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고트초크
고트초크
뉴올리언스에서 콩고 스퀘어는 매일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걷는 긴 흑인 행렬이 지나가는 중심가였다. 큰길 건너 프랑스인들이 쌓은 프렌치 쿼터 아래는 이런저런 혼란이 있을 때마다 많은 이들이 처형되어 밤이 되면 좀비가 출현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아프리카인들은 일요일에도 회합해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있는 코드 누아르도 개간지 너른 공터에 흑인들이 모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뒷날 콩고 스퀘어로 불린 광장에서 흑인들은 노래하고 춤추고 연주했다. 개신교 식민지들의 억압을 피해 자유 흑인과 백인 하층민 크리올들도 뉴올리언스로 몰려들었다. 노예 몇이 딸린 플랜테이션을 소유한 유대인 아버지와 백인 노예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트초크Louis Moreau Gottschalk는 콩고 스퀘어 거리 모퉁이 작은 오두막에 살았다. 여섯 남매였지만 다섯은 어머니가 서로 달라 가족만으로도 다민족 사회였다. 어린 고트초크는 밤마다 모닥불에 둘러앉아 장작 타는 소리에 섞인 흑인들의 노래를 듣고 봉고 같은 생 도맹그 퍼커션을 따라 두드리다 잠이 들었다. 생 도맹그는 다이노 음악과 프랑스 음악, 흑인 음악이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생 도맹그 출신 유모는 잔불에 던져 구워 검게 탄 감자를 꺼내 주었다. 유모는 좀비를 부르는 주문을 노래 불러 외다가 불길한 표정을 짓거나 예언을 하기도 했다. 피아노에 재능이 있던 고트초크는 프랑스계 크리올인 피아노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실력이었던 크레올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극장에서는 아바나의 오페라 가수와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를 들을 수 있었고, 쿠바에서 갓 온 곡마단에 대한 소문도 늘 마을을 휘감았다. 콩고 스퀘어에서는 백인 크리올 군인들이 맨 앞에서 연주하며 행렬을 이끌고 그 뒤를 흑인들이 줄을 지어 뒤따랐다. 그가 자랐던 뉴올리언스 콩고 스퀘어는 여러 피부색이 함께 사는 다문화 공동체였고 음악적으로도 다양했다. 소년의 감성 안에서 음표와 음표, 생명과 생명이 융합하고 조화하고 있었다. 10살 때 데뷔한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 뉴올리언스 부르주아 사회가 소년을 파리로 유학 보냈다. 13살 소년은 열성적으로 오페라와 콘서트를 찾아다녔다. 베를리오즈가 감독한 초대형 콘서트도 여러 차례 관람한 그는 파리에서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파리음악원에 입학을 신청했지만, 연주를 해보기도 전에 입학을 퇴짜 맞았다. 미국은 증기기관차만 아는 나라라는 것이 이유였다. 어찌어찌해서 그는 파리음악원에서 음악을 배웠고 베를리오즈의 몬스터 콘서트와 프란츠 리스트의 현란한 피아노 테크닉을 터득했다.
18세 고트초크는 파리에서 <밤볼라_니그로들의 춤Bamboula-Danse des Négra>를 그가 작곡한 첫 작품으로 연주했다. 아름다운 이 곡은 어린 시절 콩고 스퀘어에서 매일 밤 보았던 흑인들의 춤추는 풍경을 선율로 그려낸 한 폭의 그림이었다. ‘카리브의 현란한 꽃 같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은 이 곡은 도입부부터 유럽 음악과 달랐다. 왼손으로는 전형적인 클래식과 왈츠의 기법을 연주하면서 오른손으로는 하바네라라 불리던 쿠바 탱고를 연주하여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카리브 노예들의 것을 가져와 음악을 만든다는 발상은 생소하고 이질적이었다. 그의 스승 베를리오즈는 고트초크의 음악을 크리올과 검둥이들의 괴상한 것들을 끌어다 그들의 주제를 맛나게 비벼 창조해 낸 음악이라고 했을 만큼 유럽에서 그의 음악은 센세이션이었고 아방가르드였다. 다. 발표하자마자 파리음악원은 이 곡을 입학 경연곡으로 선정하기까지 했다. 피아니스트라면 마스터해야 하는 곡이 되었다. 스페인 국왕 부부 앞에서 이 곡을 연주했을 때 여왕은 그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그는 이 곡으로 ‘유럽 음악의 작법을 모방하지 않고 흑인 음악의 전통을 유럽의 낭만적 클래식 음악에 접목하여 아메리카적인 독창적인 음악’을 작곡한 천재로 평가받았다. <밤볼라>를 들은 쇼팽은 “단언컨대, 젊은이가 피아니스트의 왕이 될 것이야”라고 극찬했다. 프란츠 리스트도 고트초크의 완벽한 재능을 인정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파리에서 닦은 유럽 음악을 토대로 어린 시절 루이지애나에서 들었던 음악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것들이었다. 음악사는 그를 유럽 낭만주의 음악에 카리브적 감성과 아프리카적 음악 요소를 융합시킨 중요한 피아니스트로 평가한다. 고트초크는 쇼팽, 리스트 등과 함께 낭만주의 사조의 음악가기도 했지만, 유럽 관점에서 그의 작품은 라틴 아메리카 내셔널리즘 음악이기도 했다. 고트초크가 활동하던 1800년대 중반은 낭만주의의 끄트머리에서 새롭게 내셔널리즘 음악이 흐름을 만들 때였다. 고트초크의 음악은 유럽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는 유럽 음악을 한 미국인이 아니라, 아메리카 음악을 한 최초의 클래식 음악가였다.
