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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진 Nov 03. 2023

3. 엘 미나

#035. 포르투갈

포르투갈

  햇볕을 받은 빌라들이 하얗게 반짝이는 골목마다 재스민 향기가 진하고 달콤하다. 항구의 골목은 로마와 스페인, 아프리카, 이슬람, 지중해까지 여러 색이 뒤섞였다. 이 나라 이름에 있는 '포르투Portu'는 항구라는 뜻이다. 이 도시는 리스본에 이어 포르투갈에서 두 번째로 크다. 도로Douro 강이 대서양을 만나 항구가 되었다. 포르투갈은 대서양 바다를 따라 길게 뻗었다. 대서양을 바라보는 좋은 항구는 여럿이고 유럽에도 좋은 항구는 여럿인데 유독 포르투갈 북쪽의 이 작은 항구만 항구portu라는 이름을 지녔다. 이 도시는 포도주 저장고로 쓰는 동굴이 지금도 많다. 도로 강은 스페인 북동쪽 피레네 남쪽 자락 바스크 지역에서 발원해 900km가 넘게 흐른다. 이베리아를 서쪽으로 관통하는 긴 강은 높은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고 돌아 포르투에 이른다. 강을 따라 상류 양쪽으로 로마 때부터 비탈을 깎아 만든 계단식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졌다. 와인 셀라도 강을 따라 촘촘하게 산비탈 동굴을 파고들었다. 높은 산자락은 공기의 흐름을 막아 동굴에 독특한 성질의 공기로 만들고, 어두운 동굴 안에서 흙과 풀과 나무와 세월 내음이 서로 끈끈하게 들러붙었다. 이 셀라가 포르투 와인을 어둡고 차갑되 달큼한 맛을 만들었다. 로마 사람들은 그런 포르투 와인을 최고로 쳤고 로마 사람들이 마실 최고 와인을 실어내는 항구여서 항구라고 불렀다. 그래서 포르투갈이라는 이름은 좋은 와인을 실어내는 항구가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이 강에서 와인이 만들어진 지 2,000년이 더 되었다. 로마가 와인을 실어 가기 전에도 이 땅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바르 사람들이다. 도로 강 이바르 사람들도 고인돌로 무덤을 덮었다. 고인돌은 밝족의 지문이다. 이바르가 살던 땅에 켈트족이 들어왔다. 사람과 사람이 섞였다. 그래서 지금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포르투 고을을 메운 6월의 재스민은 로마 사람들이 심은 꽃이 아니다. 모슬렘이 들여온 향기다. 오렌지꽃도 그렇다. 사람은 올 때 꽃도 향기도 함께 실어 왔다. 그런 꽃과 열매는 아랍이 원산지다. 이 땅에서도 여러 꽃이 함께 섞이고 어울려 피었다. 아름다움은 그런 데서 맺히는 달콤하고 시큼한 열매였다. 포르투갈에 피어난 여러 꽃 중에서도 500년을 머무른 이슬람의 꽃향기가 가장 진했다.      

포르투갈 바이야오 지방 고인돌 무덤. 이베리아와 남프랑스의 피레네 산맥 아랫턱 곳곳에 고인돌 문화가 있다. 공통적으로 무덤 속에서 5,000여년전의 인골이 발견되었다./위키피디아

  스페인은 아직 레콘키스타가 한창이었고 모슬렘 손아귀에 쥔 예루살렘을 빼앗아 보겠다는 서유럽의 십자군 원정은 번번이 패배로 끝났다. 기사들도 교황도  모든 면에서 월등하게 앞선 문화와 실크로드 교역의 길목이 만들어주는 재물, 그리고 아름다운 가이나들의 육신을 탐하는 육욕으로 헛된 힘만 쓰고 쇠잔해 있었다. 유럽과 로마 가톨릭이 풍차를 성으로 알고 달려들어 몸이 부서지는 초라한 몰골의 슬픈 돈키호테들이었고 탐욕의 속물 산초들이었다. 패배자들에게 남은 것은 적대감과 분노였다. 돈키호테가 뱉어내는 무어, 모슬렘, 사라센 놈들 같은 말은 불타는 적의와 이길 수 없는 자들의 열패감이었다. 패할수록 더 사나웠고, 이교도를 죽이고자 하는 가학성이 강해졌다.      


  끄트머리는 열려있어서 좋다. 유라시아의 서쪽 끝 포르투갈은 대서양을 바라보며 열려있었고, 이 사람들이 큰 바다로 나갈 때 바닷길을 가로 막아설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 포르투갈이 레콘키스타를 스페인보다 300년 먼저 마무리 지었다. 남들보다 빨리 안정을 찾은 포르투갈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새로운 에너지로 끓었다.


