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가죽의 해
가죽의 해
타콘이 재임하는 동안 노예 수입은 무제한에 가까웠다. 노예와 철도가 설탕 생산량을 극적으로 늘렸다. 이 두 엔진이 숨 가쁜 증기를 뿜을 때마다 쿠바는 돈이 넘쳤다. 아마존 같은 밀림이었던 마탄사스가 50년 만에 돈과 문화의 중심지로 변했다. 시인과 작가가 많이 배출되었다. 마탄사스에서 쿠바 첫 문학잡지가 발간되었고 쿠바 첫 시인도 등단했다. 그의 이름은 가브리엘 데 라 콘셉시온 발데스, 필명 플라시도Plácido로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잡지사에 매월 고정 고료를 받고 시를 보냈다. 잡지사는 그의 시를 모아 시집으로 냈고, 광고와 홍보를 하니 시인으로서 그의 이름이 알려졌다. 그는 물라토였다.
그가 쿠바 최초의 유색인 시인이자 가장 주목받는 지식인이었다. 그의 시는 데시마 형태가 많았다. 데시마는 17세기 스페인 황금 세기 문학의 대표 문인 로페 데 베가와 칼데론이 사용한 10 행시의 시문학 장르다. 데시마의 원류는 바스크 문학 재잘이다. 재잘과 데시마는 상대방과 문장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운과 율의 프레임에 맞춰 창의성과 즉흥성을 경쟁했다. 재잘과 데시마는 철학, 종교, 시, 정치 등 노래와 심에 담는 주제가 폭이 넓었다. 풍자도 있었다. 크리에이티브를 경쟁하는 바스크의 문학 장르 재잘의 전통이 로페 데 베가와 칼데론을 거쳐 타콘 시대 쿠바의 물라토 시인 플라시도로 이어졌다. 문학은 그렇게 사람과 사람, 땅과 땅, 시대와 시대를 잇고 연결했다. 플라시도는 여러 주제의 시를 썼지만, 특히 그의 데시마는 다이노 시대부터 시작된 쿠바의 오랜 역사를 주제로 담았다. 그때까지 문자로 정리된 쿠바의 역사는 없었다. 그러므로 대개는 조상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역사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플라시도의 데시마를 읽은 쿠바 식자층들은 살아있는 참다운 시의 흥분을 느끼고 울분을 공감할 수 있었다. 이런 문학의 전통으로 뒷날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라틴 아메리카 민족의식도 태어났다. 그는 모든 라틴 아메리카인들은 다이노의 후손이라고 자부했다. 그렇기에 모든 라틴 아메리카는 하나의 민족이며 한 형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식자층이라 할지라도 피부색에 따라 입장이 서로 달랐다. 타콘이 지배하던 1840년 무렵에도 쿠바에서 전문 음악가들 대다수는 흑인들이었다. 흑인 뮤지션들이 유럽 백인들의 곡을 연주했다. 곡은 분명 백인들의 곡이지만 흑인들의 소울이 적셔 있었다. 리듬과 느낌이 백인이 연주한 것과는 꽤 달랐다. “오늘날의 쿠바 예술이 유색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이런 거악이 우리 백인들을 예술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라고 말한 이도 있었다. 타콘이 추방한 쿠바 초기의 대표적인 민족주의자이자 개혁파인 사코Saco가 한 주장이다. 이처럼 백인들은 물라토나 메스티소 유색인이 지식과 문화계를 주도하는 상황을 꺼렸다.
