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리브레
쿠바 리브레
그러나 카리다드의 기적은 오래가지 못했다. 30여 년 만에 다시 투쟁을 시작해야 했다. 죽창은 스페인 광산 관리자들의 총구에 이르지 못했고 총알이 다이노들의 몸을 먼저 뚫었다. 엘 코브레 새마을 공동체는 무너졌다. 스페인 왕실은 푸에블로들의 땅을 몰수했다. 그리고 불온한 자들을 색출한다며 마을에서 끌어냈고, 결국은 죄다 노예로 팔았다. 2015년 가톨릭 교황 프란체스코는 엘 코브레의 미사에서 돈은 악마의 배설물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 시대 가톨릭은 악마의 배설물을 숭상했다. 비록 부스러기 같은 자유였지만 자유를 맛본 엘 코브레 사람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관서를 습격하여 부수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산으로 들어가는 길에 카리다드의 상을 가져갔다. 그들에게 카리다드는 스페인 푸에블로들의 수호신이 아니라 엘 코브레 사람들만의 신이었다. 가엾고 서러운 이들을 위해 함께 울어주는 자비의 수호성인이었다. 봉기는 성공했고 스페인 국왕은 다시 그들에게 푸에블로 자격을 허락했다. 하지만 왕은 멀리 있었고 쿠바의 식민 총독은 가까이 있었다. 왕의 선언은 단지 정치 선언이었을 뿐이었고, 관리들은 끊임없이 푸에블로 인민들의 권리를 해체하려 했다.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던 십수 년 만에 인구가 5배나 늘었다. 식민지 관리들의 눈에는 노예의 숫자가 그만큼 늘어났다. 궁정의 재정이 고갈된 스페인은 세금이 절실했고 카리브 일대에서 가장 돈이 잘 벌리는 구리광산을 유색인 푸에블로 때문에 포기하기는 너무 아까웠다. 스페인은 푸에블로들이 새로 개간해 놓은 땅을 탐했다. 1,300명이 넘는 카리다드의 자유인을 노예로 팔면 얼마간의 돈이 될 터였고 아바나든 자메이카든 사탕수수밭에서 일할 노예를 사겠다는 플랜테이션은 많았다. 산티아고 데 쿠바만의 입구에는 거대하고 멋진 바위 성이 있다. 그 성을 짓는 공사장에서 엘 코브레 사람들 수백 명이 다시 힘을 모았다.
다시 노예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푸에블로들이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쿠바에서 흑인들이 중심이 돼 일어난 첫 번째 대규모 민중 봉기였다. 엘 코브레 사람들도 싸움의 방식을 전환했다. 특사를 마드리드에 보내 왕실에 이런 형편을 알리고 항의했다. 특사는 엘 코브레에서 태어난 삼보zambo였다. 삼보가 특사로 갔다는 것은 그만큼 삼보 인구가 많아졌다는 뜻이다. 특사는 100년 전에 후안 모레노가 했던 것처럼 스페인 국왕과 가톨릭교회를 위해 복종하는 푸에블로가 될 것임을 호소했다. 그는 20년간이나 마드리드에 머물면서 엘 코브레 사람들을 대변했다. 엘 코브레 사람들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스페인 관리들이 새로 광산을 취득한 뒤로 돈을 갈취하고 입을 것도, 먹을 것도, 값을 매길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모조리 빼앗아 간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들까지도 묶어다 노예로 팔고 가축도 마구 끌어가 잡아먹는다고 했다.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엘 코브레 푸에블로들을 가축 취급했다. 매질도 다반사였다. 필설로는 말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그러니 어서 임무를 서둘러달라는 간절한 내용이었다. 편지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 자비의 여인 카리다드가 당신을 승리하게 할 것임을 잊지 말자”라고 끝맺었다. 천여 명으로 늘어난 산속 저항군은 300년 전 해태이와 다이노들이 굴종하지 않고 싸웠던 전투 방식을 되살렸다. 게릴라 식 전투였다. 마침내 스페인 왕실이 무릎을 꿇었다. 1,800년 스페인 왕실은 이들에게 항구적으로 자유의 신분을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1791년에 아이티에서는 흑인 노예들의 폭동이 일어났고, 프랑스인들을 모조리 잔인하게 보복 학살했고, 프랑스는 생 도맹그를 포기했고, 아이티는 독립 혁명에 성공했다. 스페인은 아이티에서 마체테의 복수를 지켜보았다. 푸에블로들은 왕에게서 조금씩이나마 땅을 받았다. 왕은 이 땅은 누구도 빼앗을 수도, 팔 수도, 쪼게 나눌 수도 없다고 했다. 개간되지 않은 땅도 모두 엘 코브레 사람들에게 나뉘었다. 