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도미니 카니스

#065. 이달고

by 조이진

이달고

스페인은 온갖 종류의 귀족들이 많은 나라였다. 오랜 세월 이슬람과 전쟁을 치른 탓이다. 당시 스페인 인구 중 10%가 자칭 귀족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는 1% 정도였다.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같은 높은 신분의 귀족들이야 호화롭게 살았지만, 작위도 없는 하급 귀족 이달고 숫자는 아주 많았다. 바스크는 피레네에서 모슬렘을 축출하고 왕국을 일으킬 때 싸운 군인들에게 하급 귀족으로 대우하고 인센티브로 세금을 면제해 주는 혜택을 주었다. 4대 이상이 모슬렘과 싸운 경력이 있어야 이달고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달고는 모슬렘을 무찌른 용사의 가문 자손이라는 개념으로 통했고, 이단으로부터 기독교 세계를 수호한 집안 출신이라는 명예가 주어졌다. 돈키호테가 이달고의 전형이다. 그의 정신세계를 가득 채운 책임 의식과 자부심은 이달고 가문의 자손이라는 피에 바탕을 두었다. 세금 면제와 각종 혜택이 많다 보니 이달고가 되기 위해 너도나도 레콘키스타에 참여했고, 수백 년 전쟁을 치르면서 이들이 지나치게 많아지다 보니 자원입대가 아니라 혈통으로 인정된 이달고에게만 참전할 권리를 인정해 줄 정도가 되었다. 이달고는 코르테Corte라는 왕이 주관하는 회의에 마을과 도시의 대표자 자격으로 참여할 수도 있었다. 이달고가 국방과 치안, 정치 같은 것을 담당한 신분이었으므로 꽤 중요한 역할을 한 계급이었고, 기독교를 지켜낸 투사의 자손이라는 존경도 받았다. 그러나 이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다. 땅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리저리 떠다녔다. 귀족들만의 권리인 쇠갑옷과 무구를 갖출 권리가 있기는 했지만 매우 가난했으므로 온몸과 얼굴을 덮은 쇠갑옷은 없이 낡은 기사복을 입고 다녀 초라했다. 말이나 칼을 살 돈도 없고, 가문을 상징한 문양을 새긴 방패도 없었다.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수식할 때 ‘초라한 몰골의 기사’라고 한 이유고, 그의 로시난테가 비쩍 말라 비틀거리는 늙은 말인 이유고, 종자가 없어 산초를 섭외했으되 눈치 보는 주인 행세하는 설정이 이달고의 비루한 처지를 잘 보여준다. 어느 날 알람브라에서 마지막 모슬렘이 떠났다. 레콘키스타가 끝났을 때 이달고들은 직업을 잃었다.


이사벨라의 카스티야와 페르디난드의 아라곤 연합군이 포르투갈과 벌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승리했다. 이제 스페인 통일의 조건은 갖췄지만 갈 길은 멀었다. 아직 안달루시아에는 모슬렘이 남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레콘키스타로 땅을 되찾기는 했어도 오랜 세월 동안 나라는 분열된 상태였다. 곳곳에서 반란이 있었고, 왕권은 도전받았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민중의 재산을 갈취했고, 엔코미엔다의 영주들은 독립적이어서 왕권의 간섭을 거부했다. 귀족들은 중앙권력을 호시탐탐 노렸다. 도적 떼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살인과 강도, 강간이 횡행했으니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었다. 역병도 잦았다. 나라를 어떻게 안정하고 중앙 통치를 이룰 것인가가 국왕 부부의 과제였다. 더군다나 땅덩이로는 절반도 안 되는 포르투갈에 아프리카 연안 독점권을 통째로 인정해 준 마당이었다. 부부는 사제단 또는 형제단을 눈여겨보았다. 형제단은 12세기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자들을 도적 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템플 기사단은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하는 여행자들을 보호하겠다고 이 형제단을 본떠 만든 조직이었다.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했으므로 영주들도 너도나도 형제단을 만들었다. 스페인 방방곡곡에 '성스러운 형제단'이 우후죽순이었다. 형제단들이 즉결 처분권을 포함해 상당한 권한을 가졌다. 재판은 처분한 뒤에 열어도 그만이었다.

성 형제단Santa Hermanidad. 이단을 처단하는 형제단은 성인이라는 칭호로 존중받았다.


