빼앗겼고, 아바나도 빼앗겼다 가까스로 되찾은 터에 루이지애나를 확보했다. 이번에는 스페인이 빠르게 움직였다. 스페인이 2,000명의 군인을 루이지애나에 파견했다. 스페인이 조사해 보니 뉴올리언스에는 468채의 집이 있고 3,190명이 살고 있었다. 그중에 백인이 1,803명, 흑인 노예가 1,127명, 유색인 자유인 99명, 그리고 다이노 원주민 노예가 61명이었다. 이들 중에서는 스페인군이 가장 세력이 강했다. 스페인에 뉴올리언스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외곽 거점이자 완충 지대 역할을 해주었다. 스페인은 멕시코 금광에서 큰 수익을 내고 있었다. 그러나 만일 영국이 미시시피를 건너 루이지애나를 통과하면 곧바로 멕시코까지 들이닥칠 것이었다. 스페인으로서는 영국이 미시시피를 건너지 못하게 막아야 했다. 뉴올리언스는 영국의 서진을 막아 멕시코의 금을 지킬 요충지였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한 뒤 이탈리아 일부를 스페인에 떼어주고는 루이지애나를 되가져가 버렸다. 나폴레옹은 유럽 여러 곳에서 한창 전쟁 중이었고, 노예혁명으로 아이티에서도 쫓겨났지만, 영국 해군에게 바다를 봉쇄 당해 아이티에 재진입해 반란을 진압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해군력이 취약한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에서 식민지를 건설하려는 야망도 포기했다. 그러던 참에 1803년 나폴레옹에게 미국 대사가 찾아왔다. 갓 독립한 미국 13개 주가 뉴올리언스와 통상하고자 하니 이를 허락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미시시피강을 이용해 남부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북동부 내륙 안으로 운송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일은 미국으로서는 식량 확보와 생존에 중요한 문제였다. 그런 미국 대사에게 나폴레옹은 루이지애나 전체를 1,500만 달러에 사 가라고 제안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북미를 세로로 세 부분으로 나누면 그 가운데 삼분의 일 땅이 그 당시 루이지애나였다. 남으로는 멕시코만에서 북으로는 캐나다 국경까지 실로 광대한 땅이다. 1803년에 미국은 기존 13개 주 영토보다 더 넓은 땅을 확보했다. 이 거래는 미국 역사에서 가장 잘한 거래라고 평가받는다. 이제 스페인은 서쪽 캘리포니아 일대만 남았다. 스페인이 루이지애나를 통치한 기간은 다해서 240년이었다.


프랑스는 1717년부터 4년간 죄수만 1,300여 명을 강제로 이곳에 데려다 놓았다. 여성이 부족했다. 프랑스가 왕의 딸들이라는 이름으로 여성들을 파견했다. 매춘부 160여 명과 90여 명의 십 대 탕녀들이었다. 프랑스는 이 마을을 새 오를레앙La Nouvelle Orléans이라 불렀다. 그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를 섭정한 오를레앙 공작에게 헌정하는 이름이었다. 오를레앙은 100년 전쟁에서 프랑스가 전세가 불리할 때 잔 다르크의 분투로 극적으로 승리로 뒤바꾼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상징적인 곳이다. 뉴올리언스는 타운이 만들어질 때부터 흑인들로 가득했다. 1719년에 첫 노예선이 들어왔다. 세네감비아에서 들어온 노예들이 쌀을 싣고 왔다. 이들도 쌀농사를 지었고 주식으로 삼았다. 한반도에서 맨 먼저 시작된 쌀농사가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를 지나 북아메리카에도 들어왔다. 뉴올리언스 삼각주 습지에서 시작된 쌀농사는 즉시 루이지애나 전역에서 주식으로 경작되었다. 오늘날 아칸소, 텍사스 등 미시시피강 주변은 세계적인 쌀 생산지다. 프랑스 노예무역 전담 회사는 세네갈과 감비아강이 있는 세네감비아 지역에서 노예를 조달해 왔다. 1719년부터 1731년 사이 루이지애나에는 세네갈에서 16척, 노예해안에서 6척, 앙골라에서 1척의 노예선이 들어왔다. 아프리카에서 보내는 화물 송장에는 280명의 노예를 실었다 기록되었으나 도착지 인수증에는 180명만 기록되었다. 화물 서류에는 사람이 아닌 동물 화물을 세는 단위 마리로 표기되었다. 선상 화재로 먹을 것이 없는 채로 항해하기도 했다. 그 항해에서 프랑스인 승무원들은 모두 살아남았다. 아프리카인들을 식량으로 잡아먹어 죽음을 면했다. 뉴올리언스에 2,000명이 도착한 지 한 달 만에 680명만 살아남았다는 기록도 있다. 땅에 내렸지만, 전염병으로 죽고 또 먹을 것이 없어 죽었다. 누벨 오를레앙은 기독교도의 땅이다. 도착하자마자 이들은 기독교의 은총을 입어야 했다. 은혜의 징표로 기독교도다운 성을 부여받았다. 백인들처럼 성씨를 노예들에게 붙였다. 세네갈 항에서 실어 왔으니 시네갈Sinegal이라는 성을 주었다. 루이지애나 지역에는 시네갈이라는 성이 유난히 많다.

