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산티아고

2. 산티아고

#034 엘 사비오

by 조이진

3개의 이베리아

13세기 초에 이미 기독교 카스티야 왕국이 이슬람 안달루시아를 정복했다. 그라나다만이 이슬람의 마지막 소왕국으로 남았다. 그라나다의 모슬렘 타이파가 카스티야 왕의 신하가 되기로 서약했기에 그나마 존속할 수 있었다. 이슬람 세력을 축출한 스페인은 두 갈래의 길을 갔다.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는 피레네산맥 너머 유럽과 더욱 가까이 가고자 했다. 이미 카탈루냐는 안달루시아보다는 프랑스와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더 연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아랍의 문화를 배타하고 기독교 중심으로 개편해 갔다. 반면 카스티야는 달랐다. 이슬람 세력을 축출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아랍의 것을 취했다. 현명 왕 엘 사비오El sabio라 불리는 알폰소 10세는 모슬렘과 유대인 뮤지션들을 내쫓지 않았다. 현명한 왕답게 엘 사비오는 우마야드 왕조 때부터 이어오던 톨레랑스를 유지했다. 오히려 그들을 설득해서 떠나지 않게 붙잡고 포용했다. 옥시타니아에서 온 음유시인 트로바도르들에는 작품 활동과 생활을 후원하기까지 했다. 그 시기에 스페인에서는 많은 아랍의 저작물들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단지 음악만이 아니었다. 과학, 철학, 신학, 법률, 심지어는 탈무드와 코란까지도 엘 사비오의 지시로 왕성하게 번역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중세 시와 음악도 모두 수집하고 정리했다. 그는 글쓰기를 장려했는데 그가 정리한 문장들을 평민들이 일상어로 쓰도록 권장했다. 현명왕의 이 정책은 뒷날 카스티야 말이 스페인어의 표준이 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 그는 법률도 정비했다. 무엇보다도 교황이 이 왕국의 정치에 영향을 미칠 수 없게 했다.

엘 사비오 알폰소 10세


그러나 이 위대한 왕 엘 사비오가 만든 법률에는 불행의 씨앗이 들어있었다. 이 법은 유대인을 사탄의 협력자이자 곧 다가올 종말의 마지막 날에 심판받을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했다. 그 법은 이슬람이나 유대교를 믿었다가 다시 기독교로 되돌아온 자들을 모두 산 채로 불태워 죽일 수 있게 했다. 교황의 정치 간섭을 배제했지만, 악마 사탄이라 부르는 이교도나 다른 기독교 종파에 대한 로마 교황의 압박만큼은 이겨낼 수 없었다. 로마가톨릭이 아니면 모두 마귀였다. 이베리아에서 톨레랑스는 마감되고 있었다. 대신 사람을 태운 재로 뒤덮일 이베리아의 먼 하늘은 어두운 구름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이슬람을 내보낸 이베리아는 세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반도의 서쪽에 포르투갈, 피레네산맥 남쪽에서 마드리드를 거쳐 세비야까지 이베리아의 가운데를 차지한 카스티야-레온 왕국이, 반도의 동북쪽 해안가를 중심으로 카탈루냐-발렌시아-아라곤 연합 이렇게 3개의 정치체로 분리되었다. 문학을 좋아한 현명왕은 카디스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제 이슬람 세력은 알람브라가 있는 그라나다에만 남았다. 이때부터 약 200년 동안 이슬람 문화는 이베리아에 마지막으로 남겨줄 석류꽃 알람브라를 지었다. 궁은 완성되었으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쓸쓸함과 적막이 늘 성을 짓눌렀다. 이 궁에서 아랍인들은 곡을 연주해보지도 못했다. 뮤지션을 포함해 대부분 아랍인이 이미 이베리아의 남쪽 문 지브롤터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떠났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이 아름다운 궁전을 이베리아를 지배했던 역사에 대한 배상금으로 남기고 쓸쓸히 떠났다.


이베리아는 상그리아다. 수천 년 동안 이곳을 거쳐 간 여러 민족의 피가 뒤섞였다. 반도는 끝이기도 하되 시작이기도 하다. 이베리아는 반도 역사의 전형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맨 처음 이 땅에 온 이바르인부터 켈트인,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카르타고인, 로마인, 반달족, 비지 고트족, 아랍인, 유대인, 북아프리카인 등 여러 인종이 하나의 잔 안에서 숙성되었다. 이것이 첫 번째 잔에 담긴 상그리아다. 그러나 스페인은 상그리아에 담긴 서로 다른 과일들처럼 지역별로 나뉘어 있고 또다시 분리되고 싶어 한다. 섞인 듯해 보이지만 섞여 있지 않다. 그것이 두 번째 잔에 담긴 상그리아의 맛이다. 마지막 상그리라 잔에는 이 서로 섞이지 않은 스페인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들이 들어있다. 돈키호테와 산초다. 절대 이룰 수 없는 망상을 좇는 광신적 기독교도 돈키호테, 황금과 섬의 주인이 되어 노예를 거느리고 싶어 하는 가난한 속물 산초. 이 두 얼굴이 스페인의 얼굴이다. 돈키호테이기도 하고 산초이기도 한 카스티야 스페인이 망상과 황금을 좇아 이베리아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유라시아 땅의 끝 이베리아가 대서양 바다 건너 미지의 대륙으로 떠나는 출발점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베리아는 반도다.

다운로드 (11).jpeg 상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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