1844년에 있었던 일은 그런 쿠바 음악 생태계를 초토화했고, 쿠바 음악도 부서졌다. 영국이 스페인도 노예무역을 금할 것을 강요했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 영국은 북미 식민지에 노예를 팔아 큰돈을 벌었다. 미국은 독립을 이룬 뒤로 독자적으로 노예무역을 했다. 영국은 노예 시장을 잃었다. 미국을 잃자 영국은 어느 나라도 노예무역을 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그제야 노예무역은 철폐되어야 마땅한 미개한 짓이라고 떠들었다. 그들은 영국이 역사상 최대의 노예무역국이었다는 점에는 외면했으며, 카리브해의 영국 식민지 섬에서는 여전히 노예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여전히 노예로 버는 돈으로 사상을 하면서도 노예무역은 미개한 짓이라고 떠들었다. 영국은 쿠바 지식인들에게도 노예무역 폐지를 촉구하는 글을 쓰도록 지원했다. 노예제 반대 운동이 불붙었다. 작가들이 필봉을 더욱 날카롭게 세웠다. 간헐적이나마 봉기가 잇달아 발생했다. 심지어는 노예선 안에서도 일어났다. 반란 봉기는 더욱 빈번해져 해마다 사건이 일어났다. 마탄사스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수확 철이 된 사탕수수밭과 50m가량 높이 솟은 감시 타워를 불 지르고 망루에 있던 감시자들과 미국인 공장관리자를 살해했다. 손에 마체테를 들고 휴일의 콤파르사 때 입던 옷을 입고 군인들처럼 줄을 맞춰 행진하며 이웃한 플랜테이션을 차례대로 파괴하고 노예들의 발목에 묶인 쇠사슬을 풀었다. 이 대열에 철도 부설 공사 노역 중인 노예들도 가담했다. 가담자가 1,000여 명이 되었다. 노예 역사에서 노예가 일으킨 반란이 대개 실패했던 것처럼 이 반란은 이틀 만에 진압되었다. 체포된 자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붙잡히지 않은 자들은 산으로 들어갔다. 스페인이 공포에 짓눌릴수록 학살은 극악해졌다. 타콘 재임 마지막 해에 일어난 봉기 때 스페인군은 흑인 254명을 하루 만에 학살했다. 양측 다 더 폭력적이고 잔인해졌다. 반란 사건마다 수백 명이 죽고 수천 명이 투옥되었다. 생 도맹그에서 프랑스 백인들이 흑인 노예 반란으로 당한 일에 유럽인들은 치를 떨었다. 노예가 백인보다 월등히 많은 쿠바 상황이 생 도맹그와 비슷한지라 스페인은 늘 두려웠다. 백인들은 극도로 예민하게 노예와 유색인을 감시하고 혐의를 씌웠다. 1844년에 스페인은 마탄사스 흑인들이 반란을 획책하고 있다고 추측했다. 증거는 없었다. 이 추측된 음모로 노예 78명을 총살하고 수천 명을 투옥했다. 반란을 음모한 불순 세력 일당을 소탕한 타콘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노예를 사다리에 팔과 다리를 묶고 채찍질하여 다른 가담자를 불게 했다. 이 시기에 쿠바를 방문했던 미국 변호사는 “혐의자는 4면을 희게 칠한 방으로 끌려갔다. 벽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살점이 덕지덕지 들러붙어 있었다. 이 방에서 먼저 고문당한 자들의 살점이었다…. 검은 피 더께가 붙은 사다리가 서 있고 머리를 아래로 해서 몸을 묶었다. 노예든 자유인이든 흑인은 고문 기술자가 강요하는 혐의를 부인하면 죽을 때까지 사다리에 묶어 가죽 채로 매질했다. 가죽 채 끝에는 가는 철조망 가시가 박힌 버튼이 붙어 있어 살점을 파고 찢었다. 그들의 주검을 검시한 검시관은 사인을 설사병으로 기록했다. 어느 고문 기술자는 혼자서 자유 흑인 42명, 노예 흑인 54명을 가죽 채찍으로 죽였다.” 스페인의 종교재판 심문이 다시 재현되었다. 1843-44년 사이에 3,000여 명이 고문과 처형당했다. 실종되고 추방된 사람들은 더 많았다. 고문 기술자에게 잔인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도 많았다. 이 상황을 목격한 한 미국인은 “나뭇가지에 목을 매달기도 했고, 서로 상대의 목을 졸라 죽이기도 했고, 돌아가며 서로 무릎으로 눌러 목을 졸라 죽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을 스스로 파괴했다. 목을 매 죽어 대롱거리는 사체가 20구가 넘는 나무도 있었다. 그들은 자기가 목을 맬 나무 밑동에 아프리카인들의 종교 상징물을 가져다 놓았다”라고 기록했다. 크고 작은 봉기 사건들은 끊이지 않았다. 주모자들은 총살한 뒤 뼛조각 하나 남지 않을 때까지 불태워졌다. 이 사건이 있었던 1844년을 “가죽의 해”라고 부르는 것에 이상해할 것이 없었다. 1810년대부터 라틴 아메리카 곳곳에서 스페인에 대항하는 노예들의 반란과 독립운동이 연달아 일어났다. 설탕이 가져다주는 돈을 잃으면 스페인은 돈 나올 곳이 없었다. 그러니 스페인으로서는 쿠바만큼은 잃어서는 안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대부분에서 식민지를 상실한 스페인은 이미 어둠의 세계에 휩싸였고, 그들의 기독교는 악의 포스 자체였다. 스페인이 통치하는 쿠바는 균형을 잃은 악의 포스가 지배한 세상이었다. 유색인이라면 노예도 부르주아도 가리지 않았다. 흑인은 물론이고 유산계급일지라도 물라토라면 고문과 투옥의 사냥감이 되었다. 십수 년 동안 유색인을 그렇게 제거하고 나니 쿠바에서는 아이티에서 쫓겨난 프랑스 꼴이 될 걱정은 없다고 안도했다. 이런 흐름에서 1844년에 물라토 시인 플라시도가 형장에 세워졌다. 고문으로 고초를 겪은 32명의 증인이 그의 반역 행위를 증언했다. 플라시도가 반역을 도모하는 비밀회의장에도 나타났고, 대표단을 파견한 주모자였고, 도시와 플랜테이션에서 동시 봉기를 주도했고, 자유 유색인과 노예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책임자였다는 증언들이 있었다. 심지어는 스페인 체제를 전복하고 스스로 황제가 될 계획이었다는 증언까지도 있었다. 미국이 파견한 관료는 “플라시도 1세 황제라고 알려진 물라토 시인은 1개 분대가 쏜 총알 3발을 맞고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가 ‘더 쏘라’라고 소리쳤고, ‘세상이여 잘 있거라’라는 외마디를 질렀고, 수십 발의 총탄 세례를 받고서야 쓰러졌다”라고 처형장의 상황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에게 아무런 반역의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발견된 것은 그의 결백함은 호소한 기도문 시구뿐이었다. 그해 여름 엄청난 허리케인이 쿠바를 덮쳤다. 플랜테이션은 파괴되고, 항구에 정박한 선박들도 침몰했고, 시인을 죽이는 데 관련한 자들도 많이 죽었다. 마치 종말이 온 듯 조용했다. 영국의 기자는 ‘공포의 적막’이 쿠바를 덮었다고 보도했다. “가죽의 해Año del Cuero”에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더블 베이스 연주자였던 클라우디오 브린디스Claudio Brindis de Salas도 오랜 구금과 고문 끝에 추방되었다.
