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안 괜찮아도 괜찮아

by ㄷㄹ


미래 계획은 세우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기껏 해봤자 향후 1년 정도의 계획만 세우며 살아왔습니다. 살다 보니 어차피 모든 일은 계획대로 안되기에, 항상 변수가 생기고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니까요. 생각했던 대로 바랬던 대로 계획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들이 하나둘씩 늘어나면서부터 회의감에서 벗어나고 좌절을 그만두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굳이 먼 미래의 계획을 세우는 건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는 미래의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나의 먼 미래는 항상 흐릿한 채로 두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생각 없고 대책 없는 미래였고 어떻게 보면 변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유연하고 탄력적인 미래였습니다. 딱 일 년 정도의 계획 그거면 한 해를 살아가기 충분했습니다.
그랬던 내가 지금 먼 미래를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음을 느낍니다. 누구에게나 제 인생에 빛나는 순간은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빛나는 시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빛을 잃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 빛나면 미래도 빛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한해 한해 살아 내면서 정해져 있는 것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게 되었고 그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부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은 굴러가는 눈송이처럼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특히나 집이 주는 안정감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제주도에서의 지난 7년간 5번의 이사를 거치면서 절실히 느꼈습니다. 사람들이 내 집 마련에 혈안이 되어 아등바등 사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집, 나의 공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곳, 언제나 거기에 있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보금자리이자 안식처. 지금까지 나에게는 그런 곳이 없었습니다. 부모님 댁은 나의 공간이 아니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거의 매년 이사를 하면서 처음에는 ‘나는 원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니까 그런 거야’, ‘이렇게 환경을 바꿔주며 사는 것도 새롭게 시작하는 것 같고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집이라는 공간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채 살아왔었습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왔고 당연히 집에 대한 애착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항상 어질러져 있는 채로 두고 청소도 정성 들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주도의 세 번째 집에서 많이 아팠었습니다. 혼자 생활할 수 없을 만큼 아프게 되어 갑작스럽게 집을 빼고 부모님 댁에서 일 년간 요양을 했었는데 그때부터 인 것 같습니다. 집이라는 것이 주는 안정감, 언제든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된 순간이. 제주도로 돌아가도 될 만큼 몸이 회복되었을 때 나는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다시 집을 알아봐야 했고 다시 짐을 옮겨야 했고 다시 가구들을 들여야 했습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살 수 없지 않냐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습니다. 세월이 한해 한해 흐르면서 나이를 먹어가고 당연하게도 나의 육체도 점점 늙어갑니다. 내 육체가 쉴 수 있는 아늑한 나의 집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손 떼 묻은 책들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장이 있고 몇 년 동안 같이 사고 있는 초록의 선인장이 책상머리에 있고 수년 묵은 매실청이 찬장 깊숙이 있고 추억의 물건들을 담아 놓은 먼지가 얇게 덮인 상자가 침대 아래에 있는 그런 공간. 내 육체가 마음 놓고 아무 걱정 없이 푹 쉴 수 있는 곳, 나의 냄새가 배어있는 곳.
더 이상 앞으로 어디서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한 곳에 오래도록, 내 집이라 부를 수 있는 곳에서 오래도록 살고 싶습니다. 서서히 먼 미래의 계획을 세워봅니다. 보금자리이자 안식처를 어디에다 둘 지에 대한 결심이 서면 흔들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튼튼한 기둥에 바람 막아 줄 벽이 생기면 미래를 덮고 있던 안개가 약간은 걷힐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