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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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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2. 2024

15. 그란마

#318 치바스

  1951년 8월. 치바스는 다음 해에 치러질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라디오는 여전히 그의 정치와 선거의 중심이었고, 부패 척결과 함께 헌법적 절차와 수단을 활용한 민주적 정권교체를 주장한 그의 연설에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연설은 강렬했고 전직 대통령은 물론 부패한 현직 대통령도, 학교를 짓지 않는 교육부 장관도 공격했다. 자신이 고발한 교육부 장관의 부정부패와 관련된 증거를 공개하기로 한 날 서류 가방을 들고 스튜디오에 들어선 그가 방송 중에 여느 때처럼 목소리를 높여 “경제적 독립과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 정의를 위하여…. 사기꾼 정권을 모두 쓸어버립시다. 쿠바 민중들이여. 일어나 행동합시다. 쿠바 민중들이여 잠에서 깨어납시다. 이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며 외치더니 가방을 열어 총을 꺼내 자기를 쏘았다. 그러나 하필 그가 방아쇠를 당긴 그 짧은 순간에 커피 광고가 막 시작했다. 생방송일지라도 그의 연설이 길어지자 라디오 방송 편성 담당자가 커피 광고가 실린 테이프로 막 갈아 끼운 참이었다. 스튜디오는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방송에는 총소리 대신 정신을 깨워주는 커피를 마시라는 광고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치바스의 죽음을 알게된 사람들은 치바스가 생방송 중에 자신의 주장을 외치고 죽는 것이 자기 죽음을 세상에 가장 충격적으로 알리는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총소리가 라이브 방송으로 전파를 타지는 못했어도 그가 방송 도중에 자살했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으로서는 다 이겨놓은 선거를 이번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치바스가 스스로 치워버린 셈이 되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3만 명이 넘게 운집한 장례 행렬을 바라보는 국민은 비통해했다. 치바스의 성급한 죽음은 다시 부패한 정권을 탄생하게 했다. 치바스는 죽었지만, 쿠바의 민주화를 향한 큰 상징으로 남았다. 사회 민주화는 1950년대 쿠바 사회를 관통한 주제어가 되었고, 그의 죽음은 젊은 정치 신인 피델 카스트로가 떠오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과감하고 급진적인 성향의 피델은 카리스마와 강렬한 리더십 그리고 연설로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라디오 스타였던 치바스를 눈여겨 보았었다. 피델은 이제는 권력이 라디오 방송과 마이크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확인했다. 피델은 매스미디어 정치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쿠바민중당은 정통당이라고도 불렸다. 그라우의 100일 정권 때 추진했던 혁명적이었던 정책을 그대로 추구했기 때문이다. 젊은 그들은 정당 사무소를 쿠바 권투 영웅의 도장을 빌려 차렸다. 권투 도장을 당 사무소로 정한 것은 “부패와 정치공작을 녹아웃 시킬 탄탄한 혁명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구호는 “돈을 보면 수치를 먼저 생각한다Vergüenza contra dinero”였고 빗자루를 정당의 상징으로 삼았다. 빗자루는 부패를 쓸어버리겠다는 그들의 정치 비전을 문맹이 대다수인 민중들에게 쉽고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민중들은 대문에 빗자루를 내걸었고, 베란다에 빗자루를 들고나와 응원했고, 빗자루를 들고 정당 행사에 참석했다. 치바스가 출마한 1948년 대통령 선거 연설에 6만 군중이 모여 환호했고, 수천의 빗자루가 펄럭이는 깃발처럼 하늘을 가렸다. 선거가 아직 남았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치바스가 이미 당선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까지 돌았다. 바티스타가 속한 당 프리오 후보가 치바스에게 총리직을 포함한 내각의 절반을 정통당에 내주는 조건의 연정 제안이 있었으나 치바스는 거절했다. 선거는 졌어도 정통당이 거둔 성과는 놀라웠다. 언론은 ‘돈을 뿌리지 않은 정당이 거둔 이 성과는 기적이자 몇 년 안에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했고 미국 언론도 ‘위대한 도덕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선거는 끝났어도 치바스의 라디오 방송은 계속되었다. 부패한 자라면 누구든 거침없이 고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프리오 대통령에게도 ‘병원과 도로를 건설할 돈은 없다면서 당신은 어떻게 농장을 몇 개씩 사들일 수 있었는지 설명하라’라고 했다. 화물차에 마약을 가득 싣고 비밀 경찰 수장 앞에서 버젓이 거래하다 체포된 세계적인 마약 거래상을 왜 곧바로 풀어주었는지도 설명하라고 따져 물었다. 경찰은 수시로 그를 연행했고 방송도 자주 송출 금지당했다. 그러나 그가 연행될 때마다 미디어에 크게 실린 그의 체포된 장면을 담은 사진은 오히려 치바오의 정치적 메시지의 볼륨을 증폭시키는 꼴이었다. 드물었지만 돈에 매수되지 않는 언론도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치바스는 새로운 스타일로 정치를 하는 젊은 개혁주의자였다. 그는 늘 “나는 고발한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고, 정권의 부패를 비판할 때마다 고발한다고 했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짧은 한마디는 그의 정치를 상징하는 태그라인이 되었다. 젊은 피델은 귀에 쏙쏙 박히는 이 쉬운 태그라인을 귀담아 두었다. 1952년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그도 유세장에서 이 짧은 문장을 구호처럼 즐겨 썼고 “나는 고발한다”라는 멘트는 젊은 정치인 피델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되었다. 이 구호가 유행하자 ‘고발’은 현상이 되었다. 취임하는 날 중앙은행에 들어가 돈을 들고나온 교육부 장관을 비롯해 많은 관료들을 시민들이 고발했다. 정통당에는 익명 제보자들이 줄을 이었고, 비리를 입증하는 증거 자료들을 어느 골목 전봇대 아래 놓아두었다는 쪽지가 사무실 벽에 붙었다. 대다수 판사들은 그렇게 제출된 책상 가득 쌓인 자료들을 증거로 채택해 주지 않았지만 간혹 증거를 받아주는 판사도 이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치바스 

