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산티아고

2. 산티아고

#021. 나바라

by 조이진

5세기 초 로마의 국력은 쇠약해졌다. 이 무렵 동북아시아에서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고구려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하고 있었고 중화족을 상대로 한 동북아시아 전쟁에서 계속 승리하고 있었다. 이때 중앙아시아에서는 또 하나의 강력한 민족이 세력을 떨쳤다. 광개토대왕보다 20살 젊은 아틸라Attila가 고구려 서쪽의 훈민족을 이끌었다. 훈민족은 중앙아시아에서 헝가리가 있는 중부 유럽을 지나 프랑스 일부 서유럽까지 광대한 땅을 지배했고 동로마 제국은 해마다 많은 황금을 훈민족에 공물로 바쳤다. 훈 제국은 훈민족을 중심으로 불가르족, 고트족, 이란족, 사마르인 같은 토착 부족들을 연합해서 서로마제국을 쓰러뜨리자 동로마 제국도 서서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런 훈민족이 도나우강과 라인강을 건너 프랑스를 지배한 다음 피레네마저 넘었다. 이때 비지 고트족이 이베리아로 떠밀려 들어갔다. 로마가 비지 고트족을 용병 삼아 훈족의 이베리아 남하를 막아냈던 일이 이때다. 카탈루냐 평원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서 비지 고트가 훈족을 막아내지 못했다면 이베리아의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아바르, 불가리 같은 훈 일부는 이탈리아로 들어가 게르만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했다.


독일 문학사는 구전 영웅 서사시에서 시작한다. 독일 문학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영웅 캐릭터가 훈민족 아틸라다. 독일 공영 TV ZDF는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 게르만 이동을 촉발한 뒤 게르만에 흡수된 아시아 유목민 훈족이 누구였는가에 초점을 맞춘 프로그램을 방송했다. 그들은 훈민족이 현대 한국인의 조상일 것으로 결론 내렸다. 훈족의 유물, 유적을 신라인과 가야인의 그것과 비교하니 공통점이 많다는 점을 근거로 들며 편두, 금관, 머리 장식 같은 사례를 제시했다. 훈민족도 신라인처럼 편두를 했다. 유아기에 의도적으로 머리뼈를 위로 길게 변형해 앞에서 볼 때 원뿔 모양으로 이마가 높고 편평한 머리 편두는 한민족 계열만의 오랜 풍습이었다. 중화족은 편두를 한 흔적이 전혀 없다. 아틸라는 한 장수의 이름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뜻의 게르만족 말 '아따atta'에 축소사 '–ila'가 붙은 말이다. 그러므로 아틸라는 훈민족의 '작은아버지'라는 뜻으로 지도자를 부르는 칭호였다. 아틸라는 스스로 선우 또는 단우라고 했다. 선우 또는 단우는 훈 말로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기독교 세계에서 아틸라는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로마를 파멸시킨 악마의 채찍이자 신의 재앙이었다. 훈이 유럽을 지배한 대제국을 이루었을 때 훈족에게 쫓겨나 도망한 북동부 이탈리아 사람들이 작은 섬 위에 나무말뚝을 촘촘히 박고 바닥을 만들어 그 위에 돌과 돌을 쌓았다. 그 섬으로 도망자들이 자꾸 모여들었다. 인공섬이 넓어졌다. 새로 도망해 온 자들이 ‘베니 에티암Veni etiam’이라고 외쳤다. 베네치아는 ‘나도 왔다’라는 말이다.

아틸라 훈족에게 짓밟히는 유럽. 유진 들라크루와 <아틸라 훈>(1847)

나바라

바스크라는 말은 서기 전부터 쓰인 말이다. ‘농사짓는 바스크 사람들 Vasconum agrum’에 대한 기록도 로마 역사에 남아있다. 아바르 칸국은 5세기에 동유럽을 지배한 훈민족 또는 밝족이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일대에 거쳐 9세기까지 300여 년간 지배한 나라다. ‘바르’는 ‘밝’과 같은 말이다. 아바르 칸국이 멸망하자 그 유민들이 피레네 산줄기를 타고 이베리아로 들어갔다. 동북아시아에서 세계대전이 일어났던 7~8세기의 일이다. 밝족은 오래전 신석기시대부터 여러 차례 이동해 피레네로 들어왔고 이때 이동한 밝족이 바스크의 조상이었다. 비지 고트의 틈새를 파고들어 피레네산맥 북녘과 남녘 자락에 자리 잡은 이들은 로마가 남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6세기 중반에는 이미 중앙아시아 깊숙한 지역까지 동방 기독교가 유목민들에게 전해졌다. 심지어 천산산맥과 타클라마칸 사막 서쪽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오아시스 도시 카슈카르에도 영국 켄터베리보다 훨씬 먼저 대주교가 있었다. 훈 유목민 전사들은 유럽을 통과하면서 기독교를 접촉했었는데 이베리아에 와보니 고트족도 기독교를 믿고 있었다. 비록 동방 기독교와 서방 기독교라는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고트의 서방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 바스크를 코르도바의 우마이야 왕조는 얼루즈ulûj라 불렀다. 얼루즈는 얼간이라는 뜻의 아랍말이다. 바스크가 이슬람 신이 아닌 기독교를 믿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바스크가 버티는 피레네를 우마이야 군단이 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밝족은 고트족, 켈트족과 혼혈하 지금은 밝족 고유의 외모는 사라졌고 검은 머리칼만 남았다. 나바라 왕 안초 3세의 초상화를 보자. 치켜 올라간 눈꼬리 하며 영락없는 동북 아시아인의 얼굴이 보인다.

