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아란후에스
아란후에스
프랑스 혁명 뒤로 유럽은 혼란했다. 프랑스에서 공화국 체제가 시작되었고, 절대 왕정 체제는 종식되었다. 산업혁명과 자유주의 바람이 불었고,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유럽은 전란에 휩싸였다. 그러나 스페인은 여전히 절대 군주와 가톨릭의 공동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 두 진영 사이에서 배신을 거듭하며 이익을 찾아 전쟁을 계속했지만 잇달아 패전하고 있었다. 그럴 때 마드리드 남쪽 아란후에스에서 민중 폭동이 일어났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4세와 그가 총애한 수상 고도이가 나폴레옹과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한 일이 폭동의 발단이 되었다. 조약은 프랑스가 포르투갈을 침략할 때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땅을 지나가도록 동의한다는 내용이었고, 고도이는 이 조항이 나폴레옹의 스페인 침략을 막을 나름의 방책이라고 민중들에게 설명했지만, 왕위 계승권자인 페르디난드 7세의 반대에 부딪혔다. 페르디난드 7세는 카를로스 4세의 아들이었지만 아버지의 정치 노선에 대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가를 복위시키겠다며 자신에게 대항하고, 영국에 붙었다 프랑스에 붙었다가 해온 카를로스 4세를 신뢰하지 않았다. 영국을 고립시키고자 영국과 모든 무역 거래를 봉쇄했는데 포르투갈이 영국과 무역을 계속했으므로 나폴레옹은 포르투갈에 선전포고(1807)했다. 고도이가 체결한 조약대로 나폴레옹은 포르투갈로 진공하며 스페인은 경유할 뿐이라고 말했지만, 20만이나 되는 군대를 스페인 여러 지역에 배치했다. 나폴레옹은 군대에서 필요한 보급물자를 프랑스에서 보내지 않고 스페인에서 조달하도록 해 사실상 약탈을 허용했다. 사실상 프랑스가 스페인을 점령했다. 나폴레옹의 침략과 약탈에 민중들은 분노했고, 아버지에게 대항하는 아들 페르디난드 7세를 지지하는 자유주의 개혁파들과 민중들이 함께 봉기를 일으켜 고도이가 숨어 있는 아란후에스를 공격한 것이다.
아란후에스의 민중 봉기를 계기로 나폴레옹은 카를로스 4세를 압박해 물러나게 하고 페르디난드 7세를 옹립했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가톨릭 독립 국가로 남을 수 있게 보장하는 조건으로 페르디난드 7세를 두 달 만에 퇴위시키고 자기 형제인 조제프 보나파르트에게 양위하게 했다. 아란후에스 왕궁에서 치러진 즉위식 이후 스페인의 보나파르트 왕조 호세 1세는 스페인 통치자로서 합법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이 뽑은 대표단으로 스페인 의회인 코르테스를 구성하고, 나폴레옹이 스페인 통치를 위해 만든 헌법을 승인받으려 했다. 172명의 의원이 정원인 의회는 본토 태생인 페닌술라레스 110명과 스페인의 아메리카와 필리핀 식민지 대표단 크리오요 62명으로 구성되었다. 나폴레옹은 평등과 자치에 대한 스페인 식민지의 열망을 수용해 줌으로써 식민지 대표단의 지지를 유도해 헌법을 승인받으려 했으나 그의 계획은 엉뚱한 지점에서 어긋나고 말았다. 나폴레옹의 짐작대로 우선 페닌술라레스들은 식민지를 대표하는 의원 비중이 늘어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예상하지 못했던 복병은 각 식민지 부왕령 대표단의 반응이었다. 나폴레옹은 식민지 출신 크리오요 대표단 그룹 명칭을 “인디아 대표단The Indies”라고 명명했는데 페닌술라레스들은 “스페인령 아메리카와 필리핀”이라는 이름을 고집했다. “인디아 대표단”에는 스페인 식민지라는 개념이 빠져있었고, “스페인령 아메리카와 필리핀”은 ‘아메리카와 필리핀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이 통치’하는 땅이라는 개념이 내포되어 있었다. 스페인 식민지의 크리오요도 스페인 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 점이 문제가 되었다. 콜럼버스가 카리브 섬에 상륙했을 때부터 300년 동안 크리오요를 이베리아에서 태어난 페닌술라레스가 아니라는 이유로 노예와 비슷하게 취급해오다 이제 ‘식민지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이라며 이용하려는 페닌술라레스의 의도에 동의해줄 수 없었다. 프랑스식 헌법을 승인받아 호세 1세의 통치를 합법화할 목적으로 소집한 코르테스였지만 이 헌법은 두 진영 모두의 반대로 승인되지 못하고 말았다. 아란후에스의 민중 봉기는 스페인 본국 사람이라는 뜻의 페닌술라레스와는 다른 정체성을 인식해온 라틴 아메리카 크리오요들이 자기들의 정체성과 내셔널리즘을 국제무대에서 제기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식민지에서 온 대표단을 무엇이라고 부를지에서 시작한 이 작은 논쟁이 작지만 날카로운 쐐기가 되었고, 이제 곧 스페인의 아메리카 제국이라는 드넓은 바위를 쪼갤 터였다.
