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파트리아
파트리아
1800년에 쿠바를 방문한 독일 지리학자 훔볼트의 <쿠바 섬The Island of Cuba>은 이 시기 쿠바에 대한 중요한 인문 지리학적 자료다. 그는 “가장 별 볼 일 없고 무식한 유럽인일지라도 신세계에서는 크리오요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라고 기록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프랑스와 한편이었던 스페인은 유럽에 가지고 있던 식민지 대부분을 상실했다. 경제 사정은 악화했고 가난한 사람들이 갈 곳은 아메리카 식민지뿐이었다. 훔볼트가 본 대로 스페인 사람이 식민지에 가면 페닌술라레스가 되어 배에서 내리자마자 크리오요와 원주민, 메스티소, 흑인들에 비해 우월적, 지배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막강한 길드 조직을 이용해 상업과 무역에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특히 1천 년 전부터 피레네산맥을 넘나들며 스페인 북부와 남프랑스의 경제를 주도했던 바스크들은 상업 능력에서 크리오요들보다 한 수 위였다. 상업에서 주도권을 잡기도 어렵고 정부 관료나 성직자 같은 고급 직에서도 소외된 크리오요들이 방탕하고 나태한 생활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베리아인들은 그런 그들을 실패한 인간들이라며 비하했다. 아메리카의 더운 기후와 토양이 그들을 부정적인 기질의 하급 인간으로 키워냈고 열등한 유전자를 타고났으니 천성적으로 게으르고 무능하고 배반을 잘한다는 식이었다. 여행자 훔볼트는 쿠바에서 직접 확인한 지배-피지배계급 사이 권리와 부의 극심한 편차를 개탄했다. 부유한 자들은 괴물과 다름이 없고 더욱이 계몽된 자들이 어찌 끔찍한 관행을 계속하는지 비판했다.
18세기에 라틴 아메리카 전역에서 크리오요 인구가 급증하며 농장주나 광산주 부모의 지원으로 스페인이나 유럽에 유학하여 교육받은 이들도 꽤 있었다. 그렇더라도 식민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큼은 바뀌지 않았으며 크리오요들의 반감은 더욱 커졌다. 페닌술라레스들을 비열하고 욕심 많은 졸부일 뿐이라며 증오했다. 이들 크리오요들이 라틴 아메리카 사회의 중상류 계층으로 성장하고 세력화되었으며, 교육받은 크리오요들이 조국이라는 개념을 갖기 시작했다.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크리오요들을 하등민으로 차별하고 권리를 심하게 제약하는 스페인을 더는 모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태어난 땅 아메리카야말로 ‘나의 조국patria’이었다. 훔볼트는 “나는 에스파냐인이 아니다. 아메리카인이다”라는 말은 아메리카 크리오요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유행어라고 적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크리오요 내셔널리즘이 태동했다. 18세기에는 이미 멕시코와 페루를 비롯한 거의 모든 라틴 아메리카에서 페닌술라레스와 크리오요들 사이에 갈등이 분출되었고, 봉기와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원주민 인디오, 메스티소, 물라토, 흑인 등 유색인들은 크리오요가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리오요들이 유색인들을 스페인 군대와 싸울 때 총알받이로만 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쟁에 이겨 스페인을 축출한다고 하더라도 크리오요들이 유색인들을 강하게 지배하리라는 것도 알았다. 물라토와 메스티소는 돈으로라도 백인다움whiteness을 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엘리트 그룹에 진입한 소수의 유색인은 자기 피부색에 대한 차별을 줄이고자 노력하지는 않았다.
펠릭스 바렐라Felíx Varela는 쿠바에서 노예 폐지론을 주창한 선각자였다. 아바나대학 출신으로 아바나 대성당의 신학 교수이자 쿠바 독립운동의 스승으로 후학들을 키워냈고 쿠바인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쿠바 지식인 사회의 리더 호세 안토니오 사코José Antonio Saco도 그의 제자였고, 호세 마르티의 스승도 그의 제자였다. 바렐라는 스페인 의회 격인 코르테스에 쿠바 대표로 참석했다. 마드리드에서 활동하며 왕실에 라틴 아메리카 독립을 청원했다. “…. 그러나 전제군주가 만든 그 법은 비참한 자들의 불행을 영구화하려는 법입니다. 노예들 사이에서 자유라는 주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그들의 발을 묶고 있는 쇠고랑을 끊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처절하게 노력해 왔는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들의 자유에 대한 욕구는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일 쿠바는 자유를 얻었는데도 그들은 자유를 얻지 못하게 된다면, 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만일 이번에 해방되지 못하면 그들은 처참한 환경에서 더욱 비극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정의가 아닙니다. 쿠바의 백인들은 지금까지 전제군주가 노예들에게 휘감아 놓은 잔인한 사슬을 끊어주는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노예들도 자유로운 인간으로 사는 신성한 권리를 되찾을 수 있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감정들을 억누르고 온순하게 이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어 주기를 바라는 가요? 분노와 절망으로 그들은 자유 아니면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고 살기로 봉기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미련해지지 맙시다. 제헌 입법과 해방 그리고 평등은 다 똑같은 단어입니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노예제 존속과 불평등 체제를 지속하자는 것입니다. 그 절충안이란 없습니다. 이 두 가지를 중도에서 조화시켜 보겠다고 하는 것은 헛된 일일 뿐입니다….”라며 지식인들에게 호소했다. 그가 다시 되돌려지지 않을 수레바퀴를 나아가게 했다.
크리오요들은 개혁적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수구적이기도 했다. 그들은 정치는 백인들이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대의 쿠바 지식인 사코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번지고 있는 흑인 폭동 사건들을 보며 “지금 우리 쿠바는 더 심각하다. 주변을 보자. 이미 여러 곳에서 화산이 터졌다. 연기가 솟구치고, 불의 고리가 터져 번지고 있지 않은가? 앤틸리스에 치솟은 불길이 카리브의 섬들을 삼켜 대재앙을 만들 것이다……. 1823년 지금 쿠바 인구의 40%가 노예고 43%가 물라토다. 백인은 17%뿐이다. 우리 17%가 유색인 87%를 어떻게 계속 소유할 수 있을까?”라며 크리오요들에게 인종주의를 선동했다. 그의 호소문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자! 이제 우리가 우리의 파트리아를 구하자!” 그의 조국 쿠바는 17% 백인을 위한, 백인에 의한, 백인으로 구성된 쿠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