그는 그 시대 쿠바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이자 콘트라단자와 탱고 작곡가였다. 그가 돌아와 감옥에 갇힌 뒤 출소해서 다시 오케스트라를 조직하려 했지만, 그의 단원은 모두 처형된 뒤였다. 이 시기에 쿠바에서 근무한 미국 관리는 “마지막 이삭 하나까지 주우려 추수”하는 풍경과 같았다고 기록했다. 아버지가 추방되고 감옥에 갇힌 덕에 그의 아들은 전혀 교육받지 못했다. 하지만 혼자 바이올린을 깨쳐 ‘니그로 파가니니’라 불리며 19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음악사는 그를 19세기의 가장 뛰어난 유색인 뮤지션으로 평가한다. 가죽의 해에 유색인들로 돌아가던 쿠바 음악의 생태계가 완전히 무너졌다. 백인들의 두려움과 미움은 성공했다. 유색인들의 반스페인 독립과 영국의 노예제 폐지에 동조하려는 의지를 분쇄하는 데도 성공했다. 백인 크리오요들의 독립에 대한 논의도 사그라지게 했다. 이 총살 사건을 스페인은 세계 언론에 적극적으로 알렸다. 설탕의 쿠바만큼은 스페인이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노예제를 옹호한다는 이 스페인의 홍보가 엉뚱하게도 미국의 합병 의지를 자극했다. 미국이 쿠바를 병합하는 것보다 노예제를 확실하게 유지하는 방안은 없을 것이었다. 그때 미국만큼 노예를 원하는 나라는 없었다. 이제 쿠바에서 댄스 오케스트라는 단원을 채울 수가 없었다. 텅 빈 쿠바의 음악 공간은 이탈리아 수입 오페라가 차지했다. 프로듀서는 판초 마르티였다. 가죽의 해가 지난 다음 판초는 더는 노예상이 아니었다. 아티스트였다.
가죽의 해 여파로 백인 계약 노예들도 쿠바에 많이 들어왔다. 이제는 흑인이 노예이고 노동력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졌다. 바스크 출신 훌리안 줄루에타Julián de Zulueta는 쿠바에서 가장 큰 설탕 플랜테이션 소유자이자 노예상이다. 줄루에타가 새로운 노예 거래처를 열었다. 마카오에서 쿨리를 계약 노예로 수입하는 일을 시작했다. 1847년에 마카오에서 쿨리를 선적한 뒤 출항했다. 쿠바까지 지구를 반 바퀴 돌아오다 보니 28%가 죽었다. 쿨리 수입이 잠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1853년부터 1873년까지 142,000명의 아시아인이 쿠바로 수입되었다. 이때는 중국이 대혼란에 빠진 시기다. 아편전쟁에서 진 대가로 홍콩을 영국에 99년간 할양하고 태평천국의 난과 같은 반란이 멈추지 않았던 시기다. 이 혼란한 시기를 피해 최소 100만 명 이상의 중국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졌다. 쿨리들도 흑인들이 있는 바라카에 함께 수용되었다. 줄루에타는 여자 쿨리를 수입하지 않았다. 물론 쿨리들이 백인 여자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흑인 여자를 놓고 흑인 남자와 쿨리 남자가 경쟁하는 관계가 만들어졌다. 가죽의 해를 보내고 줄루에타는 흑인 노예를 대신할 노동력을 중국에서 데려와 해결하지만, 판초 마르티는 멕시코 땅 유카탄에서 원주민 다이노들을 납치해 왔다. 납치한 다이노는 계약서가 없으니 노예로 아바나 노예 시장에서 팔았다. 다이노 노예 거래는 1861년에 멕시코가 금지함으로써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