나바라왕 안초 3세 가르체스Antso III.a Garzeitz

피레네산맥 서쪽에 나바라 자치주Navarre Junta가 있다. 바스크들은 나바로아코Nafarroako Erresuma라고 한다. 나바라 왕국이 생겼을 때 유럽에 중세가 시작했다. 8세기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남하를 시도했다. 이를 바스크가 패퇴시켰다. 마뉴는 로마어 마그누스magnus에 해당한다. 프랑스가 마뉴라 추존한 샤를은 프랑스 건국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뛰어난 지도자였다. 서유럽을 통일해 가던 마뉴도 바스크에게만큼은 철퇴를 맞았다. 이때 전투 이야기가 프랑스에서 가장 오랜 문학인 <롤랑의 노래>다. 하늘이 지어 놓은 요새 페레네에서 바스크는 또 이슬람 세력 우마야드의 북진을 막아냈다. 반도의 운명을 피레네와 바스크가 견뎌내고 있었다.


나바라Navarre는 아바르Avarre에 라틴식 접두어 N이 덧붙여진 단어다. 라틴어 접두어 n은 '낳다, 태어나다'의 'natus'라는 뜻이니 나바라는 ‘바르가 다시 세운 나라’라는 뜻이다. 서기 후 5세기경 아틸라가 이끌던 훈민족의 제국이 허망하게 분해되어 중앙아시아 일대가 힘의 공백 지대로 남았을 때 고구려 서쪽에서 만리장성 북방의 초원 스텝지대를 지배한 나라 유Eus가 중앙아시아에 진출해 아발 제국을 건설했다. 로마의 역사가들은 그들을 아바르Avar 사람이라 적었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이 이베리아 땅에 와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을 이바르Ibar라고 하고, 이바르가 사는 땅이니 이베리아라고 이름 붙였던 바로 그 민족이다. 이바르, 아바르, 나바라, 바스크는 다 같은 뿌리 말 ‘밝’에서 나왔다. 아바르라는 유스 밝족이 서쪽으로 이동했다. 수천 년 전부터 밝족이 살아가는 땅 피레네로 향했다. 그들이 피레네에서 새로운 아발을 다시 세웠는데 그때 이바르가 '다시 세운 아바르' 나라가 나바라다. 824년의 일이다. 유럽 대부분을 통일해 초대 신성로마황제가 된 프랑크의 샤를마뉴도 남으로는 이베리아에서 바스크에게 패배했고, 또 동에서는 아바르에게 패배해 막혔다. 위대한 프랑크 왕 샤를마뉴도 오직 아바르 밝족만큼은 싸워 이기지 못했다.

