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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2. 2024

15. 그란마

#322 홀리데이

카지노

   메이어 랜스키는 마이애미의 카지노와 마약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 쿠바에서 번 돈을 마이애미에서 세탁했다. 마이애미는 쿠바의 카지노가 세워준 도시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이권이 커지자 마피아들끼리 경쟁이 심해졌고 범죄도 빈발했다. 1950년 미국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도박업을 불법으로 금지했다. 그 많은 슬롯머신이 쓸모가 없어졌다. 메이어 랜스키는 슬롯머신을 아바나로 실어 보냈다. 슬롯머신을 따라온 마이애미의 폭력배들도 쿠바 전국에 배치되었다. 미국 신문에는 ‘미국에서는 못하게 된 도박, 이제 아바나에서 마음껏 즐겨요’라는 헤드 카피가 올려진 광고가 매일 실렸다. 카지노 장비가 도착하기 전에 랜스키는 사업 환경부터 다시 정비했다. 우선 미덥지 않은 꼭두각시인 프리오 정권을 갈아치우고, 호흡이 잘 맞고 철권통치에 유능함을 보여 주었던 바티스타를 쿠바 대통령으로 다시 세우기로 했다. 바티스타만이 쿠바와 그의 슬롯머신 사업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바나 카지노의 홍보물


홀리데이

  1950년에 마이애미에서 아바나행 비행기가 주 70편 이상 떴고, 크루즈 여행객 모집 광고가 신문의 광고면을 채웠다. 장차 미국의 대통령이 될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존 F. 케네디 같은 주목받는 정치인들이 골프를 즐기러 쿠바에 왔고, 브로드웨이 최고 가수 조세핀 베이커, 냇 킹 콜, 사라 본, 토니 마틴, 캡 캘러웨이 같은 스타들이 아바나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했다. 말론 브랜도, 윈스턴 처칠 같은 이들이 나시오날 호텔에서 휴가를 즐겼고, TV쇼에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인터뷰했다. 유명인들의 뒤꽁무니를 찍어 방송하는 뉴욕의 텔레비전 방송은 유명인들의 쿠바 여행을 스케치해 거의 매일 저녁 내보냈다.      

  그 무렵 쿠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인구당 자동차와 전화 소유율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쿠바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클라이버Kleiber,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카라얀Karayan, 빌야 로보스Villa-lLobos같은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아티스트들을 초빙해서 연주했고 쿠바 음악원은 피아니스트 추초 발데스Chucho Vâldes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연주자들도 많이 배출했을 만큼 수준이 높았다. 아바나는 전 세계에서 카바레와 나이트클럽, 소셜클럽을 가장 많이 보유한 도시이기도 했다. 고대의 카디스가 그랬듯이 아바나의 도박장 옆에도 매음굴이 있었고, 밤늦도록 불 밝힌 바에서는 밴드가 연주했다. 아바나에서는 누구라도 들뜨지 않을 수 없었다. 토요일 아침 마이애미나 뉴욕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아바나에 내리면 배불뚝이 중년 남자들은 곧장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아바나 댄스 교습소를 찾아 맘보와 탱고 춤을 배웠다. 12살짜리 소녀와 맘보 춤을 추고 나면 쪽문을 지나 연결된 매음 방으로 들어갔다. 카페에서는 꼬장꼬장한 중년 부인들이 레이스 달린 긴 차양의 모자와 흰 긴소매 장갑을 벗어 가방에 접어 담고 잘생긴 쿠바 크리오요 남자를 살피고 있었다. ‘홀리데이’를 함께 보낼 애인을 고르는 중이었다. 포르노 쇼를 하는 나이트클럽, 포르노 영화를 틀어주는 전용 극장들도 성업했다. 1950년대에 아바나에서 섹스 산업은 크게 팽창해 나시오날 호텔까지 길게 뻗은 말레콘을 따라 형성된 뒷골목에는 집창촌이 250곳이 넘었다. 매일 밤 몸을 파는 소녀 물라토들이 아바나에서만 1만 명이 넘었다. 돈이 있는 미국인은 코카인을, 돈이 없는 미국인은 마리화나를 피웠다. 미국과 달리 아바나에서는 그것들을 구멍가게에서 담배 사듯 쉽게 살 수 있었다. 1센트짜리 코인 하나만 던져주면 길거리 스크램블로 식사를 대신할 수 있었다. 미국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곳. 가족도, 이웃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와는 마주칠 리 없고, 소문이 날 가능성도 전혀 없는 곳 쿠바. 남자든 여자든 신체적으로 도덕적으로 마음껏 해이해질 수 있는 곳이 아바나였다. 미국의 홀리데이 유흥지 아바나는 미국의 화장실이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 미국인은 쿠바에서 한 해 300만 달러 넘게 썼다. 미국인들이 푸는 달러를 받으려고 멕시코와 카리브해 국가들도 경쟁적으로 도박산업에 뛰어들었다.


  아바나의 빈부격차는 극심했다. 부자와 빈자는 한 도시에서 살아도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사는 이방인이었다. 인구의 40%가 시골에 살았지만, 시골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을 마친 어린이를 찾아보기 어려웠을 만큼 가난과 문맹은 극심했다. 도시와 농촌을 모두 합쳐 경제 활동 가능 인구 삼분의 일 이상이 실업 상태였고, 사탕수수를 수확해 가공하는 겨울철 4개월 정도만 일할 수 있었다. 일하는 동안에도 임금 수준은 매우 낮았고, 수확이 끝나고 나면 나머지 기간에는 돈을 벌 길이 없었다.      


  그런 비참한 현실을 지켜보는 라틴아메리카의 젊은이들에게 미국은 분노의 대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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