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비극을 대하는 우리의 두 얼굴

<<3. 달빛 패션쇼- 5화>>

by 그래놀라

“사각지대를 왜 못 챙겼습니까? 언론이 난리예요.”


동장은 구청장에게 불려 가 호통을 들었다.

사회복지팀은 대책 회의를 열었지만 서로 책임만 미루고 있었다. 주민센터 직원들 또한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서류를 뒤적이며 생각했다. '왜 몰랐을까? 왜 이 분들은 수급을 다시 신청하지 않았을까?'. 그들의 눈에 보이는 문제는 오직 '가난'과 '제도'의 구멍뿐이었다.

〈한강타임스〉 사설
“복지 사각지대, 또 생명을 앗아갔다”
서울 청심동의 한 낡은 주택에서 거주하던 80대 어머니와 지병을 앓던 50대 아들이 생활고로 숨졌다.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불행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집이 있으면 가난하지 않다’는 낡은 잣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청심동뿐 아니라, 서울 곳곳의 언덕마을과 재개발 구역에서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
이제는 보여주기식 대책이 아니라, 현장과 이어지는 복지 시스템의 재정비가 시급하다.

그날밤, 주무관 선영은 잠 못 이루고 사건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돌아가신 아들은 늘 혼자였다고 했다. 어머니는 몸이 불편해 밖으로 나오지 못했고, 폐지 줍는 일을 하는 박봉자 할머니처럼 무언가에라도 의지해 세상과 연결될 기회가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단순히 '돈'을 주는 행정 서류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빈곤'이 아니라 '단절'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그들 역시 아무에게도 손을 내밀지 않았다. 그들은 돈이 없어서 죽은 게 아니라, 세상과 연결될 끈이 끊어져 홀로 고립된 채 죽어간 것이다.



봉자는 집 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옆 골목 그 집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일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모자와 자신을 같은 틀에 넣고 수군거릴 게 뻔했다. 마음 아픔과 자존심 상함, 두려움과 회한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시니어 워킹 클래스에도 가지 않았고, 수레도 끌고 나가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방 안에서 옷가지를 정리하다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했지만, 모든 하루가 똑같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고, 문을 흔드는 건 야속한 바람뿐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청심 동이오.”


“봉자야! 너 오늘 왜 안 나왔어? 심란해서 누운겨?”

복자였다.


“... 뭐... 맘이 안 좋구먼.”


“밥도 안 처먹고 축 처졌구먼?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다 있지. 응? 봉자야~ 그러고 있지 말고 내려온나. 밥이나 먹자. 나 무릎 시려서 그 언덕 못 올라간다. 잉?”


“담주 봐요. 나 지금은 괜찮응게, 걱정 말고.”


전화를 끊고 봉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거봐... 다 나를 떠올리잖여. 시체가 돼서 썩어 발견될까 봐, 다들 나도 저 꼴 날거라 생각하는 거지... 아휴, 내 팔자야.”


일주일 후, 시니어 모델 클래스 날.

강당 안에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연습은 시작됐지만 누구도 먼저 걸어 나서지 못했다. 웃음소리 대신 한숨과 수군거림이 흘렀다.

봉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이웃이었는데도 몰랐구먼...”


복자도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 형님 누워 지낸 지가 오래였는데, 그 아들도 자주 보이다 요즘은 안 보이더니만...”


그러나 곧 누군가의 날 선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솔직히 3억이면 팔고 임대아파트 들어갔어야지. 괜히 욕심부리고 버티다 저 꼴 된 거 아냐?”

순간 강당 안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때 미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그게 말이여 방귀여?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노인네들... 우리 다 같은 처지 아냐?”


다른 할머니가 작게 중얼거렸다.

“너무 가엾고, 우리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무섭다, 정말...”


강당은 제각기 다른 얼굴로 흔들렸다. 누구는 자책했고, 누구는 냉소했고, 또 누구는 두려움에 눈을 피했다.


주무관 선영은 뒤에서 수업을 지켜보다 손을 번쩍 들며 소리를 멈췄다.

“어르신들! 제발 잠깐만 멈춰주세요. 이 수업은 그냥 걷기 배우는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 동네는, 여기서 서로 얼굴을 보고, 건강하게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는 자리가 되어야 해요.
힘들면 말씀해 주세요. 아프면 알려 주세요.
‘괜찮다’는 말로 버티다가는... 또다시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부디, 주민센터 문을 두드려 주세요.
여기서 나눈 이웃의 이야기가 누군가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강당 안은 잠시 적막해졌다.

복자는 흐느끼며 손수건으로 눈을 가렸고, 봉자는 입술을 깨물었다.


희선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워킹 순서를 준비했다.


그날 수업 후, 선영과 희선은 텅 빈 강당에 앉아 있었다. 선영 손에는 ‘중단 검토’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은 공문이 들려 있었다.


“중단 검토?”


“응, 지금 사태가. 여론이 안 좋아서 마을 축제도 취소될 것 같아.”


그때, 문이 열리고 몇몇 할머니들이 들어왔다. 봉자, 복자, 미자. 주름진 손으로 서로를 부축하며 강당 가운데 섰다.

봉자가 먼저 말했다.

“선생님, 우리 그냥 한번 걸어봅시다.

부끄럽지만, 폐지 줍는 노인 박 봉자가 여기 나오는 건... 나 죽지 않았소, 그 증거요.

이젠 우리 서로 눈으로 확인하고, 챙겨야 쓰겠소.”


복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없어도 있다 하고, 아파도 안 아프다 하고... 그게 우리 평생 배운 거 아녀? 그러다 늙으니까 세상은 우리 같은 건 죽어도 모르는 세상이 됐잖소.”


미자도 목소리를 보탰다.

“유리처럼 금방 깨질 노인네들... 서로 붙들고 나와야지. 방구석에만 있으면 아무도 몰라줘. 우리끼리라도 지켜야지 않겠소?"


봉자가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가, 천천히 말했다.

“요번 사건으로 마을 축제는 못 하겠지만... 우리 시니어 모델 1기 발표 무대만큼은 꼭 했으면 좋겠어.

그 무대를 없애지 말고, 사람들이 보러 나오게 해야지.

우리가 걷는 걸 보여주고, 또 보고... 그렇게 세상으로 자꾸 나오게 해야지. 그래야 우리도 살고, 이웃도 함께 사는 거 아녀.”


그 말과 함께 미자가 워킹 테이프 위로 발을 옮겼다. 구부정한 어깨, 느린 걸음. 그러나 한 발 한 발은 무거운 시간을 딛는 듯 단단했다. 복자가 뒤따랐고, 봉자가 마지막에 섰다.


선영은 할머니의 굳은 손을 잡았다. 그녀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복지 사각지대'의 진짜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제적 경계선이 아니라,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인간관계의 단절이었다.

선영은 이제 알았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서류를 챙기는 것 넘어, 사람과 사람을 잇는 작은 끈을 만들어 내는 것임을. 그들의 워킹 클래스 무대는 단순한 취미 활동이 아니라, 고립을 깨고 세상으로 나가는 존엄한 삶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이 무대를 지켜드릴게요. 여기가 단순한 워킹 연습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명을 붙잡는 자리라는 걸... 꼭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그때 희선이 주먹을 꾹 쥐며 코끝이 빨개진 얼굴로 덧붙였다.

"네, 어머님들. 저도 힘을 보태서 최선을 다해 수업해 보겠습니다!"


음악도 조명도 없었지만, 테이프 위를 걷는 발걸음마다 슬픔을 견디는 얼굴, 다시 살아보려는 얼굴이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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