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나는 아직 죽지 않았소.

<<3. 달빛 패션쇼-3화>>

by 그래놀라

“어머님들, 오늘은 런웨이보다 더 어려운 걸 해볼 거예요. 서로 마주 보면서,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걸으시는 거예요. 자존심과 자부심을 눈빛으로 보여주셔야 해요. 그러면서도 가장 자신 있는 인자함이 드러나게!”

할머니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서로를 바라봤다.

복자가 팔짱을 끼고 봉자를 흘겨봤다.

“야, 봉자야. 너 눈빛 아직도 살아 있냐?”


“나는 아직 죽지 않았소. 언니가 뭘 안다고. 흥! 난 무대 체질이라고~”


“체질은 무슨. 모델은 눈빛으로 사람 홀리는 거여. 넌 맨날 춤에 홀려 다녔잖냐.”


강당은 할머니들의 짖꿎은 농담으로 웅성거렸다. 그 속에서 두 여인의 눈길엔 묘한 기류가 스쳤다.


다른 삶의 무게

복자는 청심동에서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일찍부터 과일가게 장사로 자리를 잡았고, 재개발 보상으로 제일 먼저 아파트에 들어갔다.

“저 아파트는 벌써 값이 십억이 넘어섰다니까.”

다른 할머니들이 복자를 부러워하며 말했다.


그러나 봉자는 달랐다.

언덕 위 낡은 집은 재개발 구역에서 빠졌고, 그 후 부동산 업자에게 속아 가게도 헐값에 팔아버린 탓에, 상가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같은 사기를 당한 동네 사람들과 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구제될 순 없었다.

봉자는 언덕 위 낡은 집에 혼자 사는 노인이 되었다.

자식도 없고 재산도 없었지만 자기 집이 있다는 이유로 복지 혜택조차 줄줄 새어 나갔다. 재산은 공시지가로 계산되고, 소득 하나 없는데도 기초연금은 기본금이었다.

며칠 전, 부동산 업자가 찾아왔다.

“할머니, 지금 팔면 4억 드려요. 오늘 계약하면 바로 현찰드립니다.”


순간 봉자의 가슴이 흔들렸다. 4억이라니, 평생 만져보지 못한 돈이었다. 그 돈이면 남은 평생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할머니, 4억 받아서 1억으로 여기 전세 사시다가 개발 들어가면 임대 아파트 들어가시면 돼요. 그땐 전세금 1억 바로 빼드릴 테고요. 3억은 은행에 넣어두고 이자로 살면 이제 편하게 사시는 거죠."


봉자는 솔깃했다. 하지만 이미 속아 울던 기억이 뼛속이 저리도록 남아 있었다.


같은 처지의 노인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버텨야 혀. 곧 있으면 여기에도 15억, 20억짜리 아파트가 들어설 거여.”


“요즘은 백 살도 넘게 산다잖여. 서른 년은 더 살아야 쓰겠는디, 어찌 그 돈으로 세 들어 살다가 나가떨어질라고 혀?”


봉자는 그저 중얼거렸다.

“나는 자식도 없는데, 무슨 아파트여... 그래도 몇 살을 더 살지 모르고... 돈은 점점 값어치가 없어지고... 이 노인네 한 몸뚱이, 어쩌란 말인가.”

실제로 봉자의 수입은 빠듯했다.

주무관 선영이 도와준 기초연금 34만 원. 쪽방을 세 놓아 받는 월세 15만 원. 그리고 폐지 주워 파는 15만 원 남짓. 모두 합쳐도 달마다 60만 원 정도였다.


“할머니, 병원비는 어떻게 감당하세요?”


“병원비가 겁나서. 약만 대충 사다 먹는디, 이렇게 살다 죽겄지 뭐.”


그 말에 주무관 선영은 목이 메었다.

봉자의 눈빛에는 체념과 자존심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복자는 복 덕에 잘살고, 봉자는 봉이라 망했지 뭐.”


동네 사람들은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 속엔 은근한 무시와 언덕마을에 대한 멸시가 섞여 있었다. 봉자는 그 말이 귓가에 맴돌 때마다, 더 꿋꿋한 척 허리를 세웠다.


실은 공동체도 예전 같지 않았다. 아파트 주민이 된 노인과 언덕마을 노인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다. 서로를 챙기기보다 ‘누가 얼마를 받아 챙기고 동네를 떠났더라~’ 그런 소문이 더 빨리 돌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귤을 나눠 먹고 정을 얘기했지만, 정작 진짜 손을 내밀어주는 이는 드물었다.


“자, 서로 눈을 바라보세요. 웃지 마시고, 당당하게!”


할머니들이 서로 눈을 마주했다.

“봉자야, 네 눈빛 아직도 기죽지 않았네?”


봉자는 씩 웃었다.

“기죽을 년이면 진작 죽었지. 나는 안 죽어.”


순간, 강당 안이 고요해졌다.

가볍게 던진 농담 같았지만, 그 속엔 오래 버틴 세월의 한이 묻어 있었다.


복자는 괜히 콧방귀를 뀌었다.

“에휴, 써글년. 그 고집 좀 덜 부리고 살아라.”


할머니들이 슬쩍 웃어주며 거들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서로의 상처와 자존심을 조심스레 지켜보는 눈들이 있었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스며들었다. 재개발 바람에 다시 흔들리는 동네, 그 속에서도 여전히 꿋꿋이 서 있는 두 여인의 그림자가 강당 바닥에 나란히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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