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 프라이데이
프라이데이
팔로스항. 1492년 8월 3일. 러시아 정교회가 세상이 종말할 것으로 예측한 날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그날도 금요일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스페인을 떠나라는 시한은 3일이 지났다. 그라나다에서 심문과 종교재판이 시작되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심문은 믿을 수 없이 잔인했다. 팔로스는 그라나다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사람 태우는 칙칙한 냄새가 바닷바람에도 묻어있는 듯했다. 관용은 스스로 정체성에 대해 자신감있고 확인에 찬 사회가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지만 기독교 세계는 그렇지 못했다. 관용 대신 광신과 종교적 근본주의가 기독교 에스파냐 사회의 특징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오렌지 향기는 더는 풍기지 않았다. 동트기 전의 바다는 세상을 조용히 다독였다. 지금 그가 나아갈 바다는 또 한 번 세상과 세상을 연결할 테고, 미움의 힘이 부딪는 연결은 사람을 상처 낼 것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이웃과 이웃을 연결해 왔다. 혈액이든 피부색이든 종교든 언어든 사람의 것이라면 모두 이웃과 이웃이 섞이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이 만나 서로 상처를 낼지 새로운 음표로 만들어낼지는 만나려는 자의 마음의 씨대로 거두어지리라. 실타래처럼 긴 한 갈래 파도가 밀려왔다. 해변은 허물어졌다. 바다는 이제 처음 만날 두 세계를 허물 것이다. 허물어진 해변이 파도 속으로 사라졌듯 허물어진 세계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지리라. 그 새벽 바다도 붉었다. 밝았다. 환했다. 콜럼버스는 그 바닷속으로 성큼 들어갈 것이었다. 지금 예수는 또 다른 예수와 싸우고 있었다. 관용할 수 없는 것을 관용하라는 예수의 말은 패배했다. 그의 뜻과는 반대로 관용하지 않는 예수의 종교가 승리했다. 사랑의 힘이 이루려 했던 인간 혁명은 미움의 힘에 무릎을 꿇었다. 어둠은 밝음을 뒤덮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에서 그것을 선명하게 보았다. 미움의 힘이라는 바람을 타고 어둠의 승리라는 물살이 실어다 주는 곳으로 그는 오늘 출항할 것이었다. 새벽 바다처럼 세상은 어슴푸레한 무의식의 세계. 음표는 없고 비명과 눈물 가득하여질 파멸의 어둠. 이제 곧 마주칠 두 세계가 연결될 방식은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유럽 대륙은 더 이상 실크로드의 종점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으로 바뀔 조각을 맞추고 있었다. 그가 항해하는 동안 세상의 종말은 없었고, 시간도 종말을 맞지 았았다. 반대로 기독교도 콜럼버스의 배가 항해하는 동안 대서양 맞은 편 대륙의 사회가 닥쳐올 시간의 종말에 임박하고 있었다.
콜럼버스의 초상화와 서명. 학자들은 종말론의 기호로 판단한다.
크리스티아노
3척의 배는 스페인 국왕이 명령해 조달한 배치고는 작았다. 가장 큰 배의 길이도 30m 남짓했다. 세 척 가운데 두 척은 갑판도 없을 정도로 작았다. 팔로스항에 이보다 큰 배는 많았지만, 선주들은 콜럼버스의 항해계획을 신뢰하지 않아 배를 내놓지 않았다. 이 항해는 사실상 산탄헬Luis de Santángel이 가능하게 했다. 배의 크기에 비해 그가 하사 받은 직위는 엄청났다. ‘대양의 최고 제독이자 스페인 부왕 겸 통치자’가 그의 직함이었다. 그가 앞으로 발견할 모든 섬과 대륙은 부왕인 콜럼버스가 통치할 영토로 계약서에 명시되었다. 부왕 임기는 종신이었다. 그는 <항해 일지Diario>를 기록했다. 그의 기록은 항해를 기록한 해사일지이기도 했지만, 그가 처음 만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기록한 인문학적 자료이기도 했고, 지리와 생태 등 자연환경을 묘사한 기록물이라는 가치도 있다. 그는 항해 일지에서 늘 자신과 선원들을 “기독교인Christiano”이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기독교도임을 자랑스럽게 여긴 한편, 아메리카에서 만난 모든 원주민을 비기독교인이라 구분하기 위함이었다. 그때 유럽인들은 세상에는 기독교인 아니면 비기독교인만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이나 모슬렘, 흑인 노예, 반인반수의 괴물 등이 다 비기독교인이자 우수마발이었다.