특사는 이 선언문을 자비의 동정녀 예배당에서 푸에블로들에게 읽어주었다. 모든 엘 코브레 사람들이 이 예배당 앞에서 그 선언문을 들었고 환호했다. 카리다드가 승리했다. 콜럼버스가 침공한 이래 300년 동안 다이노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저항하고 투쟁해 온 결과다. 도고 프레사와 가톨릭 사제와 스페인 이달고들로 이루어진 신의 개들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어 씨를 보존하면서 굴종하지 않고 투쟁해 온 다이노 씨보들의 저항정신이 흑인들에게 이어져 자유와 해방을 이루어냈다. 카리다드가 그들을 이끌었다. 이들이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것은 스페인이 쿠바에서 노예제 종식을 선언한 1886년보다 86년이나 먼저 일어난 일이다. 엘 코브레 푸에블로의 민중 봉기가 쿠바의 노예 해방 투쟁을 이끌었다. 훗날 피델 카스트로가 시에라 마에스트라로 들어간 것도 씨보네 푸에블로들의 길을 걷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후안 모레노처럼 피델과 게바라도 산티아고 데 쿠바에 내려와 혁명의 성공을 선언했다. 인간의 지배 역사에서 돈보다 강한 동기는 없다. 반대로 인간의 투쟁 역사에서는 자유보다 강한 동기는 없다. 쿠바는 굴종하지 않고 투쟁했다. 그래서 쿠바는 자유다.
처음에는 자비의 카리다드는 산티아고 데 쿠바가 있는 오리엔테 지역에서만 알려졌었다. 그러다 400년간 스페인의 노예살이를 견뎌내면서 쿠바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성인이 되었다. 1868년 쿠바가 비로소 독립을 위한 혁명을 시작할 때 그들은 깃발을 들었다. 그들이 스페인의 총과 대포 속으로 뛰어들 때 높이 휘날린 독립투쟁의 깃발에는 자비의 동정녀 카리다드가 새겨있었다.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전쟁터에 나가듯이 쿠바 독립군은 카리다드가 새겨진 메달을 목에 걸었다. 큰 전투를 치를 때는 예배당에서 카리다드 상을 꺼내 앞세우고 출전했다. 쿠바공화국을 선포했을 때 카리다드는 쿠바공화국을 수호하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40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카리다드의 기적은 계속되었다. 애초 카리다드 상을 발견한 소년들은 2명의 다이노와 1명의 흑인이었다. 두 명 중 한 명의 다이노가 백인으로 바뀌었다. 다이노 원주민과 스페인, 아프리카 흑인으로 구성된 쿠바 문화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이라고 선전하려는 스페인의 의도였다. 쿠바 사람들이 스페인을 적으로 여기지 말아 주기를 바란 일이었다. 세 소년의 이름도 모두 후안으로 바뀌었다. 이름이 같아진 세 명의 후안은 모든 피부색의 쿠바인을 상징했다. 이들이 로드리고보다는 후안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은 훗날 흑인 소년 후안이 독립 선언문을 낭독하고 투쟁을 주도해 셋 가운데 가장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인들이 카리다드 전설에서 검은 피부색을 하얗게 탈색할 수는 있었어도 자유를 향한 항쟁의 역사는 변질시키지 못했다. 이제 곧 시작될 쿠바 독립 투쟁사의 첫새벽이 열리기 전 쿠바에는 굴종하지 않는 쿠바의 정신을 상징하는 두 영웅이 있었다. 콜럼버스 시대에 무장 투쟁을 주도한 해태이와 카리다드 시대의 후안이다. 이 둘이 쿠바 독립투쟁의 빛이자 등대였다. 오늘날 쿠바 사람들은 카리다드의 예배당을 성지로 순례한다. 기적을 기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노예의 역사를 기억하려 한다. 굴종하지 않고 산으로 들어가 씨보가 되어 투쟁하여 자유를 쟁취한 다이노 씨보네에서 시작된 500년 투쟁의 역사를 기억한다. 그렇게 지킨 자유를 지켜달라고 기원하기 위해 쿠바 독립투쟁의 발원지인 이곳에 순례한다. 그래서 이곳은 쿠바종교의 성지이자 또 쿠바 역사의 성지다.
+ 삼보zambo 또는 삼바zamba는 다이노 원주민과 아프리카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종을 가리키는 스페인 식민지 통치 용어다. 라틴어로 zambo는 삼각형을 가리키는데, 다이노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엎어 키워 다리가 삼각형임을 비웃어 부른 명칭이다. 브라질에서 축제 때 이들 삼바 여성들이 추는 춤을 삼바춤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