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세상은 변해도, 이 웃음은 그대로 남기를

3. 달빛 패션쇼- 8화

by 그래놀라

막심 광고의 마지막 장면은, 할머니들의 런웨이로 결정되었다. 첫 패션쇼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희선이 말했다.


“어머님들, 이번 무대는 원하시는 대로 준비하셔도 돼요. 평생~ 입고 싶었는데 못 입어 본 옷, 이번에 입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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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강당에 웃음과 웅성거림이 퍼졌다. 봉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교복. 국민학교 나오고 공장 들어가느라 교복 한 번을 못 입어봤어. 복자 언니, 우리 같이 입자.”


“좋지! 그 시절 교복 입은 애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이제라도 나도 교복 한번 입어보자.”


미자가 조용히 말했다.

“난, 웨딩드레스. 혼례도 못 올리고 살았는데, 애 아버지 먼저 일찍 가버리고, 이렇게 과부로 평생 살았네... 이번에 그거 한번 입어보면 평생 한이 풀릴 것 같아.”


말끝이 떨리자, 옆에 있던 복자가 말없이 미자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때 월심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난 반짝이는 미니스커트! 젊어서 일만 하느라 못 입어봤어. 죽기 전에 한 번은 입고 싶다.”


다른 할머니들이 배꼽 잡고 웃었다. “니 다리로 미니스커트? 큰일 난다!”


월심은 발을 동동 구르며 시늉했다.

“아이고, 삐딱 구두도 신을 거다. 이 동네 사람들 다 놀라게 해 줄 테다!”


강당은 할머니들의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희선이 눈시울이 붉어진 채 말했다.

“좋아요. 그게 바로 콘셉트예요. 여러분이 못 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그걸 입고 걷는 무대. 우리의 진짜 패션쇼예요.”


광고 촬영

해가 동네 언덕을 붉게 물들이며 넘어가고 있었다. 촬영 첫날, 스태프들이 케이블을 풀고, 희선은 워밍업을 지도했다.


“어깨 펴시고, 턱 살짝— 숨을 크게. 오늘 우리 호흡으로 걷는 날이에요.”


메이크업팀이 파우더를 들이대자 봉자가 손바닥으로 살짝 막았다.

“주름 가리면 나 아냐. 이대로 찍어.”


감독이 웃었다.

“네, 오늘은 메이크업, 조명 대신 사람으로 갑니다.”


첫 장면은 언덕길. 봉자가 삐걱거리는 수레를 밀고 오르다가 숨을 고르는 순간, 카메라가 다가갔다. 굳은살 박인 손, 땀방울, 무릎의 떨림. 봉투에서 믹스커피를 꺼내어 뜯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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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가 종이컵에 따뜻한 물을 붓자, 하얀 김이 올라와 얼굴을 감쌌다. 한 모금. 자막이 겹쳤다.


‘세상은 변해도, 이 맛은 안 변해. ― 막심’

두 번째 장면은 강당의 연습장면. 워킹 테이프 위로 복자가 먼저 올라섰다.

“오늘은 안 넘어진다, 내가.”

하지만 세 걸음 만에 삐끗. 봉자가 달려가 부축했다. 둘은 서로를 붙들고 다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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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밖에서 희선의 목소리가 울렸다.

“좋아요! 넘어져도 괜찮아요. 서로 붙잡고 다시 일어나는 게 런웨이예요.”


카메라 뒤쪽, 조명팀 막내가 몰래 코끝을 훔쳤다.

“저게, 진짜인가 보네.”


감독이 모니터를 보다가, 헤드셋을 살짝 벗었다.

“컷. 좋아요. 있는 그대로가 제일 좋다.”


촬영 내내 선영은 강당과 골목을 오가며 허가와 안전을 챙겼다.

“차량 잠시만 우회 부탁드립니다.” “어르신, 여기 케이블 있어요. 발 조심하시고요.”


카메라 앞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뛰다, 잠깐 숨을 돌릴 틈에 골목 구멍가게 할머니가 말을 걸었다.

“주무관 선생님, 나도 다음엔 저 수업 가볼까?”


선영이 활짝 웃었다.

“그럼요. 나오시고, 서로 안부 트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해요.”


점심 무렵, 카메라가 언덕 모서리를 도는 순간, 한 아저씨가 혀를 찼다.

“또 카메라야? 이러다 집값 떨어지면 책임질 거요?”


선영이 다가서서 조용히 말했다.

“집값이요? 선생님, 오늘은 우리 동네 모두의 가치를 올리는 날이에요. 한 번만 옆에서 지켜봐 주세요.”


아저씨는 투덜거리다 말없이 벽에 기대 섰다. 촬영이 끝나갈 즈음, 그는 슬그머니 엄지를 치켜들었다.


패션쇼 발표 무대

며칠 뒤, 작은 강당이 무대로 변했다. 광고 촬영팀은 할머니들의 무대에 방해되지 않도록 카메라를 최소화하고 다큐 형식으로 무대를 담았다. 홍보는 크게 못 했지만, 할머니들의 자식과 손주, 며느리, 이웃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레드카펫이 무대 뒤에 깔리고, 카세트에서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첫 무대는 봉자와 복자의 교복 런. 두 사람은 십 대 소녀처럼 손을 꼭 잡고 걸어 나왔다. 복자의 손주들이 “할머니 소녀 같다!”라고 외치자, 강당에 웃음이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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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미자의 무대.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미자의 손주가 뛰어나와 할머니의 손을 잡고 걷자 관객석은 금세 눈물바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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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신부 같아요.”

