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철도
철도
설탕이 상황을 바꿨다. 쿠바에서 설탕 산업이 급성장하자 더 많은 재배면적이 요구되었다. 스페인은 마탄사스 만에 항구를 세웠다.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지가 된 쿠바에서 마탄사스는 또 하나의 중심 거점으로 부상했다. 1778년에 4개였던 제당 공장이 20년 뒤인 1800년에 50개가 넘었다. 설탕 생산량도 9,000t에서 11만 톤으로 10배 이상 증가했다. 20년 뒤인 1817년에는 95개소에 23만 톤이 되었다. 증기기관은 인간 노예나 나귀보다 훨씬 강했고 설탕 생산을 가파르게 늘게 했다. 1820년부터 세계사에서 철도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1837년에는 아바나에도 27km의 철도가 깔렸다. 30년 뒤인 1867년에는 철도 길이가 50배로 늘었다. 쿠바에서 철도에 실을 화물은 설탕뿐이었다. 철도는 플랜테이션 설탕 제당소에서 생산된 설탕을 아바나와 마탄사스, 카르데나스 항구에 정박한 배의 선적장까지 실어 날랐다.
사탕수수는 마체테 칼날이 닿는 순간부터 당분 즙이 증발한다. 뜨거운 태양 때문이다. 벤 사탕수수를 제당 공장까지 운반하는 동안에도 즙은 줄어든다. 채취한 즙은 높은 기온에 부패하기도 한다. 그만큼 설탕 생산량을 잃는다. 노예들이 바구니에 담아 머리에 이거나 나귀에 실어 운반하는 일과 비교해 철도는 설탕 손실을 크게 줄였다. 철도가 내륙 깊숙이 파고들었다. 사탕수수 밭도 빠르게 넓어졌다. 배에 실린 설탕은 뉴욕에 있는 제과 공장으로 옮겨졌다. 마탄사스 항구에서 내륙 곳곳으로 연결된 철도 노선이 허쉬 트레인이다. 초콜릿으로 유명한 미국 제과 회사 허쉬가 마탄사스와 아바나를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했다. 초콜릿은 설탕이 주원료다. 미국 자본은 부가가치가 큰 제과 공장을 미국에만 설치했다. 허쉬가 그 전형이다. 넓어지는 사탕수수밭만큼 늘어나는 노예에 대한 수요는 늘어났고, 아프리카에서 들어온 노예선은 아바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마탄사스 항으로 들어와 노예를 하역했다. 1859년 마탄사스 인구 열의 아홉이 흑인 노예였다. 타콘 총독이 통치한 1840년대부터는 쿠바의 설탕 생산량이 세계 최대가 되었다. 이전까지 세계 최대 설탕 생산지였던 영국 식민지 자메이카를 쿠바가 앞질렀다. 설탕은 돈이고, 돈이 모인 곳에 문화도 모였다. 마탄사스가 쿠바 경제와 문화의 새로운 심장이 되었다. 갓 개발한 마탄사스지만 이내 설탕 물동량이 넘쳐났다. 바로 이웃한 곳에 항구를 또 새로 건설해야 할 지경이었다.
