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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13. 2024

10. 카리다드

#233 팔렌케

팔렌케

  다이노들이 기독교인들을 피해 산으로 도망쳐 씨를 보존하려 숨어 지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들을 씨마론cimarron이라 불렀다. 야생으로 도망쳐 잃어버린 가축 동물이라는 뜻이다. 이런 산골 마을을 스페인 사람들은 팔렌케라고 했다. 다이노들은 씨를 지키는 도망자들을 씨마루아보símarahabo 또는 씨보Sibo라 했다. 스페인 사람들이 총과 개로 뒤쫓을 때 이들은 산마루에서 활을 쏘아 대항했다. 씨보들은 큰 활을 유난히 잘 다루었다. 씨보들이 사는 산속 마을을 씨보네siboney라고 했다. 씨보네 마을 입구에는 큰 활이 걸려있었다. 훗날 쿠바가 스페인에 대항하여 독립 전쟁할 때 활의 이미지를 상징으로 사용했다. 이 활 이미지는 500년간 굴종하지 않은 쿠바의 독립 투쟁 정신을 상징했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나중에 마룬maroon이라고 했고 자유를 찾아 도망친 자들이라는 뜻으로 썼다. 미국 중서부 인디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도 시마론simaron이라는 지명이 많다. 스페인 점령자들이 썼던 말을 북미 백인들도 저항하는 원주민들에게 똑같은 단어로 불렀다. 그들에게 굴종하지 않는 인디언은 모두 동물로 보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도망친 동물 노예 씨마론들이 모여 사는 깊은 산마루 공동체를 팔렌케라고 불렀다. 팔렌케는 스페인 사람들이 말, 소, 돼지를 가두는 목책, 목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팔렌케는 콜럼버스가 침공한 뒤 곧바로 쿠바섬 여기저기에서 생겨났다. 팔렌케는 살기 좋은 곳보다는 기독교도와 도고 프레사들이 추적하지 못할 깊은 산꼭대기 마루에 자리 잡았다. 특히 쿠바섬 오리엔테 지방의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자락은 씨마루아보들에게 안전한 은신처였다. 엘 코브레에서 광산 노역이 시작되자 다이노들이 씨마루아보가 되어 팔렌케로 숨어들었다. 엘 코브레의 흑인 노예들도 다이노들의 뒤를 따라 팔렌케로 몸을 숨겼다. 1800년대가 시작되면서 생 도맹그에서 많은 흑인 노예가 난을 피해 쿠바 오리엔테 지방으로 몸을 피했다. 이들도 엘 코브레 가까이 있는 팔렌케로 찾아들었다. 팔렌케는 제국주의와 노예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해방 공간이었다.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근거지였다. 

쿠바 팔렌케. 착취하는 스페인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이런 깊은 산속에서 씨마루아보들이 씨를 보존했다. 그들이 뒷날 쿠바 혁명의 주축이었다.

     