손자의 말에 미자는 끝내 눈물을 터뜨렸다.


이어 월심이 등장했다. 짧은 미니스커트에 하이힐. 첫 발자국에 휘청하자, 봉자가 뒤에서 “저러다 응급실 직행이여!” 하며 외쳤고, 강당은 폭소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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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심은 일부러 포즈를 잡으며 관객을 향해 윙크했다.

“나 오늘이 전성기여!”


“오메! 그 이쁜 다리을 어째 평생 숨기고 살았댜~미시즈 청심동 여기 있었구먼!”

할머니들은 박수를 치며 응원하고 관객들은 환호했다.


정장을 차려입은 할머니, 손녀의 힙합 스타일을 입고 나온 할머니, 박사모와 가운을 입고 나온 할머니, 배꼽티를 입은 할머니... 그렇게 그녀들은 세월을 잊고 꿈에 그리던 모습으로 무대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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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무대. 모두 고운 한복으로 갈아입고 무대 위에 올랐다. 자식 결혼식 때 입었던 옷, 장롱 깊숙이 묵혀둔 옷, 각자의 삶이 담긴 옷이었다.

선영이 말했다. “어머님들~ 이제 다 함께 걸어 나오세요. 오늘은 어머님들 모두가 빛나는 날이에요!"


할머니들이 나와 나란히 걸음을 옮기자, 강당은 뜨거운 박수로 가득 찼다. 봉자가 객석을 향해 오른손의 주먹을 쥐며 위로 올려 외쳤다. "삶은 멈추지 않는 런웨이~ 나는 아직 죽지 않았소!"


손주들이 두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할머니 최고야!”


희선은 무대 옆에서 손을 모았다.

“이건 진짜 런웨이예요. 오늘이 해 뜰 날이에요.”


선영은 휴대폰으로 무대를 촬영하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번만은 보고서가 아니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광고 최종 편집본은 화려한 음악도, 슬로건을 외치는 목소리도 없었다. 손, 발, 숨, 웃음, 그리고 한 모금. 나지막한 내레이션이 뒤를 받쳤다.

“괜찮아.”

마지막 컷, 워킹 테이프 위에서 서로의 팔을 붙든 할머니들과 한 손을 굳게 든 봉자, 자막이 닫혔다.

‘삶은 멈추지 않는 런웨이.’


온에어 첫날, 동네가 들썩였다. 분식집 TV 앞에 사람들이 모여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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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저기 우리 봉자 할머니!”

“엄마 보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


온라인엔 상반된 반응이 넘쳤다. ‘감성팔이’라는 댓글도 있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부모님 생각난다’며 전화번호를 누르고, 주민센터로 할머니들을 향한 선물과 협찬이 쏟아졌다.


광고는 성공적이었다. 봉자는 '믹스커피 할머니'로 불리며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선영의 책상 위엔 새로 만든 ‘안부 출석부’가 놓였다.

“이번 주에 안 보인 분 메모해 주세요. 먼저 찾아갈게요.”

그녀는 펜촉을 꼭 눌렀다. 서류보다 사람이 먼저.


희선은 강당에서 할머니들의 스트레칭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무대는 잡지 표지가 아니라, 이들의 하루였어. 내 인생의 무대도 여기였네.”


스태프 몇 명이 촬영 현장을 다시 찾아왔다. 그중 한 명이 꾸벅 인사했다.

“원래 이 일, 장비랑 시간만 보던 사람이었는데요... 그날 이후론 사람 얼굴을 보게 됐어요. 고맙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단단했고 한 광고가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봉자는 여전히 언덕 마을 판잣집에 살고 있었고, 매일같이 "4억, 5억을 쳐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하는 부동산 업자들을 만나고 있다. 동네는 서울시 재개발 계획인 '신속통합기획'이 승인되어, 몇 년 안에 천지개벽을 할 거라고 한다.

그때까지 봉자는 살아있을지, 20억짜리 아파트의 주인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봉자와 복자의 한평생이 담긴 이 마을이 그 안에 깃든 모든 이야기를 잃지 않고 다시 만들어질 것인가, 아니면 그저 똑같은 아파트에 묻혀 사라질 것인가. 그 그림은 누가, 그리고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할머니들의 수다 소리가 들려왔다.

“돈이 문제가 아녀. 내 대문, 수레바퀴 자국, 저 고양이 밥그릇... 내 시간들이 묻어 있는데, 그걸 어디에다 옮길 거야?”


복자가 옆에서 손을 얹었다.

“그래도, 언젠간 옮겨야 할지도 몰라. 그때 이번엔 우리 같이 가자. 갔다 오면 집이 따라온다고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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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자가 빙그레 웃었다.

“그래. 같이 가자. 근데 우선 내일은, 또 여기서 걷자.”


그날 저녁, 강당엔 다시 발소리가 났다. 음악도 조명도 없이, 테이프 위로 발끝이 차근차근 올라갔다.

여전히 그들을 향해 고개를 젓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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