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탱고

11. 탱고

#245 찬찬

by 조이진

찬찬

타콘 대극장 건축비를 댄 사람은 카탈루냐 출신 판초 마르티Pancho Marty다. 카탈루냐는 바스크의 피가 흐르는 바르셀로나가 있는 곳이다. 일자무식인 판초는 자신의 서명만 겨우 할 줄 알았다. 그런 판초가 타콘 대극장의 건설비를 댔고 실제 운영자였다. 그는 본디 멕시코만 일대에서 활약하던 해적이었다. 동업자를 밀고해 생선 거래 독점권을 인정받아 큰돈을 벌었다. 그렇게 돈을 모은 판초가 타콘 총독에게 접근하여 대극장을 세우고 타콘의 이름을 붙였다. 군부 독재자 타콘의 비호로 그가 쿠바의 노예 시장을 장악했다. 그가 쿠바의 노예상 중에서도 우두머리 노예상으로 성장했다. 타콘 대극장 건축은 큰돈이 투입되는 대형프로젝트였다. 타콘으로서는 노예 사업이 세금의 원천이었다. 타콘의 대리인이 된 판초 마르티가 노예 거래를 총괄했다. 판초는 영국이 해방해 자유 신분이 되었던 흑인들도 다시 붙잡아 판매했다. 타콘의 긴급조치는 법보다 위에 있었다. 판초는 카우디요인 타콘의 속내를 잘 읽어냈다. 판초는 쿠바에 들여오는 모든 흑인 노예에게 1두head 당 금 반 온스의 값으로 세금을 매겼다. 그 돈 대부분이 타콘에 흘러 들어갔다. 재임 기간 34개월 동안 타콘이 축재한 개인 재산이 1천만 달러 정도라고 역사학자들은 계산했다. 판초는 대극장 공사를 위해 노예와 사회정화시설에 수용된 자들을 무제한으로 동원했다. 대극장이 생겨나니 아바나에서도 오페라가 크게 유행했다. 이 무렵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공연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오페라였다. 이를 위해 타콘은 아바나 오페라 컴퍼니를 설립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들을 초빙해 공연단을 꾸렸다. 설탕과 노예 거래로 만들어진 금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일을 일자무식 판초가 담당했다. 판초가 아바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세계적인 오페라 프로듀서로 변신했다. 타콘 대극장이 문을 연 지 30년 만에 오페라 108 작품, 드라마 1008 작품이 공연되었다. 그 작품 속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음악과 노래와 춤이 상연되었다.

해적이자 노예상이었던 판초 마르티가 타콘을 등에 업고 쿠바 음악을 가지고 세계적인 엔터테인먼트 사업가로 변신했다. 그는 18kg짜리 도미의 뱃속을 순금으로 가득 채워 접대했다.

마침 그 무렵의 미국에서 발명된 분당 1,500매 인쇄가 가능한 자동화된 인쇄기는 쿠바에도 도입되어 유럽에서 인쇄 기술의 발달로 르네상스가 일어났듯이 쿠바에서도 인쇄기는 지식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판초가 오페라를 제작할 때 아바나에는 10개의 인쇄소가 있었다. 이제 관객들은 공연장에서 대본과 악보를 사 볼 수 있었다. 음악 관련한 전문지들도 정기 간행되었다. 아바나에서도 악보를 읽을 수 있는 뮤지션이 처음 나타났다. 아바나 음악계에 지식 혁명이 일어나는 기간이었다. 아바나 비즈니스계는 타콘 대극장을 중심으로 사교술과 함께 발달했다. 인쇄 출판 기술도 아바나의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발전시켰다. 타콘 재임기에 아바나에는 42종의 음악 잡지가 발행되었고, 2개의 음악 전문 교습소가 있었다. 음악교습소 가운데 하나가 프랑스 출신으로 쿠바에 망명한 피아니스트 후안 페데리코 에델만Juan Federico Edelmann이 개설한 것이었다. 그의 아버지 장 프레데릭 에델만Jean-Frédéric Edelmann은 유럽의 마지막 하프시코드 연주자이자 모차르트와 함께 피아노 시대를 개척한 고전주의 작곡가로 당대에 매우 유명한 프랑스 음악가였다. 아버지 에델만의 피아노 4중주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곡이다. 아버지 에델만은 프랑스혁명의 과정에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를 반대하다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아버지 장이 처형당하자 그의 가족들은 세계를 떠돌았다. 그러다 타콘 시절 아바나의 음악적 환경과 대중들의 음악에 대한 열정에 감탄한 후안이 아바나에 망명하고 정착하여 피아노와 음악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했다. 그가 아바나에서 장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작곡가들을 제자로 길러냈다. 에르네스토 레쿠오나 같은 세계적인 쿠바 피아니스트가 그의 제자다. 후안의 음악교습소는 쿠바 작곡가들의 작품 악보를 인쇄하고 음악 활동을 지원했다. 그가 쿠바 클래식의 씨앗이 되고 뿌리가 되었다.

인쇄기 발명이 쿠바 음악을 혁신했다. 악보가 널리 보급됨으로써 가난한 흑인연주자들도 악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출판물이 많아지자 글을 쓰는 지식인들이 출현했다. 처음에는 음악처럼 글 쓰는 스타일과 장르도 스페인을 따랐다. 그 당시 스페인 문학은 산문문학이 유행이었는데 멋진 자연의 풍경이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속을 깊고 섬세한 문체로 그림을 그리듯 꼼꼼히 길게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이 문체가 그 시절 스페인과 쿠바, 멕시코를 필름으로 찍은 듯 기록했다. 문장은 시대를 보존한 아카이브다. 아카이브 속 문장으로 우리는 그 시절 인간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다. 타콘이 통치하던 때 쿠바 작가가 쓴 첫 쿠바 소설이 발표되었다. 문자화된 쿠바 문학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쿠바 소설들이 드러내놓고 스페인에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문학적으로는 분명히 스페인과는 다른 길을 잡았다. 쿠바 문학인들은 노예 문제에 깊이 파고들었다. 노예 문제는 사회 현실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소설은 늘 검열당했다. 종교재판이 폐지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황금이라는 또 다른 종교의 독재로 검열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모든 소설을 다 검열하지는 않았다. 타콘은 문학이 사랑과 섹스를 노래하고, 자연을 음미하고, 바람둥이 이야기 같은 것을 다루는 소설은 검열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19세기 쿠바 시문학의 주제는 대개 연애 이야기나 섹스의 쾌락 같은 것이었다. 모슬렘이 이베리아를 지배하던 시절에도 그랬고, 그전에도 그랬듯 시와 문학은 늘 노래로 불렸다. 19세기의 쿠바 시문학이 연애와 사랑 이야기였으니 20세기에도 쿠바 음악의 노랫말은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의 대표곡 <찬찬Chan Chan> 역시 그런 가사다. 젊은 남자 찬찬이 여행 중의 계곡에서 사금을 캐느라 몸을 숙인 채 채를 치느라 엉덩이를 이리저리 흔드는 여자 후아니카의 뒷모습을 보고 홀려 섹스하고 싶은 충동의 순간의 느낌을 노래한 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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