  산속 마을 팔렌케는 보통 스무 남짓 보이오가 모여있었다. 성을 해자로 두르듯 마을 주위로 함정을 파고 나뭇가지를 덮었다. 함정 속에는 뾰족한 나무창들을 세웠다. 아프리카의 덫이다. 덫의 위치를 모르고 마을에 함부로 다가섰다가는 함정에 빠져 살아 나오지 못할 터였다. 산마루에 너른 땅이 있을 리 없다. 팔렌케 사람들은 밭을 일구고 농작물을 길렀다. 좁은 땅이지만 필요한 땅을 공평하게 나눴다. 공동으로 경작하는 땅도 따로 두었다. 마을에서 공동으로 필요한 먹을 것을 키웠다. 이들도 요모조모 나누고 이랑으로 경계를 고눈 땅을 고누고라고 했다. 고누고는 다이노 말이다. 콜럼버스가 맨 처음 도착했을 때 다이노들이 농사짓는 땅을 고누고라 한다고 적었다. 토지는 모두의 소유라는 개념을 기본으로 하되 사적 소유를 인정하여 생산성 향상을 도모하면서도 공동체 소유의 땅에서 함께 일하여 그 산물로 마을의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필요한 경비로 사용했다. 토지 공개념과 사회주의적 개념 그리고 공공부조 같은 사회보장이 시스템으로 마련된 사회였다. 사회보장의 취지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다이노 팔렌케 사람들은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것을 제도로 만들어 곤궁한 이웃을 보호하고 있었다. 이것이 쿠바 사람들이 씨보네를 이상사회로 동경한 이유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팔렌케를 공격하지 못했다. 늘 실패했기 때문이다. 산마루의 팔렌케는 게릴라전에 능숙했고, 활의 명수가 많았다. 팔렌케 공동체를 위협하는 존재는 스페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풀어놓은 돼지였다. 돼지가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유가, 감자, 콩, 옥수수밭을 망쳐놓았다. 산속 아이들이 굶주렸다. 스스로 신의 개라는 칭했던 가톨릭 사제들이 미치지 않는 이곳에서는 돼지가 신의 개였다. 팔렌케 사람들은 벌집을 모아 양봉했다. 꿀을 모아 마을에 내려가 팔았다. 70년대에 발견된 바라코아에 가까운 한 팔렌케는 200여 채의 집이 있고, 300여 명이나 살았다. 이들 중에는 백인도 섞여 있었다. 이곳에서 동북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피부색이 뒤섞였다. 오늘날 쿠바에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인식이 전혀 없는 이유다. 키운 농작물을 카누를 타고 생 도맹그와 자메이카까지 운송하며 교역하기도 했다. 이런 팔렌케에 생 도맹그 난민들이 더 해졌다. 생 도맹그 흑인들은 부두교와 투바를 가지고 들어왔다. 해방공간에서는 매질하고 사람을 짐승 취급하는 기독교인들을 의식하지 않아서 좋았다. 소라껍데기 속에 몸을 숨기는 게처럼 자기들의 종교를 굳이 예수와 마리아를 껍질 삼아 위장하지 않아도 좋았다. 부두교의 의식에서도 이제 더는 기독교적인 요소를 반영할 필요도 없었다. 툼바 리듬이 더 솔직해졌다. 숨기 위해 생긴 팔렌케는 외부와 접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드러나지 않는다. 학자들은 스페인 기독교 제국주의자들이 쿠바를 떠난 지 100년이 훨씬 지났지만 지금도 발견되지 않은 팔렌케가 깊은 산 어딘가에는 남아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1977년에 큰 팔렌케가 발견되었다. 그 사람들은 생 도맹그 흑인의 후손들이었고, 그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툼바 드럼을 두드리고 있었다. 커피 농사를 짓는 그들은 툼바 사운드에 맞춰 생 도맹그에서 조상들이 건너올 때 불렀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툼바 사운드가 팔렌케로 숨어들어 올 때 춤도 함께 들어왔다.

씨마루아보들의 집 보이오. 진흙을 갠 흙벽에 초가 지붕을 올렸다. 

      