  변방의 포르투갈이 스페인과 달리 그렇게 빨리 이슬람을 축출할 수 있었던 것은 엉뚱한 사건 때문이었다. 영국에서 출발한 십자군 부대가 풍랑을 만나 포르투갈 해안에 피신하는 일이 생겼다. 지브롤터를 지나 지중해를 항해해 이스라엘에 상륙해서 모슬렘과 싸우려고 비장하게 길을 나섰는데, 배는 부서지고 포르투 항에 발이 묶였다. 모슬렘과 싸우려 십자군에 뛰어든 건 돈 때문이었는데 교황은 이교도들의 땅을 차지하면 약탈해도 좋다고 약속했다. 그런 예루살렘은 약속의 땅이었다. 이들은 군인이기도 하고 또 상인이기도 했다. 말이 십자군이지 실상은 해적이나 다름없는 영국인들이 항구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포르투갈 사람들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다. 오래 머무르면 약탈자로 변할 터였다. 포르투갈 왕이 영국인들에게 포르투갈을 차지한 모슬렘을 상대로 싸워 달라고 요청했다. 모슬렘을 쫓아내고 난 땅에서 무제한 약탈할 수 있게 하겠다고도 약속했다. 약탈물에는 지중해 최고 상품인 아름답고 탐스러운 가이나들도 포함되었다. 동기가 분명해졌으니 싸움에 의지도 컸다. 전투는 승리했다. 영국인 십자군들이 포르투갈에서 모슬렘 소유의 집과 기물, 가이나들을 움켜쥐었다. 이룰 것을 이루었으니 굳이 또 원정을 떠날 이유는 없었다. 많은 이들이 다시 떠나지 않고 정착했다. 예루살렘 성지를 향해 다시 배를 탄 자들은 아주 적었다. 이렇게 해서 포르투갈은 스페인보다 빨리 통일된 기독교 국가로 자리 잡았다. 1385년 리스본에서도 혁명이 일어났다. 상인길드가 자본을 연결고리 삼아 신흥 종교 귀족과 손을 잡았다. 신흥 종교 귀족이란 곧 수도회 기사단을 말한다. 중세에는 갖가지 이름의 기사단이 많았다. 종교의 이름으로 정치를 하던 시대였으니 기사단은 일종의 정당이었다. 기사단이 유럽 정당의 원조였다. 신흥 어비스Avis 기사단이 반란을 일으켰고, 민중들도 구세력인 봉건 귀족과 왕권, 교회의 착취를 견디지 못해 이에 동조했다. 신세력과 구세력끼리 싸우는 내전에서 민중들은 신흥 상인 세력을 지지했다. 이 사건은 뒷날에 잇달아 일어나는 부르주아 혁명과 성격이 비슷했다. 마르크스가 부르주아 혁명이라 평가한 프랑스 대혁명보다 자그마치 300년 전에 일어났다. 이 왕조가 뒷날 아프리카, 아시아, 브라질을 식민 지배한 어비스 왕조다. 어비스 왕가는 상인길드와 사이가 좋았다. 유라시아 대륙 서쪽 끄트머리 땅에서 이들이 돈을 찾아 나갈 수 있는 곳은 오직 바다뿐이었다. 에스파냐보다 자그마치 350년이나 빨리 이슬람과의 싸움을 마무리 지었지만, 에스파냐에 덤비기에는 체급이 되지 못했다. 밖으로 뻗어나가지 못하면 군인이자 상인인 자들이 그 칼을 왕조를 향해 휘두를 수도 있었다. 새로운 땅을 찾아야 했다. 몰락한 구세력 귀족들을 바깥으로 이주시켜야 했다. 그 땅에서 새로 성을 만들고 군사를 지휘하여 현지인을 농노 삼아 영주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야 했다. 포르투갈이 새로운 통치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교역으로 돈만 벌어왔지만 이제 이교도의 땅을 지배하고 그 땅에 자국민을 이주, 정착시켜 국왕의 땅을 넓힌다는 새로운 생각을 찾아냈다. 스키피오 히스파니아가 이베리아에서 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 무렵 또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동쪽에서 일어났다. 1453년에 오스만튀르크가 비잔티움 제국을 멸망시켰다. 사실은 이미 그 전부터 숨통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예루살렘은 힘에 부치는 모슬렘이 버티고 있으니 감히 엄두가 안 났고, 콘스탄티노플은 만만했다. 유럽 십자군들이 같은 같은 기독교를 믿는 동로마 제국을 약탈했다. 돈이라는 신을 숭상한 기독교도 십자군은 돈이라는 신을 위해 파병한 것이었고, 기독교 수호는 허울이었으므로 우물쭈물할 것도 없었다. 예루살렘이라는 꿩 대신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닭으로 사냥감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십자군의 침략으로 동로마 제국은 명을 다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럴 때 오스만튀르크가 그 힘의 공백을 차지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오스만튀르크/위키피디아

동로마 제국 멸망은 유럽의 경제 흐름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중세 유럽 경제는 이탈리아가 중심이었다. 이탈리아 상인들은 동쪽에서 산물을 수입해와 유럽 전역에 재판매해서 이익을 냈다. 오스만튀르크가 동로마 제국을 삼켰으니 돈의 원천이 이교도 세력에게 막혔다. 이런 이유로 돈키호테도 사라센 놈들이라며 튀르크 사람들을 증오했다. 튀르크는 동북아시아 만주벌판을 떠난 돌궐족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말을 타고 왔으니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유럽은 사라센을 거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새 길을 찾아야 했다.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자본가들이 서쪽으로 가기 위해 지중해의 끝 이베리아로 근거지를 옮겨왔다. 그중에서도 일찌감치 레콘키스타를 끝내 정치적으로 안정된 포르투갈을 택했다. 그 땅의 포르투 와인도 맛이 좋았다. 대서양을 향해 열린 리스본 같은 항구가 있어서 포르투갈은 새로운 근거지로 장점이 많았다. 막아서는 자도 없고, 이윤을 나눠 갖자는 자도 없는 바닷길은 더욱 좋았다. 돈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카디스와 세우타처럼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 바깥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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