  미국인들이 페레스 프라도의 <맘보 #5>에 빠져있던 1940년대 말. 쿠바는 부패한 권력을 타도하려는 민중들의 요구로 끓고 있었다. 1933년 마차도를 축출하고 1940년 새 헌법을 끌어냈던 쿠바 민중은 미국의 비호를 받아 부패한 바티스타 독재 권력을 끌어내리려는 힘을 다시 쌓아가고 있었다. 치바스는 이 시기 쿠바 민중의 의식을 깨우쳐 힘으로 전환한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아바나대학생 시절에는 학내에서 마차도 타도 투쟁을 이끌었고, 혁명적이었던 그라우의 첫 번째 127일간의 집권을 지지했으며, 1940년 개헌의회에도 의정 활동했던 그는 그라우가 두 번째 집권했을 때도 그라우와 같은 당 소속 상원의원이었다. 그러나 그라우가 변질돼 바티스타의 앞잡이가 되자 그라우를 쿠바 역사에서 쿠바인들의 믿음을 가장 빠르게, 철저하게 배신한 자라고 맹비난했다. 치바스는 라디오 스타 정치인이기도 했다. 일요일 아침 8시 치바스의 라디오 방송 스튜디오에 ‘온-에어’ 사인이 들어오면 라디오가 있는 집 마당으로 마을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고, 어느 집 마당에는 800여 명이 모여 함께 치바스의 방송을 들었다. 치바스가 정권의 부패상을 낱낱이 고발하고 거칠게 비판할 때마다 속이 후련해진 마을 사람들은 한마음으로 박수로 맞장구를 쳤다. 마치 집 마당 그루터기에 올라서 연설하는 치바스에 ‘옳소! 옳소!’ 하며 호응하는 듯했다. 방송이 끝나면 전국은 집집이 마당마다 정치 토론장이었다. 그라우도, 바티스타 정당의 의원들도 라디오 방송을 운영하기는 했어도 치바스의 청취율에는 턱없이 못 미쳤다. 그런 치바스가 라디오 방송에서 새로운 정당을 창당한다고 밝혔다. 과거 그라우가 100일 혁명 정부 때 추진했던 미국에 대한 경제적 독립, 정치적 자유의 쟁취, 사회 정의의 실현을 추진하는 것을 목표로 창당되는 치바스의 쿠바민중당 발기인 명단에는 스무 살의 아바나 대학 법대생인 피델 카스트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20살 피델 카스트로가 정치를 시작했다. 

      

 라디오 정치 스타 치바스는 부패한 집권세력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20살 피델 카스트로가 그가 만든 당에 입당하 정치를 시작했다.