이사벨라가 형제단을 확대 개편해서 왕실을 지키고 나라를 다스리는 경찰 기구로 삼았다. 이사벨라는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모든 자치 지역은 의무적으로 한 달 이내에 형제단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인구 백 명당 한 명의 형제단을 선임하라고 했다. 교황이 만든 경찰이 왕을 위해 복무하는 경찰로 다시 태어났다. 귀족들이 이런 하급 일을 할 리는 없었으니, 대개 농부 같은 하층민이 선발되었다. 귀족들의 실수였다. 농부 형제단이 귀족을 감시했다. 이단인지 아닌지만 감시하면 되었다. 그가 평소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영주였다면 그는 틀림없이 이단으로 지목되었다. 더욱이 그가 국왕을 비판한 적이 있다면 그는 거물급 이단으로 고발되었다. 모슬렘과 싸워 영지를 차지한 작위 높은 귀족도 아닌 주제에 장사로 큰돈을 벌어 부자로 사는 상인들도 잡아들여 심문했다. 형제단이 귀족 가문과 상인길드 같은 영향력 있는 집단들을 붕괴시켰다. 정치적으로는 국왕의 위상을 강화해 주었고, 몰수한 재산은 모두 국왕 개인의 것이었으니, 페르디난드의 혼수 빚을 갚는 데도 쓰였고, 추기경 같은 고위 성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을 뒷받침했다. 페르디난드는 이들 형제단 또는 사제단의 공로를 치하했고, 많은 형제 단원을 새로 이달고로 인정했다. 형제단은 특히 아라곤에서 악명을 날렸다. 아라곤은 지역 귀족의 자치권이 유난히도 강한 곳이다. 왕이 귀족의 땅에 군인을 들여보낼 수도 없을 만큼 토호들의 세력은 강했다. 사실상 독립적인 군장의 왕이었다. 페르디난드는 형제단을 통해서 앓던 이를 일거에 뺄 수 있었다.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에게 형제단은 왕권 강화의 종요로운 수단으로 급부상했다. 국왕의 권력이 커질수록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팽대한 관료기구와 국왕 직속의 상비군을 만들어야 했다. 이들을 유지할 돈이 필요했다. 형제단이 귀족들을 제거하는 데도 유용했지만, 귀족들에게 세금을 걷어내는데도 효용이 좋았다. 형제단은 그렇게 왕의 통치력을 강화하고 유지해 주었다. 형제단은 가톨릭 교단에서도 대대적으로 환영받았다. 스페인 추기경은 그들을 성 형제단Santa Hermanidad라고 시성 했다. 가톨릭 성인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왕과 사제들, 형제단의 권력이 서로 기대고 맞물려 힘을 발휘했다. 왕권에 도전적인 영주와 귀족들은 이때 뿌리가 뽑혔다. 이 자경단의 활동으로 스페인에서 가장 빨리 절대군주제의 기틀이 만들어졌다. 결혼만으로는 통일의 필요조건이었지만 이제 충분조건도 충족되었다. 진정한 스페인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로써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근대국가가 형성되었다. 스페인의 성공 사례를 본 다른 유럽 왕들이 형제단을 운영했고, 유럽에 절대군주제의 시대가 열렸다. 공포가 역사를 진전시켰다.

다윗을 상징하는 배지. 이사벨라의 '성스러운 형제단이 개발했다.

