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패션쇼>>
3-2화. 오메! 그럼~우린 훈장이 넘쳐나는구먼
청심동 주민센터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가 두 번째 날을 맞이했다. 강당에 들어선 봉자는 괜히 목을 곧추세우며 걸어왔다.
“아이고, 어제 집에 가서 거울 앞에서 한참이나 연습했제? 봉자야, 허리가 쭉 펴졌구먼.”
복자가 놀리듯 말하자 봉자가 흘겨보며 대꾸했다.
“흥, 나는 원래 이래. 태생이 배우 체질인디 뭘.”
익숙한 투닥거림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봉자의 그림자
봉자는 열일곱 살에 서울로 올라왔다. 여수 집안의 장녀였고, 사 남매의 생계를 책임지는 소녀 가장이었다. 동대문 시장 봉제 공장은 그때 수많은 소녀들이 미싱 앞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하루 종일 발판을 밟던 전쟁터 같았다. 지하 작업실은 환기도 안되고, 형광등 불빛만 하얗게 번들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기침이 나와도 꾹 참아야 했다.
“애기야, 너 몇 살이냐”
“열일곱이요.”
“허허, 어린 나이에 꽃몽우리가 곱게 피었구나.”
어느 날 공장장이 봉자를 불렀고, 그녀는 그만 모진 일을 겪었다. 피할 수 없었고, 말할 수도 없었다. 살아남으려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돌아온 것은 ‘화냥년’이라는 낙인이었다.
고향으로는 돌아갈 수 없었고 가족들마저 그녀를 감싸주지 않았다.
결국 봉자는 홀로 청심동 골목으로 흘러들어왔다.
복자의 그림자
그때 봉자 곁에 남아 준 건 복자였다.
복자 역시 소녀 가장이었다. 봉자보다 세 살 많았지만 야무지고 현실적이었다. 봉제사 시절, 복자도 같은 지옥을 겪었다. 일당을 맞추려 소변조차 참으며 미싱을 돌리던 날들이 쌓였고, 그 후유증으로 방광과 자궁이 약해졌다. 결국 그 병으로 나중에는 어렵게 얻은 아이마저 잃게 되었다.
봉자는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과일가게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진 복자를 업고 병원으로 달리던 순간을.
“어찌 그 무거운 몸을 업고 뛰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봉자는 지금도 그때를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복자는 늘 툴툴댔다.
“써글년, 그때 진짜 사람 잡는 줄 알았다.”
그날 언니를 잃을까 봐 하염없이 울던 기억은, 봉자의 가슴에 평생 남았다.
여수 출신 박복자와 박봉자는, 그렇게 청심동에서도 함께 붙어 지냈다.
봉자는 골목에서 복자의 과일가게 맞은편에 젓갈가게를 차렸다. 한때 춤바람이 불어 한창 가게를 비운 적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복자는 욕을 퍼부으며 대신 문을 닫아주곤 했다.
“써글년, 또 어디 싸돌아다니냐. 가게 문은 내가 닫아놨다.”
“이년이 또 안 나오네…”
그렇게 복자가 봉자의 젓갈집을 서성거리며 챙겨주니,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을 늘 헷갈려했다.
세월이 흐른 후
“복자는 복 덕분에 아파트를 받았고, 봉자는 봉이라 아파트 꿈도 봉이 됐다.”
사람들은 그렇게 뒷말을 흘리며 웃었지만, 이름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두 사람의 깊은 사연은 사는 것이 달라졌어도 둘의 사이를 끊기지 않게 했다.
봉자가 빚더미에 앉을 때마다, 복자가 몰래 메워준 돈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집 아가가 가엾은 게, 어서 이 돈이라도 주라.”
툭 던지고 돌아서던 말속에, 복자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봉자는 안다. 복자가 없었다면, 자신은 청심동에 오지도 남아 있지도 못했을 거라는 걸.
세월이 흘러도 복자는 여전했다. 팔봉집 사장은 복자가 데려다 키운 양아들이었다. 이제는 식당 주인이 되어 외국 청년까지 고용하고 보듬는 집이 되었고, 그 덕에 봉자는 밤마다 공짜 밥을 얻어먹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인심 좋은 가게라 여겼지만, 그 뒤엔 늘 복자가 있었다.
복자는 말하지 않았고, 봉자도 모른 체했지만—
그 은혜 덕분에 폐지를 줍는 독거노인 봉자는 굶지 않고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등 펴세요, 고개 당당하게! 걸음걸이는 자기 이야기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강사 희선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내 걸음은 건어물인가~ 그래서 이렇게 오징어처럼 흐물거리는가 봐?”
건어물상 출신 미자할머니가 농담을 하자 강당은 폭소로 흔들렸다.
“오냐 난 가래떡이다.”
“여기 토종닭도 걷고 있구먼!”
주민센터 강당은 어느새 화기애애한 할머니들의 런웨이가 되어 있었다.
봉자는 그 웃음 속에서 문득 스무 살의 자신을 떠올렸다.
봉제공장의 좁은 작업실, 미싱 위로 떨어지던 땀방울. 세상은 잔혹했지만, 마음속 무대 위에 서 있던 자신은 늘 반짝였다. 봉자는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오늘따라 그녀의 눈빛은 젊은 날보다 더 깊고 단단했다.
복자가 팔짱을 끼고 중얼거렸다.
“에휴, 써글년. 그래도 멋은 남았네.”
“왕년에 장미희보다 낫다 안혔소? 그 끼가 어디 갔겠어”
미자 할머니가 맞장구쳤다.
메리야스 월심할매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나는 보톡스 맞아도 눈만 안 감기고... 호박이 줄 긋는다고 수박 안되는데, 주름이 자글자글해도 봉자는 역시 다르구먼.”
“그냐? 고것이 보톡소냐! 오메 슨상님, 이 할매 눈 부릅뜬 거 좀 보소~~”
강당이 또다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희선이 웃으며 손사례를 쳤다.
“어머님들~~ 그런 시술 절대로 하지 마세요. 세월을 고스란히 드러낸 주름이 얼마나 아름다운데요. 어머님들 주름은 자랑스러운 훈장이에요.”
“오메! 그럼~우린 훈장이 넘쳐나는구먼~”
할머니들이 서로 얼굴을 들여다보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엔, 지난 세월의 상처를 껴안은 서로의 연대가 있었다.
그날 강당 구석에서 수업을 지켜보던 주무관 선영은 생각했다.
‘이 할머니들은 그냥 주민센터 프로그램 참가자가 아니구나.
이 동네의 시간, 세월, 상처까지 다 짊어진 주인공이네.’
창문 너머로 고운 빛이 스며들었다. 과거의 그림자 위에 새로운 시작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