초기 누벨 오를레앙의 모습. 프랑스는 세네갈 지역의 만딩가족 흑인들을 데려왔다. 뉴올리언스의 흑인 문화가 시작되었다.


프랑스 통치 때부터 들어와 살고 있던 흑인들은 세네감비아 지역에 퍼져있는 만딩가 족 출신이다. 그들이 뉴올리언스 프랑스 사람들 속에서 적응하여 그들만의 고유한 흑인 문화를 뿌리내렸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살았던 노예들은 가족을 꾸렸다. 백인 기독교인들처럼 일요일은 일하지 않고 쉬었다. 쉬는 날에는 시내 중심가를 거닐 수 있었다. 흑인들만 다니는 시장에서 가족들과 요리해 먹을 음식 재료와 물건도 샀다. 흑인 가게의 주인은 흑인이었다. 흑인들은 돈을 벌고 모았다. 그 돈으로 자유를 샀다. 생 도맹그처럼 코드 누아르가 적용되었다. 자유 흑인들에게 자유인으로서 살아가는 법을 미리 배웠다. 도심에서 다른 농장 흑인 노예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그들은 뉴올리언스의 댄스 클럽에 들어가 춤을 추기도 했다. 물론 백인들과는 들어가는 문이 달랐다. 이때까지 뉴올리언스에서는 곡을 연주할 수 있는 곳은 군악대뿐이었다. 그마저도 파이프 악기와 허리춤에 매단 드럼을 두드리는 5~6명 소규모 편성이었다. 전형적인 프랑스 고적대 스타일이었다. 스페인이 오기 전까지는 이것이 뉴올리언스 음악이었다. 우리가 뉴올리언스의 상징으로 떠올리는 시끌벅적한 군악대 거리 행진은 프랑스 치하에서는 없었다.