형제단의 성과에는 주목할 것이 더 있다. 모든 유대인에게 유대 혈통임을 표식 하는 붉은 배지badge를 옷에 부착하도록 의무화했다. 유대인인 줄 알지 못한 기독교인이 자칫 유대인과 혼인 관계를 맺을까 로마 교황이 걱정해 만들어낸 아이디어였다. 유대 ‘다윗의 별’은 스페인이 차별과 분리를 시각적으로 상징화한 디자인이었다. 이 디자인은 유럽에서 크게 성공했다. 다윗의 별은 히틀러 시대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다윗의 별도 페르디난드의 아라곤에서 처음으로 적용되었다. 게토라는 유대인 거주 구역도 이때 처음 만들어졌다. 세비야 게토는 2년 만에 허술하게 지어졌다. 8일 만에 이주하여야 했다. 집을 찾아 게토로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거리에서 살해되었다. 부유한 유대인들은 좁게 난 골목으로 가구를 가져가지 못했다. 살림살이를 내려놓아야 했다. 유대인이 떠난 큰 집은 이달고들이, 유대인이 남기고 간 가구는 가톨릭 형제단이 차지했다. 게토가 이들의 재산을 빼앗았고, 이들의 지위를 추락시켰다. 유대인은 수염을 깎지 못했다. 해가 지면 집 밖에 다니지 못했다. 유대인들의 식품을 파는 게토 바깥 시장에도 출입할 수도 없었고, 기독교인이 먹을 음식을 파는 장사도 할 수 없었다. 기독교인이 입을 옷을 파는 일도 금지되었다. 굶어 죽든지 아니면 “노고와 탄식”을 먹든지 선택해야 했다. 공직 진출도 막았다. 유대인 의사들은 기독교인들을 치료할 수 없었다. 먹고살 길이 막혔다. 유대인이 두각을 나타내던 음악과 예술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형제단 사제들이 심판할 이단 혐의자들은 엄청난 숫자였고, 그들 모두 고문받아야 할 대상자들이었다. 여자들은 강간으로 고문했다. 유대교 의식을 했거나 본 적이 있는 자, 또는 이단 행위를 했거나, 또는 했으리라 추측되는 자들을 30일 안으로 심문소에 고발해야 했다. “노고와 탄식”을 삼키는 등 정말 회개했음을 입증하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 아직 비밀리에 유대인 의식을 행하는 콘베르소의 이름을 대면 가장 확실하게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부모의 이름을 대는 아이들에게는 벌을 감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풀려나면 더러운 유대인의 자식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자랄 수 있었다. 30일 동안 아무도 고발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혹한 심문이 예고되어 있었다. 가톨릭 사제들은 살상하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죽이지는 않았고 다만 산 채로 불에 태웠다. 지옥 불이 따로 없었다. 히틀러와 나치가 한 짝이듯, 이사벨라와 가톨릭 사제단이 한 짝이었다. 이사벨라와 가톨릭 사제단이 스페인에서 행하고 익힌 대로 쿠바와 아메리카에서 원주민들에게 똑같이 했다. 외치는 구호도 같았다. “우리 하느님은 이것을 원하신다!”


종교재판이 사람만 죽이지는 않았다. 스페인어의 몸체가 되어준 아랍어를 불에 태웠다. 모슬렘은 스페인의 도시마다 도서관을 설치했었다. 그 도서관들에는 엄청난 양의 아랍어로 쓰인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1백만 권 이상의 책이 불에 태워졌다. 히브리어로 된 책들도 불더미에 들어갔다. 세르반테스는 약 100년 뒤인 1605년에 출간된 <돈키호테>를 통해 방대한 지식을 불에 태워버린 기독교와 사회 분위기를 냉소했다. 이런 대목이 문제가 되어 소설 <돈키호테>도 종교재판소의 엄격한 검열을 거친 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다. 이때 이단이나 신성모독으로 지목되었다면 원고는 불태워졌을 것이고, 세르반테스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백 년간 이베리아 음악을 대표해 온 악기 엘 우드가 이때 스페인에서 사라졌다. 모슬렘 문화를 상징했기 때문이었고, 이름도 아랍어였다. 종교재판으로 우드가 불태워졌으므로 남은 악기라고는 캐스터네츠와 드럼과 대롱 긴 나팔뿐이었다.


이달고와 사제로 구성된 형제단이 스페인에서 절대군주제를 만들어낸 일등 공신이었다. 그러나 절대군주의 위상이 확고해지니 이들의 역할이 필요 없어졌다. 광적인 기독교가 휩쓴 스페인에서 신의 개 도미니카누스들은 누구든 달려들어 물어뜯을 터였다. 페르디난드도 이사벨라도 더러운 피가 섞인 자들이었으므로 내심 이들이 근심거리였다. 그러던 차에 콜럼버스가 카리브에서 돌아왔다. 페르디난드가 도미니카누스들을 배에 태워 스페인 밖으로 내보냈다. 쿠바, 히스파니올라, 멕시코, 페루, 텍사스, 베네수엘라 등 아메리카 전역을 침탈한 스페인 상인 군인을 스페니야드Spainards라고 하는데, 이달고 형제단이 주축이었다. 광대한 식민지 침략군의 주류는 뿌리 깊은 스페인의 가톨릭 세력이었다. 이달고 형제단이 원주민 사회를 정벌하고 파괴한 전투 병력이자 그들을 이단으로 심문하여 산채로 불태워 죽일 행동 요원이었다. 식민지 구석구석 마을을 엔코미엔다로 나누어 이달고와 형제단 사제들이 차지했다. 가난하고 비루했던 이달고의 행색이 확 달라졌다. 신세계에서 이들은 잘 치장되고 안장도 올린 말을 탔다. 귀족의 성 같은 멋지고 부유한 집을 짓고 농장의 주인이 되었다. 숱한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들이 모국에서 겪은 가난과 멸시의 한을 식민지에서 풀었다.

Auto-de-Fe-presidido-por-Santo-Domingo-de-Guzman.png 성 형제단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종교재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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