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리브레

13. 리브레

#271 아르헨티나

by 조이진

아르헨티나

 예수회는 선교 초기인 17세기에는 공동 생산과 분배에 바탕을 둔 기독교적 사회주의 공동체를 추구했었다. 몽테스키외,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자들은 초기 150여 년간의 예수회 활동에 대해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가한 끔찍한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라고 평가했을 만큼 예수회는 인디오 원주민을 존중했다. 그래서 스페인 정복자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엔코미엔다나 플랜테이션의 노예가 되어 강제 노역하는 많은 원주민들이 예수회 공동체로 도망해 숨어 들어왔고, 예수회의 사회주의적 자급자족 공동체는 생산성을 높이며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원이 늘면 새로운 교구와 관구를 늘려갔으니 남미 전역에서 원주민들의 피난처가 늘어났다. 그런 예수회도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원주민을 착취해 높은 이익을 노리는 사업체로 변질했고 남미의 경제 권력이 된 예수회는 곤궁해진 스페인 왕실에 이윤을 나누지도 않을 만큼 힘이 강해졌다. 원주민 노동력 이탈과 예수회 교·관구의 증가는 노예 착취에 바탕을 둔 플랜테이션 운영자들에게는 위협요인이 되었다. 스페인 왕실과 가톨릭은 예수회가 폭동을 배후 조정했다는 빌미 삼아 예수회 활동을 불법으로 금지하고, 예수회 소유 재산을 몰수했고 사제에게 주는 여러 특권을 폐지했다. 이에 반발한 예수회가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지배 체제를 바닥에서부터 금 가게 했다.

아르헨티나 원주민 마을에 세워졌던 예수회 선교 시설. 예수회는 초기와는 달리 노예 수탈 기구로 변질했고, 기득권을 빼앗은 스페인에 저항했다.


  나폴레옹이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 국왕으로 지명했을 때 아메리카의 크리오요들은 이제 스페인 왕이 없어졌으니 민중에게 주권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민중은 원주민과 흑인을 제외한 크리오요 자신들이었다. 게다가 영국의 압박을 못 이긴 스페인 왕실은 식민지에서도 원주민을 노예로 삼는 일을 금지했다.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아르헨티나 크리오요 부르주아들로서는 노예 노동력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나 노예무역은 이미 금지되었으므로 아프리카인을 데려올 수는 없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예수회 선교사들과 크리오요들의 이해가 서로 일치하는 점이었다. 1806년 영국이 부에노스아이레스를 공격했으나 방어하는 스페인 군대는 없었다. 한때는 대서양 바다에서 적이 없었다는 스페인이었지만 이제는 대서양을 건너려면 다른 나라 배를 얻어 타야 할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크리오요의 지지를 얻기 위해 사유 재산을 인정하고, 자유무역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선언했다. 예수회의 불만을 잘 알고 있는 영국이 종교 문제를 지렛대로 활용한 것은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을 제거하려는 영국의 노림수였다. 그러나 예수회와 손잡은 크리오요 의용군들이 영국군 1,200여 명을 생포하자 영국은 크리오요 지도자에게 포로를 풀어주고 영국에 협조하면 독립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우리는 과거의 주인도 새로운 주인도 원하지 않는다.” 당시 라틴 아메리카의 분위기는 이 한마디로 압축되고 상징되었다.

아르헨티나는 백인 크리오요가 독립 운동의 주체였다. 그들에게도 원주민과 흑인은 수탈과 착취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르헨티나 크리오요들은 자신들의 힘만으로 세계 최강 영국군에 승리했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스페인은 그저 바라만 볼 뿐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독립했다(1811). 아르헨티나와 영국의 분쟁은 이런 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안데스 산맥을 넘는 산 마르틴 장군. 아르헨티나는 그를 독립 영웅으로 추존한다.


  아르헨티나에서 시작한 독립의 바람이 안데스 산맥 등줄기를 타고 북쪽으로 몰아쳤다. 칠레도 해방하고 페루도 독립했다(1817). 아르헨티나의 지도자 산마르틴San Martín이 4,000여 병력을 이끌고 안데스를 넘어 독립 전쟁을 이끌었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은 일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작전이었다. 허를 찔린 스페인군은 허물어졌다. 산마르틴도 크리오요의 한계가 뚜렷한 과도기적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 독립한 라틴 아메리카에 왕정을 세우려 했다. 자신이 왕이 되려 한 게 아니고 합스부르크나 부르봉 같은 유럽의 왕가를 초빙해 군주로 삼은 새로운 왕국을 만들려고 했다.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혁명에서 군주를 폐하고 공화정 체제가 들어서고 있는 시대 변화를 직접 보았지만, 또 유럽 세력에 대항해 스페인, 영국 같은 식민권력을 축출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으면서도 유럽의 문화적 지적 우월성에 집착한 그는 유럽식 왕정으로 시대를 되돌리려 했다. 아이티혁명을 지켜보았던 백인 크리오요 부르주아들은 흑인들이 혁명의 주축으로 부상하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스페인의 카디스헌법도 입헌군주제가 핵심이었다. 기득권을 흑인과 원주민과 나누지 않으면서 라틴 아메리카 독립운동을 주도한 크리오요 지도자들에게 입헌군주제는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3년간 멕시코 제국의 황제였던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막시밀리아노가 그런 경우였다.

King_Max_I_Joseph_in_Coronation_Robe.jpg 3년간 멕시코 황제를 지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막시밀리아노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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