   쿠바민중당은 정통당이라고도 불렸다. 그라우의 100일 정권 때 추진했던 혁명적이었던 정책을 그대로 추구했기 때문이다. 젊은 그들은 정당 사무소를 쿠바 권투 영웅의 도장을 빌려 차렸다. 권투 도장을 당 사무소로 정한 것은 “부패와 정치공작을 녹아웃 시킬 탄탄한 혁명 근육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구호는 “돈을 보면 수치를 먼저 생각한다Vergüenza contra dinero”였고 빗자루를 정당의 상징으로 삼았다. 빗자루는 부패를 쓸어버리겠다는 그들의 정치 비전을 문맹이 대다수인 민중들에게 쉽고 생생하게 보여 주었다. 민중들은 대문에 빗자루를 내걸었고, 베란다에 빗자루를 들고나와 응원했고, 빗자루를 들고 정당 행사에 참석했다. 치바스가 출마한 1948년 대통령 선거 연설에 6만 군중이 모여 환호했고, 수천의 빗자루가 펄럭이는 깃발처럼 하늘을 가렸다. 선거가 아직 남았지만, 민중들 사이에서는 치바스가 이미 당선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까지 돌았다. 바티스타가 속한 당 프리오 후보가 치바스에게 총리직을 포함한 내각의 절반을 정통당에 내주는 조건의 연정 제안이 있었으나 치바스는 거절했다. 선거는 졌어도 정통당이 거둔 성과는 놀라웠다. 언론은 ‘돈을 뿌리지 않은 정당이 거둔 이 성과는 기적이자 몇 년 안에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날 조짐’이라고 했고 미국 언론도 ‘위대한 도덕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선거는 끝났어도 치바스의 라디오 방송은 계속되었다. 부패한 자라면 누구든 거침없이 고발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프리오 대통령에게도 ‘병원과 도로를 건설할 돈은 없다면서 당신은 어떻게 농장을 몇 개씩 사들일 수 있었는지 설명하라’라고 했다. 화물차에 마약을 가득 싣고 비밀 경찰 수장 앞에서 버젓이 거래하다 체포된 세계적인 마약 거래상을 왜 곧바로 풀어주었는지도 설명하라고 따져 물었다. 경찰은 수시로 그를 연행했고 방송도 자주 송출 금지당했다. 그러나 그가 연행될 때마다 미디어에 크게 실린 그의 체포된 장면을 담은 사진은 오히려 치바오의 정치적 메시지의 볼륨을 증폭시키는 꼴이었다. 드물었지만 돈에 매수되지 않는 언론도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치바스는 새로운 스타일로 정치를 하는 젊은 개혁주의자였다. 그는 늘 “나는 고발한다.”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고, 정권의 부패를 비판할 때마다 고발한다고 했다. “나는 고발한다”라는 짧은 한마디는 그의 정치를 상징하는 태그라인이 되었다. 젊은 피델은 귀에 쏙쏙 박히는 이 쉬운 태그라인을 귀담아 두었다. 1952년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그도 유세장에서 이 짧은 문장을 구호처럼 즐겨 썼고 “나는 고발한다”라는 멘트는 젊은 정치인 피델을 상징하는 슬로건이 되었다. 이 구호가 유행하자 ‘고발’은 현상이 되었다. 취임하는 날 중앙은행에 들어가 돈을 들고나온 교육부 장관을 비롯해 많은 관료들을 시민들이 고발했다. 정통당에는 익명 제보자들이 줄을 이었고, 비리를 입증하는 증거 자료들을 어느 골목 전봇대 아래 놓아두었다는 쪽지가 사무실 벽에 붙었다. 대다수 판사들은 그렇게 제출된 책상 가득 쌓인 자료들을 증거로 채택해 주지 않았지만 간혹 증거를 받아주는 판사도 이제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돈을 보거든 수치를 먼저 생각하라'는 구호로 부패를 비판한 치바스는 이미 국민들에게 대통령이나 다름없었다.

  1951년 8월. 치바스는 다음 해에 치러질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라디오는 여전히 그의 정치와 선거의 중심이었고, 부패 척결과 함께 헌법적 절차와 수단을 활용한 민주적 정권교체를 주장한 그의 연설에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열광했다. 연설은 강렬했고 전직 대통령은 물론 부패한 현직 대통령도, 학교를 짓지 않는 교육부 장관도 공격했다. 자신이 고발한 교육부 장관의 부정부패와 관련된 증거를 공개하기로 한 날 서류 가방을 들고 스튜디오에 들어선 그가 방송 중에 여느 때처럼 목소리를 높여 “경제적 독립과 정치적 자유, 그리고 사회 정의를 위하여…. 사기꾼 정권을 모두 쓸어버립시다. 쿠바 민중들이여. 일어나 행동합시다. 쿠바 민중들이여 잠에서 깨어납시다. 이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며 외치더니 가방을 열어 총을 꺼내 자기를 쏘았다. 그러나 하필 그가 방아쇠를 당긴 그 짧은 순간에 커피 광고가 막 시작했다. 생방송일지라도 그의 연설이 길어지자 라디오 방송 편성 담당자가 커피 광고가 실린 테이프로 막 갈아 끼운 참이었다. 스튜디오는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방송에는 총소리 대신 정신을 깨워주는 커피를 마시라는 광고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치바스의 죽음을 알게된 사람들은 치바스가 생방송 중에 자신의 주장을 외치고 죽는 것이 자기 죽음을 세상에 가장 충격적으로 알리는 방법이라 생각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총소리가 라이브 방송으로 전파를 타지는 못했어도 그가 방송 도중에 자살했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변화를 바라는 국민으로서는 다 이겨놓은 선거를 이번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치바스가 스스로 치워버린 셈이 되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은 거의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다. 3만 명이 넘게 운집한 장례 행렬을 바라보는 국민은 비통해했다. 치바스의 성급한 죽음은 다시 부패한 정권을 탄생하게 했다. 치바스는 죽었지만, 쿠바의 민주화를 향한 큰 상징으로 남았다. 사회 민주화는 1950년대 쿠바 사회를 관통한 주제어가 되었고, 그의 죽음은 젊은 정치 신인 피델 카스트로가 떠오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과감하고 급진적인 성향의 피델은 카리스마와 강렬한 리더십 그리고 연설로 대중의 마음을 휘어잡는 라디오 스타였던 치바스를 눈여겨 보았었다. 피델은 이제는 권력이 라디오 방송과 마이크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확인했다. 피델은 매스미디어 정치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치바스에게 정치를 배운 청년 정치인 피델 카스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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