나바르 깃발 문양/위키피디아


피레네 나바라 사람들은 스스로 바스크라기보다는 유Eus라고 부르고 자신들의 언어를 유가라Euskara라고 한다. 바스크들은 ‘주인’을 ‘나리nari’라고 하고, ‘앉다’를 ‘자리jarri’라고 하며, ‘엄마’를 ‘암마ama’라 하고, 불을 피워 음식을 만드는 곳을 ‘숯데기sutegi’라 말한다. 우리는 좁은 땅을 땅뙈기, 밭뙈기라 한다. 유가라는 '유+가라'에서 '가라'는 '공자 가라사데' 할 때 '가라'로 '말쓰하다'는 뜻이다. 그들은 ‘온다, 이르다’는 말을 ‘이리치iritsi’라 하고, ‘간다’라는 말을 ‘가라’라 말한다. “내 이름은 순이다”는 바스크어로 “Nire izena Sunhee da. 니레 이즌으 순희다”라고 말한다. 나바라 왕국의 국장에는 윷판이 문양으로 새겨있다. 윷판 문양은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부여국의 왕을 상징하는 깃발 문양이기도 했다. 윷판은 가운데 북극성을 중심으로 28개의 별자리를 모양을 그린 그림이었다. 고조선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조선까지 왕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는 자이기도 했다. 나바로아코는 나바라 왕국이라는 뜻이다. 바스크는 나라를 세우고는 끝에 ‘-코ako’를 붙였다. 바스크는 팜플로나 성에서 시작해 창대한 역사를 이루었다. 팜플로나는 카스티야 사람들이 부르는 지명일 뿐 유스 민족이라 자부하는 바스크 사람들은 이곳을 팜플로나가 아니라 이루냐Iruña라 부른다. 이루냐 성을 근거로 한 바스크족이 승리를 거듭하여 나바로아코 이러스마Nafarroako Erresuma 왕국으로 발전했다는 것인데, 이루냐와 나바라를 연결하면 “다시 이루어 세운 밝족의 나라”라고 선포하는 듯한 이름이다. 밝족의 피는 희석되어 사라졌지만, 땅의 역사에는 바스크 민족의 지문이 남아있다. 피델 카스트로의 아버지는 바스크 지역 갈리시아 사람으로 쿠바로 이주했다. 피델은 회고록에서 그의 아버지는 쿠바에 오기 전 찢어지게 가난한 바스크 사람이었는데 아버지가 말해 준 갈리시아는 가옥 아래 우리를 두어 돼지를 키우는 풍습이 있었다고 했다. 이렇게 돼지를 기르는 풍습은 오직 동북아시아 사람들만의 방법이기도 했다. 중국에도 유럽에도 이런 풍습은 없었다. 오직 동북아시아 한민족만의 풍습이었다.

Nafarroako Erresuma 자치공동체 공식 깃발. 1910년 제정.

11세기 무렵에 나바라가 피레네를 나섰다. 바스크가 그 용맹함으로 모슬렘을 제압해 나가며 남진했다. 나바로아코는 이베리아에서 가장 강성한 고을이 되었다. 나바라 왕 안초Antso 3세가 이베리아 중부인 카스티야, 아라곤, 바르셀로나 지역을 통합했다. 모슬렘이 차지하고 있는 이베리아 남부 안달루시아를 제외하고는 기독교 왕국 나바라가 스페인 대부분을 통일했다. 기독교가 모슬렘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안초 3세가 1034년에 스페인 황제에 등극했다. 그가 스페인 역사에서 첫 황제다. 그가 죽고 나바라 왕국의 영토는 4명의 왕자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카스티야와 레온 왕국도 이때 만들어졌고, 이런 이유로 카스티야와 레온은 형제 국으로 늘 연합하였다. 바스크 나바라 사람들이 현대 스페인 왕국의 기초를 이루어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런 안초 3세를 '엘 마요르El Mayor',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 왕의 왕이라고 부른다. 그의 후손 혈통 히메네스 가문이 이베리아를 10세기부터 13세기까지 통치했다. 이 가문을 바스크 들은 재미로 왕가Semero Leinua라고 부른다. 재미로. 이 단어를 꼭 기억해 두자.


+ 유럽에 진출한 밝족의 역사에 대해서 서울대 신용하 교수가 <고조선문명의 사회사>에서 자세히 밝혔다.

+ 험준한 피레네 산악 지형에 똬리 튼 밝족을 누구도 함부로 지배하지 못했다. 비지 고트도, 프랑크도, 이슬람도, 잔인하고 야만적이라는 북아프리카의 무어인도, 누구도 지배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들이 바스크였다. 용맹하고 강인하고 굴종하지 않는 독립성을 가진 바스크들은 오늘날도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을 주장한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도 바스크의 아들들이다.

+ 샤를 마뉴가 로마 제국 이후 처음으로 서유럽 대부분을 정복해 정치적, 종교적으로 통일해 오늘날 유럽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그래서 유럽은 그를 '유럽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역시 6세기 경에 주요 기독교 중심지였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기독교를 소개하기 1,000년 전 일이다. 폴란드나 스칸디나비아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간 것도 수 백년 지나서의 일이다. 중세에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는 유럽보다 많은 기독교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동방 기독교를 믿었다. 당시 페르시아는 사산제국이 지배하고 있었고, 제국의 왕은 영토 안의 기독교 주교들에게 "...패르시아인들의 제국 안에 있는 모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단과 교회가 그의 관리와 지휘 아래 들어갈 것이다"라고 편지를 보냈다.(<실크로드 세계사> 이재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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