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해 뜰 날, 폐지 줍는 늙은이가 모델이라니

3. 달빛 패션쇼- 7화

by 그래놀라

서울 한강변, 막심 본사 회의실.

스크린에는 믹스커피 판매 그래프가 미끄러지듯 떨어지고 있었다. 마케팅팀장이 발표를 시작했다.

“카페 시장 확대와 프리미엄 원두 소비 증가로 믹스커피는 계속 하락세입니다. 하지만—전국 데이터를 추적한 결과, 청심동만은 판매가 늘었습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청심동? 거긴 달동네 있는 언덕마을 아냐?”


“네, 맞습니다. 거기 오프라인 매장에서 막심 봉지커피 판매량이 전국 1위를 기록했습니다.”


팀장은 FGI(포커스 그룹 인터뷰) 조사 결과를 넘겼다.

“충성 고객은 실버 세대입니다. 고소득층이나 젊은 층은 프림, 설탕 유해성 따지며 외면합니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여전히 믹스커피를 하루의 위로로 즐기고 있습니다.”


중간 간부가 손을 들었다.

“그래도 브랜드 이미지는 젊고 스타일리시해야...”


팀장이 말을 잘랐다.

“이미지로 버틴 10년이 끝났습니다. 우린 펙트로 가야 합니다. 세상은 변해도, 막심은 안 변한다. 그 맛을 지켜온 사람이 우리의 모델이어야 합니다. 특히 한 분의 이야기가 인상적입니다. ‘힘들 때 이렇게 모여서 나누는 믹스커피 한 잔이면 힘이 확 돌아오지’ 라고요.”


그때 스크린에 청심동 주민센터에서 촬영된 뉴스 영상이 켜졌다. 화면 속 손에 믹스커피 봉지를 쥐고 있는 봉자가 기자를 향해 말했다.

“보여주기? 그럼 우리가 집에만 틀어박혀 썩어가야 맞는 거요? 우리가 나와서 걷는 게, 살아있다는 증거요!”

회의실에 정적이 흘렀다. 마케팅팀장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찾았습니다. 우리가 찾던 메시지이자, 광고 모델들!”


다음 날, 주민센터에 생각지도 못한 방문자가 찾아왔다. 서울의 한 대기업 마케팅팀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주무관 선영을 통해 정식으로 워킹 클래스 할머니들을 만나고 싶다고 전했다.


선영은 며칠 동안 기자들을 상대하며 진이 빠진 터라, 또 다른 이들의 방문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팀장이 내민 명함을 보고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대표 커피 회사, 막심.


회의실에서 마케팅팀장은 봉자 할머니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할머님. 저희가 찾던 진정한 모델이 바로 할머님입니다."


"나 같은 폐지 줍는 늙은이가 모델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여?"


봉자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지만, 팀장은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세상은 변해도 막심은 안 변한다는 저희의 슬로건처럼, 세월의 풍파를 겪고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오신 할머님의 모습이야말로 저희가 담고 싶은 진심입니다. 저희와 함께 믹스커피 광고를 만들어 주시겠습니까?"


할머니들은 수군거렸다.


“저런 미친 소리!” 하고 내뱉는 할머니도 있었고,

“텔레비전 나오면 또 동네 창피 아녀?” 하며 우려하는 목소리도 섞였다.


희선도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속물적인 상업 광고의 세계가 뉴스 한 장면으로 이 순수한 할머니들에게까지 손을 뻗은 것만 같았다.


그때, 봉자가 굳건한 얼굴로 답했다. 그녀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를 모델로 쓰겠다고? 그래, 좋다. 내 주름이 이 삶의 훈장이라면, 그 훈장을 세상에 보여주지. 대신 조건이 있네. 이 할매들의 위킹을 세상에서 가장 큰 무대로 만들어주게."


봉자의 당당한 제안에 막심팀은 잠시 숨을 멈췄다. 그들의 생각 속 광고는 언덕을 내려다보며 할머니들이 커피를 마시는 고즈넉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봉자가 말한 '세상에서 가장 큰 무대'는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봉자의 단호한 한마디에 희선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과거의 자신이 잃어버린 '진심'과 '자존감'이 봉자 할머니의 눈빛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순간 희선은 화려한 세계의 허울 좋은 성공에 연연하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이 작은 런웨이는 단순히 워킹을 배우는 공간이 아니라, 할머니들이 자신의 삶을 다시 사랑하고 세상에 당당하게 보여주는 그들만의 큰 무대였다. 희선은 봉자의 조건이 무슨 의미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희선은 봉자와 마케팅팀장 사이로 한 걸음 다가서며 말했다.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이 무대, 할머니들의 삶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빛나는 방식으로."

그 순간, 선영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구청에서 온 메시지—‘시니어 모델 워킹 크래스 발표 무대 중단 검토’.


선영은 화면을 꺼버렸다.

“이번만은, 내가 지킬 거야. 이제는 누군가의 관찰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증언자가 될 차례야.”


그날, 막심이 찾은 건 모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증언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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