  개 짖는 소리가 사납게 들려왔다. 도미니 카니스들은 냄새로 깊은 산속 팔렌케를 찾아냈다. 스스로 목동이라고 자처한 스페인 카우보이들이 마소 대신 사람을 사냥하러 다가왔다. 도고 프레사들이 벌써 도망자들의 땀 냄새를 맡았다. 팽팽해진 개 줄은 프레사의 힘줄처럼 사납고 질기게 휘청댔다. 개 줄을 놓았다. 춤추던 도망자들이 놀라 겁먹은 채 사방으로 튀었다. 팔렌케에서 춤은 멎었다. 절정에 닿은 환희의 노래는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두려움으로 악을 쓰며 절규하는 아우성판으로 바뀌었다. 춤추던 보드라운 근육은 살기 위해 사력을 다해 응축했다. 생과 사가 교차하는 지옥의 경계. 벌써 몇은 땅바닥을 뒹굴었다. 먹히지 않으려 사람이 도고 프레사와 뒤엉켜 다투고 있었다. 아귀다툼이었다. 신의 개들의 송곳니는 강하고 길어 도망자들의 살을 깊게 파고들었다. 도고 프레사가 지구상에서 가장 사나운 것은 강인한 저작근 때문이다. 도고 프레사가 저작근을 다물어 물면 아무것도 풀려나지 못했다. 그 턱과 송곳니로 춤추던 자들의 살과 뼈를 물어뜯었다. 찢었다. 사냥을 즐기는 기독교도들에게 이 순간은 흔한 사냥터의 풍경일 뿐. 세비야의 투우사가 된 듯 사냥꾼들은 산 자의 어깨를 에스파다 로페라로 내리쳤다. 마토도르의 칼은 연약한 빗장뼈를 가르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사로잡힌 자들은 가까운 플랜테이션에 4달러에 판매되었다. 진흙 발라 지은 움막집이 여린 새벽빛 속에서 달집 타듯 불탔다. 짚 타는 빛이 사그라질 때 산마루에 동이 환했다. 산 그림자 속 플랜테이션에는 이제 막 햇빛이 들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노예감시탑에서는 노예들의 하루를 깨우는 새벽종이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날도 햇볕은 무척 따가울 터였다. 종은 <아베 마리아>에 맞춰 울렸다.      


  그때 생 도맹그에서는 콩트르당스contredanse가 가장 유행하던 춤이었다. 이 춤은 영국 농부들의 춤 컨트리 댄스country dance를 프랑스가 받아들인 춤이다. 농부들이 들판에서 남녀 짝을 맞추어 추어서 인기가 있었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영국 귀족들은 모슬렘 군인들이 안달루시아에서 추던 칼춤 모리스카를 본떠 남녀가 마주 보고 짝을 지어 춤을 추었다. 그것을 들판에서 남녀 농부들이 춤을 추었기 때문에 컨트리 댄스가 되었다. 루이 14세가 이 춤을 좋아했다. 남녀가 마주 보고 짝을 짓는 춤이 그가 통치하던 1700년경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콩트르당스라는 이름으로 크게 유행했다. 프랑스 귀족들이 궁정 옷을 입고 남녀가 짝을 지어 추는 춤이 콩트르당스다. 남녀가 드레스를 입고 발을 앞뒤로 너덧 번씩 차다가jig 팔짱을 끼고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빙그르르 돌기reel를 반복하는 단순한 춤이다. 영국 사람들이 들판country에서 추는 춤을 프랑스가 받아들이면서 이제는 남녀가 마주 보고contre 추는 춤이라는 뜻으로 춤 이름이 바뀌었다. 모리스카 칼춤은 군사 훈련이었다. 상대의 칼날을 막고 자기 칼로 상대의 몸을 겨누는 동작이 중요했다. 이것이 프랑스에 건너가서는 남녀가 팔짱을 끼고 애정을 나누는 춤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와 유럽이 모슬렘을 싫어할지라도 그들의 춤과 음악이 모슬렘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음악이 섞이듯 모슬렘의 춤이 기독교인의 춤이 되었다. 그 춤이 아이티 흑인 노예들을 거쳐 쿠바의 팔렌케에서 오랜 자유를 찾아 숨은 자들과 섞였다. 그곳에서 다이노 음악과 아프리카 음악이 섞였고 또 아이티 노예가 가져온 프랑스의 콩트르당스가 뒤섞였다. 사람은 적과 신분, 피부색을 구분했지만 춤과 음악은 적도 신분도 구분하지 않았다. 피부색도 구별하지 않았다. 음표와 음표였다. 생명과 생명이었다.      

쿠바와 멕시코 씨마루아보들은 은거지에 피라미드를 쌓고 하늘신에 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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