스페인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지만, 잘 조직된 나폴레옹 군대에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바스크족 민중들은 이베리아 북부 산악지대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포르투갈도 프랑스에 대항해 전쟁을 벌였고, 이베리아를 프랑스가 통째로 삼키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던 영국이 지원군으로 참전했다. 스페인으로서는 프랑스에 대한 독립 전쟁이었지만, 프랑스와 영국이 남의 땅 이베리아에서 벌인 전쟁이기도 했다. 7년간의 전쟁으로 스페인은 초토화되었다. 전쟁하는 동안 스페인의 자유주의자들은 카디스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민법전을 기초해 절대 왕정 옹호자들까지 참여한 구성된 의회가 절대 왕정 체제를 폐지하고, 주권은 왕이 아닌 국민에 있고,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가 왕권을 법률로 통제하는 입헌군주제를 골자로 한 최초의 성문헌법(1812)을 제정했다. 카디스헌법은 페르난도 7세가 스페인 국왕이라는 점도 분명히 했고 남성의 보통 선거권을 보장해 주권자로서 대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평원의 보병 전에 익숙한 나폴레옹 군대는 게릴라전을 제압하지 못했고, 나폴레옹이 러시아 전선에 전력을 집중하다 보니 영국 연합군에 패퇴하여 결국 조제프 보나파르트 왕가는 한겨울의 피레네의 산맥을 넘어 철수했다. 민중들이 나폴레옹 군대와 싸우는 동안 피레네 너머 프랑스 바욘 궁정에서 호의호식하던 페르디난드 7세가 귀국했다. 귀국할 때는 카디스헌법에 서명하기로 의회와 합의했었지만 복위한 지 두 달 만에 왕권을 제한하는 카디스헌법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무효로 했다. 입헌주의자들을 체포하고 의회의 주요 서류를 불태우고 종교 재판소를 부활시키며 폭정과 억압으로 상징되는 절대 군주의 재개를 시도했으나 페르디난드 7세는 결국 카디스헌법에 서명(1820)했고 스페인도 자유주의 국가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쿠바를 비롯한 아메리카의 각 식민지의 대표자들이 카디스 의회에 참석해 헌법의 초안 작성에도 참여한 카디스헌법은 “두 개의 스페인Dos Españas”을 재촉했다. 왕이 서명하자 아메리카에서는 헌법 공포를 환영하는 축제가 곳곳에서 열렸다. 카디스헌법으로 스페인과 아메리카는 헌법적으로 대등한 지위로서 교류하고 대화하게 되었다. 그런 축제의 분위기도 라틴 아메리카 지식인들의 자유주의 독립운동을 자극했다. 이 헌법은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들이 독립한 뒤 자유주의 국가 체제를 세우는 헌법의 핵심적인 틀이 되었다. 페르디난드 7세는 왕위 계승권자였을 때 자유와 변화를 향한 민중의 열망을 한 몸에 받았으며 스페인 민중과 자유주의자들의 열망왕El Deseado이었으나 그들의 열망을 배신하고 주권은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는 부르봉 왕가의 절대 군주로 되돌아갔을 때 그는 배신왕El Rey Felón이었다. 영국 왕에게 노예를 수입한 흉악범이라는 죄목으로 40만 파운드의 벌금을 부과받았던 왕도 그다. 노예 수입을 중단한다고 선언한 대가로 30만 파운드를 영국 왕에게 뒷돈으로 받았다. 그는 그러면서도 노예를 계속 수입했다. 그래서 스페인 역사는 그를 치욕왕이라고도 부른다. 스페인의 절대 군주의 전제주의와 시민의 자유주의가 교차한 시대의 한 가운데 “두 개의 스페인” 시대에 살았던 왕이 페르디난드 7세였다. 아란후에스 궁전 다락방에 숨은 고도이를 체포하며 시작한 민중 봉기는 라틴 아메리카를 독립의 바다로 나아가게 했다.
영국은 페르디난드 7세 이후 스페인의 왕으로 13세 소녀 이사벨라 2세를 선택했다. 페르디난드 7세의 딸인 이사벨라 2세는 변덕스럽고, 사치하고, 교육도 받지 못했고 절제를 몰랐다. 영국은 그런 점을 눈여겨보아 이 소녀를 여왕으로 선택했고, 발기가 되지 않는 것을 확인한 사촌오빠를 어린 여왕의 남편으로 지명했다. 그래도 이 여왕은 자녀를 일곱이나 낳았다. 쿠바는 25년간이나 이 여왕의 방종한 생활에 쓰일 세금을 냈다. 1868년에 스페인에서 “자유여 영원하라Viva La Libertad”라는 깃발을 든 군사 혁명이 일어났고 이 여왕은 프랑스로 쫓겨났다.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늦었지만, 스페인에서도 최초로 자유주의적인 스페인 공화정이 선포되었다. 프랑스 혁명이 아이티혁명을 촉발했듯이 독립의 열기로 가득 차 있던 라틴 아메리카 식민지들을 자극했다. 스페인에서도 군주가 없어지고 공화국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은 닷새 만에 푸에르토리코에 전해졌고 독립을 요구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아메리카 식민지 부왕령 대부분이 이런 분위기에서 독립을 선언했다. 300년 스페인 제국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