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달빛 패션쇼- 6화
사건 이후, 청심동 골목에는 방송 카메라가 수시로 드나들었다. 낡은 판잣집과 언덕길, 고양이밥그릇이 화면에 잡혔다. 동식 모자의 죽음과 마을의 열악한 주거 환경, 노인 복지 사각지대를 조명한다며 취재진이 줄을 섰다.
“이 동네가 언제 이렇게 관심받아봤냐? 희한하다.”
“뭐 좋은 일도 아니고, 이런 걸로 떠버려서 뭐가 좋아.”
가게 앞 의자에 앉아 있던 아저씨들이 혀를 쯧쯧 찼고, 한쪽에서는 젊은 부부가 목소리를 낮췄다.
“말조심해야 해요. 괜히 인터뷰 잘못 나갔다간 집값 떨어져요.”
마이크가 골목 어귀마다 불쑥 나타나자, 주민들은 대문을 꼭 닫고 숨죽였다. 창 문틈으로 TV 불빛만 어른거렸다.
주민센터 강당은 한동안 발소리조차 아꼈다. 워킹 테이프 위엔 먼지가 앉았고, 할머니들의 눈빛은 바닥에만 머물렀다. 봉자와 복자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동식 모자의 죽음은 이웃의 비극이 아니라, 언제든 자신에게 닥칠 수 있는 현실로 모두의 가슴을 눌렀다.
그때 희선이 보온병을 들고 천천히 걸어왔다. 믹스커피 봉지를 뜯는 어색한 손길을 보며 봉자가 물었다.
“선생님, 고상한 분이 그런 걸 다 마셔요?”
“모델할 땐 칼로리 높은 건 입에도 안 댔죠. 아침은 물 한 잔, 점심은 사과 반쪽. 날씬해야만 사람 취급받는 줄 알았어요.”
그녀는 종이컵에 커피를 타서 봉자에게 내밀었다.
봉자는 컵을 받아 들고 한참 바라보다 한 모금 마셨다.
“이 맛이 최고지. 공장에서 야근하고, 시장서 장사하고... 힘들 때마다 이거 한 잔이면 하루가 돌아가는 거 아뇨. 뭐, 원두? 우리 세상엔 그런 거 없었지.”
희선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광고 조명 아래 어지러워 쓰러졌던 날, 감독이 “표정 관리부터”라고 말하던 얼굴들. 사진 속 사람은 자신이었지만, 삶 속 사람은 아니었던 시간들이 지나갔다.
“맞아요. 세상은 날씬한 사람만 좋아하고, 예쁜 사람만 기억하죠. 이제 전, 어머님들이랑 있어서... 숨이 트였어요.”
복자가 희선의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그럼 됐지. 나이 들면 주름이 훈장이라며요. 선생님은 그 숨 막히는 세상에서 살아남은 게 장한겨. 어여~ 찐하게 한 잔 타 드셔. 설탕 빼지 말고.”
봉자가 맞장구쳤다.
“나랑 복자언니, 어릴 땐 봉제 공장에서 젊을 땐 시장통에서 서로 앞자리였지. 그땐 이 프리마 들어간 커피가 얼마나 귀했는지 알아요? 열일곱에 학교는커녕 봉제공장서 미싱 돌리고... 세상이 야속하고 서러워서 울고 있으면 언니가 요거를 어디서 구해와서 찐~하게 한 잔 타서 내미는데... 그 맛이 세상 따듯하고 가슴이 녹아내리는 거 같아서, 또박또박 받아먹으면서 울고 웃고 했지. 귤 팔고 젓갈 팔고, 장사 안 되는 날은 뒷골목에서 요거 타서 나눠 마시며 티격거리고. 그렇게 버틴 게 프리마 막심커피 우정이여.”
복자가 쑥스레 웃었다.
“야, 그때 내가 네 장부 대신 써줬잖아. 너 춤바람 나서! 난 과일상인데 오죽했으면 아직도 내가 봉자네 젓갈집주인인 줄 알겠어? 난 복자여, 박복자!”
흐뭇한 웃음이 강당에 번졌다.
그 웃음 틈에, 선영이 구석에서 서류철을 덮었다. 서류 첫 장엔 ‘주택 보유 박봉자.’라는 딱딱한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때, 강당 문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선영은 서류철을 품에 꼭 안았다. 더 이상 서류가 아닌,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본능적인 다짐이었다.
이번엔, 서류를 들고 찾아오기 전에 내가 먼저 가보자.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문이 열리자 기자 몇 명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마이크가 할머니들 앞으로 들이밀어졌다.
“시니어 모델 클래스가 계속 진행 중이라는데, 같은 노인 이웃이 고립되어 숨진 비극이 일어난 마을에서 행사를 위한 수업이 적절합니까?”
선영이 앞으로 나섰다.
“이건 단순한 행사를 위한 클래스가 아닙니다. 우리 동네는 특성상 주민층이 다양하고 개발지역과 낙후된 비 개발 지역이 섞여 있어 주민 간의 격차가...”
선영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간 목소리들 사이로 사라졌다.
그때 봉자가 벌떡 일어나 마이크 앞으로 다가섰다.
“보여주기? 그럼 집에만 틀어박혀 썩어가야 맞는 거요? 그 집 모자도 세상과 끊겨서 죽은 거 아녀. 부끄럽지만 내가 그 이웃이었소. 폐지 줍는 독거노인인 내가 나와서 걷는 게, 그런 노인도 존엄하게 살고 싶다는 증거요!”
복자가 이어받았다.
“우린 평생 ‘괜찮다’만 하고 살아서 ‘힘들다’고 말할 줄을 모른 게, 이렇게 눈에 보이는 대로 모여야 혀.”
카메라가 돌아가는 동안, 희선은 할머니들 뒤에 조용히 섰다.
“무대는 여기였구나.”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저녁 뉴스에는 워킹 테이프와 믹스커피를 마시고 있는 할머니들이 나란히 잡혔다. '세상은 변해도, 이 맛은 안 변해’라는 봉자의 농담과 함께.
쓰디쓴 세상 속에서도, 달콤한 믹스커피 한 모금은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