스페인이 뉴올리언스를 점유하고 있던 시기는 1769년부터 1803년까지 30년 남짓이다. 이 시기는 세계사에서 격동의 시대였다. 미국이 독립 혁명에 성공했고, 프랑스도 혁명했고, 아이티도 혁명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스페인이 이곳에 또렷한 지문을 남기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뉴올리언스에는 아바나의 모습이 분명히 각인되어 있다. 1788년에 대화재가 일어나 도시의 80%가 불탔다. 6년 뒤 또 다른 대화재가 있었다. 그때는 건물이 목조건물이었으므로 화재는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스페인이 도시를 처음부터 다시 건설했다. 지금의 뉴올리언스는 스페인이 기초를 다시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뉴올리언스의 중심 광장은 프렌치 쿼터French Quater다. 프렌치 쿼터는 쿠바의 시엔푸에고스와 산티아고 데 쿠바와 도시 분위기가 비슷하다. 뉴올리언스 술집에 스페인 군인과 쿠바인들이 가득하였다. 프랑스 출신 매춘부들은 타운을 유쾌하게 만들었다. 뉴올리언스는 아바나의 축소판이었다. 30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이지만 스페인은 이 도시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루이지애나는 아바나 쿠바 총독이 통치했다. 루이지애나를 점유한 38년 동안 쿠바는 설탕으로 큰 수익을 내고 있었고 쿠바 총독부는 노예를 대량 수입해 그 일부를 뉴올리언스로도 보냈다. 세네감비아와 노예해안에서 송출된 노예가 주류였다. 중앙아프리카 칼라바르족과 콩고에서도 대거 실려 왔다. 스페인 노예주들이 덩치가 크고 몸매가 훤칠하며 근육이 잘 발달한 콩고 출신들을 특히 좋아했다. 스페인 시절에 새로 들어온 노예들은 프랑스 시절부터 뉴올리언스에 살던 노예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다. 가족을 꾸릴 수 없었고, 타인과 교류할 수도 없었다. 외딴 플랜테이션의 열악한 노예 막사에 갇혀 일요일에도 노동했다. 이것이 스페인 스타일이었다. 가족을 꾸려 함께 사는 노예의 삶을 선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페인 법은 피부색에 따라 부대를 달리 편성했다. 프랑스의 코드 누아르와 피부 색조표가 유용했다. 가령 약간 붉은색에 속하는 피부를 가진 부대pardos도 있고, 검게 탄 피부로만 구성된 부대morenos가 따로 편성되었다. 그들 중 일부는 산으로 올라간 마룬들을 추적하기도 했고, 전투에 나가기도 했다. 또 다른 일부는 열심히 악기를 부는 군악대원이었다. 전투에서 필수적인 군악의 군악대 편성에 변화가 생겼다. 트럼펫 같은 취주악기가 진화해 관을 갈아 끼워 두세 가지의 음정을 낼 수 있게 되었다. 군악대 연주자들이 기상나팔 불 때와는 다른 연주 테크닉을 개발했다. 음악사학자들은 스페인이 통치한 이 시기의 쿠바에서 온 군악대 브라스밴드가 뉴올리언스 음악을 처음 형성했다고 본다. 이 무렵 뉴올리언스의 스페인 관리가 쿠바 총독에게 보낸 문서에는 총독이 쿠바로 병력을 빼간 뒤 군악대에는 악기를 다룰 연주자가 없으니 부디 몇 명만이라도 다시 보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러면서 클라리넷 주자들, 트럼펫 주자들, 그리고 마에스트로 한 명만큼은 꼭 보내달라고 했다. 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3세가 죽고 새로 즉위한 카를로스 4세에 대한 애도와 축하가 이어지는 축제가 길게 이어졌다. 스페인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길게 행렬을 이뤄 길거리를 행진하는 축제 전통이 있다. 대대적인 축제 행렬이 이어졌다. 뉴올리언스 사람들은 처음 보는 큰 축제였다. 군악대도 지금까지 뉴올리언스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대규모였다. 5~6명으로 이루어진 파이프와 드럼의 프랑스식 고적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이 군악대원은 스페인인과 쿠바인이었다. 백인도 있었고 피부색을 기준으로 편성된 파르도스pardos와 모레노스morenos 군악대원이 함께 연주했다. 한껏 치장하고 벗들과 떼를 지어 춤을 추며 길게 행진하는 행렬을 아바나에서는 콤파르사La Comparsa라고 한다. 아바나 거리는 매일 같이 콤파르사를 하며 춤을 추었다. 특히 일요일은 굉장한 규모로 콤파르사가 진행되었다. 뉴올리언스의 군악대는 아바나에서 왔으므로 이런 거리 행진 음악에는 최적화된 밴드였다.

아직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를 매각하기 전인 1792년 뉴올리언스에서 미국에서 극장과 댄스홀이 처음으로 문을 열었다. 시가 운영하는 댄스홀은 저녁 7시부터 동이 틀 때까지 운영했다. 뉴올리언스 카빌도가 운영 주체였고 이 수익으로 카빌도를 운영했다. 댄스홀은 백인만 들어갈 수 있었다. 토요일에만 자유 유색인도 출입할 수 있었다. 자유 유색인이 춤 출수 있는 홀 문에는 삼색 홀tricolor balls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 방에서는 백인, 흑인, 물라토가 모두 함께 춤을 추었다. 아바나는 유흥에서는 피부색을 따지지 않았다. 피부색의 경계를 넘어선 뉴올리언스 삼색 홀은 그런 아바나 스타일의 반영이었다. 생 도맹그에서 아이티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인 노예주들이 도망쳤다. 일부는 쿠바의 시엔푸에고스를 건설했고, 다른 일부는 뉴올리언스로 도망쳐왔다. 프랑스 사람들은 오페라를 좋아했다. 뉴올리언스에서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아직 아바나에서는 오페라가 공연되기 전이다. 1796년 뉴올리언스에서 처음 공연된 오페라는 그레트리Grétry의 작품이었다.

삼각주는 비옥하다. 캐나다 국경 인근에서 시작해서 미국을 관통해 흐른 미시시피강 하구 뉴올리언스는 삼각주가 매우 발달했다. 이 무렵의 뉴올리언스에서도 처음으로 설탕이 생산되었다. 뉴올리언스에서 설탕 농사를 시도한 지 50년 만이었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병합해 루이지애나를 매각할 때 미시시피강 주변에는 75개나 되는 설탕 플랜테이션이 성업 중이었다. 플랜테이션마다 부속된 동산인 흑인이 가득했다.



+ 미국 인디언 말 '미치-집michi-zibbi'는 '미치의 집'이라는 뜻이다. '미치'는 민물고기를 말한다. 미시시피강은 큰 강으로 민물고기들이 많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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