웅덩이
노예 숫자도 해마다 기록을 바꿨다. 1790년에 비해서 1840년 설탕 판매 수입은 50배를 넘었다. 식민지 쿠바의 돈은 모두 식민모국 스페인으로 가져갔다. 쿠바에는 재투자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쿠바는 미국이 새로 발명해 내는 값비싼 신형 증기 기계들을 사들여야 했다. 쿠바 크리오요 엘리트들이 보기에 스페인은 그들을 올라타 빼앗고 있는 착취자일 뿐이었다. 쿠바는 설탕과 커피, 꿀을 미국과 영국에 팔았다. 하지만 모든 거래는 스페인 왕실을 통해야 했다. 스페인을 배제하고 쿠바가 직접 거래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1810년대에 라틴 아메리카 해방 운동의 아버지 시몬 볼리바르가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같은 나라를 스페인에서 해방했어도 스페인은 설탕을 품은 쿠바만큼은 놓아주지 않았다. 이들 나라가 먼저 독립한 뒤로 멕시코가 10년 동안의 투쟁 끝에 1821년에 독립에 성공했고, 아이티는 다음 해 에스파뇰라섬 나머지 동쪽 반을 모두 차지했다. 스페인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처음으로 세운 도시 산토도밍고마저 흑인들에게 빼앗겼다. 곧이어 스페인은 페루도 잃었다. 현지인 대비 턱없이 부족한 군대로 스페인이 그 광대한 식민지를 더 지킬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스페인의 새 천년왕국 예루살렘 신세계는 이제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만 남았다. 라틴 아메리카 전체 식민지에서 착취해 마련해 왔던 스페인 제국 운영비를 이제는 이 두 개의 작은 섬에서 뽑아내야 했다. 착취는 더 가혹해졌다. 아르헨티나도 칠레도 독립하고 스페인에서 건너온 이달고들을 쫓아냈다. 넓은 호수가 메마르면 얼마 남지 않은 물웅덩이로 물고기들이 모인다. 서로 부딪히고 상처 내며 파닥인다. 플랜테이션도 노예도 잃은 스페인 정복자들이 아직 스페인 식민지로 남아있는 쿠바라는 좁은 물웅덩이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마치 이제 갓 정복한 양 쿠바인들을 짓눌렀다. 새로 쿠바로 이주한 이달고들은 대개는 돈벌이가 쉬운 노예상이 되었다. 스페인은 표면적으로는 노예제를 폐기했지만 유일한 돈벌이인 노예 거래 세금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 스페인은 프라도 미술관을 지었다.
1810년에는 뉴욕 인구가 아바나 인구를 넘어섰다. 그때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도시는 아바나였다. 신흥 부자 미국은 쿠바의 설탕과 커피를 대량 수입해 갔다. 또 쿠바는 어디서든 밀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이 쿠바로 몰려들었다. 갈리시아, 칸타브리아, 카탈루냐 등 바스크 지역 사람들이 이주했다. 돈이 부족한 스페인 왕실은 이민세라도 걷으려 카스티야 사람이 아니어도 쿠바 이주를 허락했다. 바스크는 피레네를 건너 상업을 했던 사람들의 후손이고 산티아고 가는 길을 만들 만큼 억척스럽고, 카스티야 왕실에 복종하지 않는 강한 민족이었다. 바스크는 상업을 위해 쿠바에 이주했다. 스페인 왕실이 그들에게 내건 조건은 가톨릭을 믿는 것뿐이었다. 바스크는 이베리아에서 처음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민족이었으므로 문제가 없었다. 스페인은 가톨릭을 배신하지 않았다. 보답으로 가톨릭은 쿠바의 노예제를 묵인했다. 노예가 아니라면 스페인도 교황청도 돈을 벌 길이 없었다. 노예 문제에 대해 스페인과 로마가톨릭은 입술과 이의 사이였다. 상업에 강한 능력이 있는 바스크가 쿠바에 이주하면서 쿠바의 노예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이제 아바나는 더는 아메리카의 열쇠가 아니었다. 아메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아바나에 더는 보물선이 모이지 않았다. 해적들이 아바나를 공격할 이유도 없었다. 굳이 성벽을 두른 올드 아바나Havana Vieja라는 좁은 울타리 안에 숨을 이유도 없었다. 성벽을 부수고 도시는 바깥으로 뻗어나갔다. 도시 주변은 더럽고 판잣집은 누추했다. 한 방을 노리는 자들이 몰려든 곳에서는 도박이 꽃을 피웠다. 아바나 어느 골목이든지 도박장이 성업했다. 바로크 양식의 아바나 대성당 정문 바로 앞에는 아바나에서 가장 큰 도박장이 있었다. 하수도도 없고 쓰레기장도 따로 없었으니 콜레라가 창궐했다. 포장되지 않은 길은 진흙과 배설물이 뒤섞였다. 뉴욕, 파리, 아바나가 형편이 비슷했다. 술에 취한 자들이 흔했다. 도둑과 강도, 살인이 백주대로에서 다반사였다. 청부살인업자들은 누구라도 쉽게 죽여주었다. 경찰은 부패했으니 출동하지 않았다.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아바나 대성당의 신부에게 돈을 주거나 몸을 대주면 죄 사함을 받았다. 아바나에서는 무슨 일이든 그런 방식으로 다 해결되었고, 용서받지 못할 죄악은 없었다. 그곳은 절도와 암살자들에게는 틀림없는 새 천년왕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