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 운명
운명
1850년 무렵 미국인들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새로 고안해 낸 기독교적 신념에 열광해 있었다. 인디언을 몰살하고 쫓아내 그 땅을 차지하는 것은 예수가 백인들에게 부여한 권리라는 믿음이었다. 이 신념은 15세기 유럽이 종교 전쟁할 때 그리고 포르투갈의 엔히크와 콜럼버스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별했던 교리에 뿌리를 둔 것으로 아메리카에서 원주민은 땅을 ‘점유’하고 있었을 뿐이므로 그들의 땅은 콜럼버스와 같은 기독교도의 ‘발견’으로 ‘점령’될 수 있다고 여겼다. 콜럼버스가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카리브를 식민화했을 때처럼 백인 기독교도로 구성된 미국이 북미 원주민에게 가하는 폭력은 정당하다는 신념이었다. 새로운 예수의 섭리는 1803년 나폴레옹에게 루이지애나를 사들여 영토를 두 배로 늘린 일부터 작동했다. 미국이 동부 대서양 바다에서 서부 태평양 바다까지, 알래스카에서 캐나다 전체와 멕시코까지 비기독교도인 원주민을 진멸하고 땅을 차지하는 것은 예수의 섭리이자 앵글로·색슨족의 마땅한 권리였다. 기도를 거듭하니 기독교도의 신념은 권리를 넘어 예수가 내린 신성한 명령이자 사명이 되었다. 사명을 수행하는 미국의 앵글로·색슨은 다른 인종과 분명히 구별되는 우월한 인종이었고 열등한 인종과 민족은 종속되거나 멸종되는 것도 예수의 섭리였다. 인디언을 몰살, 축출하고 흑인을 노예화하는 일은 섭리였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개념어를 <뉴욕 선> 편집자가 ‘미국이 텍사스를 병탄 하는 것은 왜 정당한가’를 주장하는 칼럼에서 고안해 냈다. 논리에 의하면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의 팽창을 방해한다면 그것은 예수가 미국에 부여한 사명과 권리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이 운명은 미국이 유럽을 대신해 아메리카에서 기독교 종교 전쟁을 치른다는 사명이 되었다. 이 명백한 운명은 존 웨인 같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을 양산했고, 인디언 원주민을 살상하더니 멕시코와 텍사스 전쟁을 치르게 했다. 이 해괴한 운명론은 서부 개척 정신이라고 포장되어 인디언을 축출하는 명분이 되었다. 프런티어가 태평양에 닿으니 미국의 시야가 세계를 향했다. <뉴욕 선Sun> 빌딩 2층 창가에 론스타를 닮은 로페즈의 깃발이 내걸렸을 때가 이 무렵으로 언론의 사명과 선동, 홍보에 힘입어 로페즈가 설탕 사업자, 노예무역업자,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증기선 제조업자 등으로부터 5만 달러를 투자받아 무기를 구매했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창끝은 카리브해라는 미국의 호수에 떠 있는 한 마리 악어를 닮은 섬을 겨누었다.
프랭클린 피어스는 미국 14대 대통령으로 쿠바 합병은 그의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그는 재임 동안 미국은 벨기에에서 영국, 프랑스와 만나 선언한 오스텐드 매니페스토에서 스페인은 미국에 쿠바를 매각해야 하고 이를 거부하는 즉시 미국은 스페인에 선전포고하여 쿠바를 빼앗을 수 있음을 영국과 프랑스는 양해한다는 내용이었다. 스페인에 제시한 값은 1억 3,000만 달러. 스페인은 이번에도 거절했다. 외교관들끼리 제안이 오가는 동안 뉴올리언스에서는 또 다른 필리버스터들이 쿠바로 향했다. 로페즈의 쿠바 필리버스터링을 지원한 키트만이 뉴올리언스에서 “론스타의 명령”(1851)이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들이 떠받든 론스타의 명령은 미국 정부에 협력하여 스페인을 축출하고 쿠바를 해방한 뒤 미국에 병합하는 것이었다. 그는 2만 명이 쿠바를 침공할 구체적인 공작 계획을 세웠다. 미국 정부는 이 단체와 계약서에 서명했다. 미국 정부는 이 단체가 지명한 지휘관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쿠바를 식민지로 점유했을 때 그에게 독립된 독재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으로 쿠바에서 노예제를 유지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이 단체는 군사 침공은 계획하지 않았다. 쿠바에서 내란 소요를 일으키고 혼란을 명분 삼아 쿠바를 군사적으로 흡수해 친미 정권을 세운다는 구상이었다. 뒷날 CIA가 라틴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 친미 정권을 세우는 프로세스의 기본 틀이 이때 만들어졌다.
미국이 쿠바를 삼키는 것은 이제 중력의 문제에서 시간의 문제로 바뀌었다. 이런 분위기를 잘 읽고 있던 판초 마르티는 더욱 정신을 집중해 예술에 전념했다. 그는 미국 투어에서 공연 관람료를 아주 낮게 책정했다. 그의 뉴욕 공연에 5,000명 넘는 관객이 운집하기도 했다.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에서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규모로 세트, 의상과 단원을 투입했다. 공연을 본 미국인들은 쿠바를 선망하고 탐했다. 그들 마음에서 쿠바는 당연히 미국의 것이어야 했다. 그것도 빠르게 미국의 것이 되어야 했다. 600만 명이 넘는 흑인을 수입했던 브라질마저도 이때는 노예 수입을 그만두었을 때였고 쿠바가 유일한 노예제 사회였다. 노예제가 존속된 것만으로도 쿠바는 충분한 이권이 걸려있는 섬이었다. 복잡하고 치열한 이권 다툼의 공간이었다. 이해 관련자들은 명백히 공통점인 운명이 있었다. 미국과 스페인 그리고 쿠바의 부르주아들 모두 어떻게든 오래 노예제를 유지해야 했다. 그것은 쿠바의 명백한 운명이기도 했다. 쿠바의 운명은 노예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그것이 쿠바의 운명이었다.
미국이 명백한 운명을 행동에 옮기고 있을 때 쿠바 음악계는 심하게 위축되어 있었다. 가죽의 해에 흑인 뮤지션들이 몰살당한 탓이다. 당시 산티아고 데 쿠바에서는 새로 유행한 코코예라는 탱고 신퀴요 리듬이 아바나에 들어와 새로운 콘트라단자가 유행했다. 코코예는 다이노 전통 악기 기러güiro가 댄스 오케스트라에서 리듬과 박자를 끌어가는 중심 악기로 자리 잡았다는 점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빨래판 긁는 듯 단순한 소리를 내는 기러는 분명하고 단순한 박자로 리듬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그런 특징은 사람을 쉽게 춤추게 했다. 춤추는 사람은 반복하는 정확한 박자를 들으면 다음 박자의 공간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러는 춤을 즐기는 아바나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 체포된 필리버스터들을 광장에서 처형하던 살벌한 시대였지만, 기러가 들어간 탱고 트레시오 리듬이 아바나를 금세 다시 춤추게 했다. 위축된 쿠바 음악에 다이노 악기 기러가 새로운 변화와 활력소가 되었고 빠르게 쿠바 음악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