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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Feb 25. 2024

15. 그란마

#336 단절

단절

  워싱턴과 쿠바 사이에는 적의가 쌓여갔다. 쿠바는 UN 같은 국제회의에서 이제껏 한반도 없었을 강도로 미국을 비난했고, 미국에 반대표를 던지는 소련과 동조하는 투표를 했다. 마침내 1961년 1월 3일 아이젠하워가 ‘미국은 인내하는데 그 한계를 넘었다. 여기까지가 미국의 한계다’고 말하면서 쿠바와의 국교를 단절하고 아바나 주재 미국 대사관을 폐쇄했다. 식품과 의약품을 제외한 모든 상품을 쿠바에 수출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까지 오는데 단 2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미국은 60년 넘게 쿠바에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쿠바에서 많은 이익을 가져가 왔다. 미국의 이익을 중시하는 워싱턴은 쿠바를 식민지와 다름없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휘둘러왔다. 혁명은 그런 미국의 이익을 적대시하고 위협했다. 미국이 혁명 정부에 적대감을 분명히 드러낼수록 혁명 정부는 애국주의와 반미 반 제국주의 감정으로 과격한 수단들을 유지해 갔다. 쿠바는  라틴아메리카 여러 국가에 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아메리카의 병사들’을 파견했고 주요 사회주의 세력과 외교적, 경제적 관계를 수립해 감으로써 미국에 대응했다. 미국은 쿠바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미국은 개혁적인 혁명 정부를 위협으로 일관해 대응했고 결과적으로 쿠바가 더 급진적이고 빠른 속도로 사회를 개혁하게 내몰았다. 절제하지 못한 적대감에 쌓인 맨몸의 다윗과 굴종하지 않으려는 식민지에 큰 창을 휘두르는 골리앗은 단 2년 만에 최악의 관계가 되었다. 역사가들은 혁명의 시작부터 갈등과 투쟁의 관계는 피할 수 없는 필연이었다고 본다. 오랜 세월 쿠바는 미국에 독립을 빼앗긴 채 착취당하고 미국의 화장실과 다름없는 처지로 지내왔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나라를 빼앗은 상대를 적으로 느끼고 경계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60년 동안 쿠바에서 막대한 이익을 취해 온 미국이 쿠바에 영향력을 잃게 되자 스스로 적개심을 증폭했다. 그런 양자 사이에서 대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대결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미국이 적개심을 드러내자 쿠바는 과격하고 급진적인 수단으로 대응했다. 이것은 주권을 지키기 위한 최초의 주권 행사이자 쿠바가 지금 진짜로 독립된 공화국임을 입증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500년 동안 식민 지배를 당하면서도 굴종하지 않는 역사를 실현하고자 투쟁했던 쿠바의 꿈이었다.

앙골라 혁명을 위해 파병된 쿠바 혁명군. 쿠바는 제3세계 혁명 전파를 위해 군사를 파견했다. 체 게바라는 아프리카에서 반군을 지도하다 포기하고 볼리비아로 건너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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