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시니어모델 워킹 클래스 1기

<<3. 달빛 패션쇼>>

by 그래놀라

3-1화. 시니어모델 워킹 클래스 1기


청심동 주민센터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요즘 문화수업이 하나같이 시들해진 탓에, 주무관 선영은 머리를 싸맸다. 노래교실, 건강체조, 서예교실... 뭐 하나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 문득,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라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나이 들어서 무슨 모델이냐”는 핀잔이 들릴 게 뻔했지만, 오히려 그런 낯선 시도가 필요했다.


선영은 청심초등학교 동창이자 한때 잘 나가던 모델이었던 친구 희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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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은 90년대 무대 위를 누비던 톱모델이었다. 그러나 지나친 성형으로 자연스러움을 잃은 뒤부터 점점 불러주는 곳이 줄어들었고, 모델학원 운영과 생활비로 모아둔 돈까지 소진했다. 결국 강남 아파트를 정리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청심동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주민센터 강사 제안은 낯설었지만, 어쩌면 다시 삶을 붙잡을 기회일지도 몰랐다.


“주민센터에서 시니어 모델 클래스를? 내가?”


“그래, 너 아니면 누가 하겠니. 할머니들, 의외로 매력 있으셔. 나 좀 도와줘.”


그렇게 첫 수업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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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심동 주민센터 강당.

낡은 커튼 틈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접이식 의자에 앉은 할머니들 사이로 수군거림이 잔물결처럼 번졌다.


재개발된 아파트에 사는 과일가게 출신 박복자, 그리고 개발에서 밀려 아직 허름한 주택에 남아 있는 젓갈가게 출신 박봉자. 이름도 비슷하고, 과거에 골목에서 마주 보며 장사하던 사이라 늘 헷갈리고 늘 부딪혔다. 웃음과 심술, 애증이 뒤섞인 두 사람은 오늘도 나란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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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자 할머니는 특히 꼬시는 게 쉽지 않았다. 독거노인으로 고독사 위험이 높다는 걸 아는 선영은 매일 전화를 걸었고, 복자 역시 끈질기게 권했다.


“할머니, 왕년에 동네 미모로 소문나셨다면서요? 영화배우가 꿈이셨다면서요?

모델 클래스 나와보세요. 운동도 되고, 사람들도 만나고...”


결국 봉자는 마지못해 참석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은근히 떨렸다. 왕년에 ‘봉자 아가씨 예쁘다’는 소리를 참 많이 들었는데, 나이 들어도 아직 그 말이 듣고 싶었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던 꿈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아이고, 복자 할망구 왔는가?”


“니도 왔네, 봉자야. 근데 어째 억지로 끌려온 얼굴이구만.”


“복자 형님이 계속 꼬셔대지... 사회복지사 전화에 귀찮아서 나온 거여. 시니어 모델이 뭔 줄이나 알겠어?”


복자가 봉자의 손을 잡으며 껄껄 웃었다.

“너는 나이 드니 입꼬리가 더 올라갔네. 웃는 게 아니라 억장이 올라간 거 같어.”


“에이고, 형님은 늙어도 입은 살아있네.”


강단 앞에서 주무관 선영이 마이크를 잡았다.

“존경하는 어머님들~~! 오늘부터 청심동 시니어 모델 워킹 클래스가 시작됩니다!”


할머니들 사이에서 킥킥 소리가 터졌다.

“아이고, 말은 잘허네. 우리는 그냥 걸어 다니는 게 다인디. 산송장이여~ 곧 팔십이 코앞인디...”


다른 할머니가 맞장구쳤다.

“그려, 젊은것들이야 폼 잡으면서 걷지만, 우린 숨만 붙어 있어도 다행인디 뭔~”

“그려, 우리는 워킹이 아니라 워우킹이여. 걸으면 허리에서 워우 소리가 난다니까, 허허허.”


강당은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선영은 웃음을 참으며 소개를 이어갔다.

“오늘 강사님은요, 청심초등학교 출신, 왕년에 무대 위를 누비던 탑 모델 김희선 선생님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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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강당이 술렁였다.

“청심초 출신이라고? 우리 동네에서 나왔다고?”

“그 미스춘향이 했던 탈랜트 김희선?”


뒤쪽 문이 열리자, 단정한 블라우스 차림의 희선이 들어섰다.

할머니들 눈이 동그래지며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와우! 어머님들, 반갑습니다. 저는 모델 김희선이에요.”


희선이 웃자, 할머니들 사이에서 다시 웅성거림이 퍼졌다.


“얼굴은 그 김희선보단 덜하구먼, 그래도 늘씬하니 기죽을 건 없네.”


“맞다, 맞다. 저 다리 길이면 달동네 계단도 세 칸에 한 번씩 오르겠네.”

희선은 농담을 받아치며 손을 흔들었다.

“네~ 얼굴은 쪼끔 밀리지만 몸매는 제가 원조랍니다. 이제 제가 책임지고 어머님들의 자세를 우아하게 교정해 드릴 거예요. 모델 김희선으로 기억해 주세요!”


할머니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우리도 좀 이쁘게 걸어보자고. 부탁혀요, 슨상님!”


희선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요즘 시대는요, 에티튜트 이즈 에브리띵! 태도가 전부, 자세가 전부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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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카노, 에퉤퉤 이자 아비 띵?”

복자가 봉자의 옆구리를 찌르자, 봉자가 손뼉을 치며 껄껄 웃었다.


“에퉤하고 뱉으면 아비가 띵 간다 이 말 아이가? 허허허.”


강당이 웃음으로 들썩였다.


희선은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어머님들! 에티튜트, 곧 태도라는 뜻이에요. 바른 태도와 자세만으로도 인생이 달라진다는 말이랍니다.”


봉자가 중얼거렸다.

“긍게, 태도부터 바로잡고 살아라... 참말로 맞는 소리여.”


곁에 있던 복자가 툭 덧붙였다.

“그라믄 우리 평생 자세가 삐딱했단 소리 아녀? 에구, 이제 와 바로잡으라니 허리가 먼저 부러지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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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웃음이 터졌다.

강당 창문 너머로 이른 오전의 햇살이 번졌다.


주민센터 한켠에서 주무관 선영은 할머니들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봉자할머니가 나왔다... 이제 끊어지지 않고 연결만 잘 되면 돼.”


그 모습을 바라본 희선도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노인들, 참 묘하다. 괜히 내가 더 배우게 될 것 같은 기분이네.”


청심동 주민센터 강당에는 엄마품 같은 웃음이 번졌다.

살아내기에 바빠 잊었던 젊은 날의 꿈이, 파란 나비가 되어 할머니들의 곁에 맴도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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