그가 탄 산타 마리아Santa Maria호의 돛은 바람을 안아 풍만하게 부풀었다. 돛은 붉은 십자가가 굵게 그려졌고, 크로스 파테Cross Pattée의 네 귀퉁이 끝마다 왕관 무늬로 장식했다. 왕관에는 ‘F’와 ‘Y’자가 선명했다. ‘F’와 ‘Y’자는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여왕 이름의 첫머리 대문자다. 그 시절 이사벨라는 Ysabella라고 표기했다. 산타 마리아호의 본디 이름은 가예가La Gallega였다. 이 배는 갈리시아의 폰테베드라(Pontevedra)에서 건조되었는데 라 가예가는 "갈리시아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뱃사람들 사이에서는 “창녀 마리아Marigalante”라는 별명으로 통하는 배였다. 종말론을 믿는 기독교도 콜럼버스가 그런 이름의 배를 타고 십자군 성전을 떠날 수는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 거룩한 여인을 이르는 성녀 마리아Santa Maria로 이름을 바꾸었다. 모로코 앞 카나리아섬에 들러 물과 음식 등 마지막 보급품을 실었다. 카나리아에서 그해 9월 5일에 떠났다. 그는 항해하는 동안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읽고 또 읽었다. 두 차례 거센 역풍을 만난 항해는 바다에서 길을 잃을 듯했다. 항로는 불안했다. 두려운 것은 배를 삼킬 듯이 몰아치는 바람과 파도만이 아니었다. 애초 계획했던 항해 거리를 훨씬 지났는데도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항해 33일째. 선원들이 제노바 놈 콜럼버스에게 속았고 이제 다시는 돌아갈 수도 없다며 동요했다. 콜럼버스를 바다에 던져버리자고 공개적으로 선동하는 자도 있었다. 다시 돌아가자고 위협하는 자도 있었다. 새가 날아 돛을 스쳤다. 또 한 번 새가 남동쪽으로 날았다. 콜럼버스는 이제는 자신이 의도했던 항로를 포기하고 새들을 따르기로 했다. 새들은 땅에서 날아왔으므로 다시 땅을 향해 날고 있다고 믿었다. 오랜 경륜에는 힘이 있었다. 세계사의 중요한 순간, 카메오로 나타난 새가 역사를 바꾸었다. 만일 이 새들이 콜럼버스가 본래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날고 있었다면 콜럼버스는 플로리다반도 마이애미 근처 어딘가에 도착했을 것이다.
콜럼버스의 배에 그려진 'F'와 'Y' 대문자와 왕관 문양
그날 낮에는 대나무 작대기, 그리고 누군가가 일부러 쇠붙이를 붙여 만든 작은 막대기를 건져 올리기도 했다. 흙이 붙은 풀 더미와 작은 나무판자가 떠다니기도 했다. 흙, 풀, 나무를 보았다. 따개비가 붙은 것도 있었다. 따개비는 갯가 바위에 붙어산다. 콜럼버스는 지금 땅이 가깝게 있다고 판단했다. 숨을 가다듬고 구름 아래 멀리 있는 바다를 살폈다. 구름은 환하고 선명했다. 지중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뜨거움을 물이 이고 하늘이 담고 있었다. 배가 나갈수록 바다색은 투명해졌다. 물은 맑아서 쪽빛이었다. 물속에 산호가 아른거렸다. 두 달 넘도록 바다와 하늘만 보아온 그였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물은 여태 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스쳤다. 바람을 받아 부푼 돛만큼이나 그의 가슴도 팽창하고 있었다. 큰 먹구름이 나타났다. 육지가 있다는 징후였다. 바람은 강처럼 잔잔하고 공기는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밤 10시가 넘었을 무렵, 앞서가던 핀타호가 땅을 보았다는 신호를 보냈다. 한 번 두 번……. 여린 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별빛은 아니었다. 그것과는 분명히 달랐다. 별빛이라면 모래에 박힌 사금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듯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의 이 빛은 약할지라도 오그라지며 꺼질듯하더니 다시 자라났다 고르게 자리 잡는다. 투명한 불꽃은 언저리에 푸른 서슬을 품었다. 그런 빛은 별빛일 수 없었다. 그런 빛은 분명한 땅이 보내는 신호였다. 땅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정을 2시간쯤 넘긴 즈음, 콜럼버스 앞에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속력으로 배를 나갔다. 훔볼트는 콜럼버스가 쿠바 앞바다 바하마 제도에 속한 캣 아일랜드Cat Island라 불리는 작은 섬에 닿았다고 했다.
그가 어느 섬에 닿은 날은 1492년 10월 12일. 금요일이었다. 미국의 콜럼버스의 날이 이날이다. 바하마 제도에 닿은 날을 미국은 어찌하여 콜럼버스가 미국 땅을 밟은 날이라고 하는지. 총 2자루와 철제 칼을 가진 로빈슨 크루소가 처음 만난 원주민을 다짜고짜 노예로 삼는다며 불러준 이름도 프라이데이. 로빈슨이 프라이데이를 만난 날도 금요일이었다. 콜럼버스가 첫발을 디뎠다는 그곳에는 지금 회를 반죽해 대충 발라 만든 하얀 십자가가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