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별 하나
별
갈리시아는 켈트족 말로 숲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바스크가 먼저 살던 땅에 켈트가 들어왔고 켈트와 바스크 이베리아 인들이 섞였다. 동남으로 뻗은 해발 2,000m가 넘는 긴 산맥은 자연이 만든 방패가 되었고, 기후가 남쪽과 달라 이 땅은 지키기에 좋았다. 또 스페인 남부에서 이곳을 지나려면 이베리아 중앙에 있는 차갑고 쌀쌀한 고원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이런 천혜의 요새 속에 웅크린 자들을 범하기란 어렵다. 711년부터 우마이야 왕조가 이베리아를 지배하였을 때, 바스크에 막혀 피레네를 넘지 못했던 것처럼 갈리시아 켈트족도 역시 차지하지 못했다. 그 속에는 절대 굴종하지 않는 바스크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리시아는 옆 나라 아스투리아스, 나바라 왕국과 연합하여 이슬람을 막아냈다. 왕국 이름은 달라도 모두 바스크라는 같은 뿌리를 둔 고을들이다. 그 이름처럼 산과 숲이 기독교를 지켜주었다. 그래서 이 지역은 오늘날에도 모슬렘 문화의 흔적이 없다. 다른 스페인 지역과는 지나온 역사가 아예 다른 것이다. 갈리시아의 대서양 쪽 해안은 구불구불하고 옹기종기하여 자연이 아름답다. 훈민족에게 쫓겨 게르만족이 이동했을 때 고트족보다 먼저 이베리아에 들어와 있던 수에비족이 포르투갈 지역으로 들어갔는데, 그 일부가 켈트족의 땅 갈리시아에 남았다. 그래서 갈리시아는 포르투갈어와 비슷한 로망스어 흔적도 남아있다. 모슬렘이 이베리아 중남부 대부분을 차지하자 기독교인들이 이곳 이베리아 북부의 바스크 지역으로 밀려왔다. 쫓겨 온 자들의 기독교 이데올로기는 강경해졌다. 복수심 차오른 이들이 유럽에서 1,000년의 종교 전쟁을 치를 태세를 가장 먼저 갖추었다. 칼과 창을 벼리고 철갑옷을 만들었다. 722년에 피레네에서 가장 높은 피코스 데 에우로파 산 코바동가에서 모슬렘을 상대로 매복 전을 펼쳐 첫 대승을 거두었다. 천년의 치열한 종교 전쟁의 개전을 알리는 전투였다. 전쟁이 길게 지속되었다. 전쟁을 지탱할 상징이 필요했다. 전쟁은 죽음을 향해 몸을 내모는 일이다. 적의 칼과 창 앞으로 군인들을 내몰려면 수호성인이 그들을 지켜준다고 말해줘야 했다.
마침 그런 때 갈리시아 들판에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 813년의 일이다. 펠라요는 이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성주로 모슬렘 군대의 공격을 받아 전쟁 중이었다. 이해하기 어렵게도 그때 모슬렘 군대를 세비야 대주교가 지휘하고 있었다. 기독교인 펠라요가 그 별빛에 이끌렸다. 들판을 가로질러 별빛이 떨어진 곳에 가다 보니 무덤 하나가 있었다. 무덤을 본 그는 지역 가톨릭 주교에게 이를 알렸다. 주교가 무덤을 확인했다. 가로세로 4미터가량의 정사각형 구조로 돌을 쌓아 만든 제단이 있었고, 제단 밑에는 무덤이 있었다. 일종의 작은 피라미드 무덤이었다.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단으로 박해받아 죽은 자의 주검이라고도 했고, 돈 많은 유대인의 무덤이라고도 했다. 이 무덤이 로마제국의 끄트머리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는 일치했다. 그러자 가톨릭 주교인 테오도미로가 냉큼 선포해 버렸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 성 야고보의 무덤이라.” 성 야고보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으로 이베리아 지역에 복음을 전했다는 순례자다. 야고보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 활동하다 서기 후 44년에 예루살렘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예루살렘에서 묻혔다는 기록이 엄연하다. 십이 사도 야고보의 유해가 예루살렘에서 갈리시아까지 그 먼 거리를 지나 이장되었다면 매우 중요한 행사이므로 기록에 남았을 것이지만 야고보의 유해를 예루살렘에서 이베리아까지 가져와 이장했다는 기록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 그래서 이베리아를 대표하는 민족이 켈티베리아인이다.
+ 피코스 데 에우로파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대서양에서 돌아온 뱃사람들이 이 산꼭대기를 보고 유럽에 왔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그런 이름을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