24살 고트초크가 돌아온 1853년 미국에서는 바넘P.T Barnum의 <위대한 쇼맨>의 시대가 열려 있었다. 뉴올리언스에서는 오페라 공연의 인터미션 중에도 서커스 외줄 타기를 공연했다. 고트초크는 리스트의 초절기교처럼 압도적으로 빠른 기교와 베를리오즈를 모방한 웅장한 사운드를 연출해 연주했다. 그의 이런 스타일에는 뉴올리언스 특유의 과시적이고 쇼를 지향하는 퍼포먼스 성향이 스며 있었다. 고트초크가 유럽 음악에 쇼 비즈니스를 접목해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는 미국에 돌아왔지만, 뉴올리언스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쿠바와 푸에르토리코 등 여러 카리브 섬과 라틴 아메리카를 돌면서 1,100여 회 이상 연주회를 열었다. 원주민과 흑인들이 들려주는 새로운 리듬과 그들의 춤과 악기를 보고 들었다. 그 특유의 풍경과 사운드를 한 폭의 음악으로 그려냈다. 미국이 쿠바에 필리버스터들을 몇 차례 보내고 있을 때였다.
미국으로 돌아온 해 아바나에 연주 여행을 간 고트초크는 아바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쿠바 음악을 작곡하는 음악가들을 찾아 그들의 음악을 듣고 대화하기 위해 열대의 쿠바섬을 종횡했다. 25세의 고트초크가 22세의 피아니스트 에스파데로를 만났다. 대중 앞에서는 피아노를 치지 못할 만큼 내성적인 은둔자, 집안에 쌓인 악보 더미를 걷는 17마리의 고양이 앞에서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연주자였다. 외향적이며 현란하고 과시적인 쇼 퍼포먼스를 즐기는 고트초크와는 반대였다. 고트초크가 그의 악보를 프랑스, 스페인, 뉴올리언스와 뉴욕에 보냈다. 고트초크의 도움으로 에스파데로는 유럽 음악가들에 비견될 만한 최초의 쿠바 음악가로 떠올랐다. 고트초크가 쿠바 음악에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또 받기도 했다. 고트초크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쿠바 음악가는 쿠바에서도 아직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18세 물라토 바이올리니스트 호세 화이트José White였다.
스페인에서 이주한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화이트의 연주회에 참석한 고트초크가 호세를 설득해 파리에 가서 음악을 더 배우게 했고, 고트초크의 추천서에 힘입어 파리음악원에 입학한 그의 학비도 고트초크가 대주었다. 화이트가 파리음악원에 입학한 최초의 유색인이었다. 그의 작품 <아름다운 쿠바 여인La Bella Cubana>(1910)은 쿠바의 운명처럼 슬프고도 아름답다. 이 곡도 하바네라, 탱고다. 파리의 화이트가 유럽인들의 선호에 맞춘 느린 탱고로 작곡했다. 두 대의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인 이 곡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쿠바 음악이다. 피아노를 위한 편곡도 아름답다. 로시니 같은 최고 음악가들이 물라토인 그에게 쿠바의 파가니니라며 “그의 선율은 진주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구르는 소리처럼 들린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쿠바는 지금도 이 곡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