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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나게 고마운 '유니콘 스토어'

by 팔로 쓰는 앎Arm

"그거 성차별이에요. 모든 남자가 뚝딱 뭔가를 만들어 낼 거란 거."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남자라서가 아니라 철물점 직원이라서 부탁한 거예요."

"나를 잘 알지도 못하잖아요."

"줄자를 갖고 있단 건 알죠."


최근의 나는 갈팡질팡했다. 버려할 인간관계들을 어떻게 끊을지 고민했으며 결국 답은 운동과 명상에서 찾은 터였다. 하지만 일에서 만난 관계들에 대해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흐르는 대로 두자고 생각했고, 사회라는 정글 속 막내에겐 흘러가는 대로 두자는 이 방식이 참 힘들었다. 하나 하나 과거에 비해 큰 일은 아니지만 사소하게 쌓이는 억울한 일들과 부당한 것들에 대해 말을 할 수 없으니 그저 웃어 넘겼다. 운동하고 일하고 영화를 보면서 생각의 회로를 돌렸다. 그게 삶이라고, 다들 이렇게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거라고.


친구 A는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지만 툴툴대는 게 많다. 그냥 그러려니했는데 최근 공격의 화살이 수년간 일하는 내게 향하는 걸 보면서 A의 피해망상에서 멀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편으로 슬펐다. 대학 시절 A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괴리를 거짓말로 채우곤 했다. 가지도 않은 방송국을 갔다 했으며 알지도 못하는 PD를 안다고 거짓말을 술술 뱉었다. 그러나 착한 아이니, 그러려니 하고 자주 만나지 않는 편으로 정해왔다. 그렇지만 A의 거짓말은 점점 더 심해지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는 A를 멀리 하고 싶어질 뿐이었다. 친구에게도 '헤어지자'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난감한 상황.


선배 B는 너무나 불만이 많다. 게다가 소심하다. 예를 들어, 아침마다 모든 자리에 신문을 가져다 두는데(나는 N년차지만 우리 팀에 막내가 없다. 선배들은 십수년차.) B 선배는 유독 자기 자리에 신문을 왜 놓느냐고 매번 말한다. 그러니까, 팀장은 신문을 두길 바라고, B 선배는 본인이 회사에 잘 안 나오니 신문이 있으면 누군가 보고 자기가 없단 걸 유추할 수 있으니 놓지 말라는 것. 응? 아무도 B 선배 자리에 관심없다. 게다가, 팀장에게 하는 자잘한 거짓말들. 또, 뒤에서 하는 말들. 그 모든 게 보이고 들리는데 B 선배는 참 내로남불에 앞뒤 다른 사람. 팀장은 B 선배 연차가 있으니 하나 하나 지적은 안 할 테고, 스트레스는 결국 막내인 내 몫. 멀리 하려고 하면 끈질기게 달라붙는 B 선배의 실체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N년차 사회인의 경험상, 성범죄가 아닌 이상 당한 부당한 일에 대해 상급자에게 말하는 것은 자살 행위. 아무리 정당하고 옳은 말이더라도 상명하복이 중요한 기자 세계서 그런 말을 하는 건 결국 좋지 않게 돌아올 게 뻔할 뻔자.


여기 저기 비위 맞출 일만 많고 내가 꿈꾸던 기자의 모습은 성범죄 피해자가 된 이후 멀어졌고. 그래서 나는 그냥 마음이 슬프다. 게다가 과거 일했던 이들의 흔적은 여기 저기서 엄습해오는데, 별 거 아닌 일이더라도 그 이름이나 연관된 일을 듣는 것은 스트레스. 주변인들이 알 리 없으니 어디서 들은 얄팍한 이야기를 해대는데,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도. 너무 많이 그러니까. 마음이 아프다. 선배 C는 자기 일 안 하면서 조직에도 참여 안 하고 그냥 양아치처럼 회사를 다니는 인물인데, 자꾸 헛소리를 해대서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물들기 싫은 사람.


좋은 면만 보려고 무진장 노력해서, 나는 그냥 참고 다니고 있다. 극단적 비교 대상을 가진 게 좋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좋은 친구나 만나고, 좋은 영화 보고, 운동하면서, 그렇게 단련해야지. 영화를 제목에 달아놓고 주변 일을 주구장창 말한 것은, 이건 글이나 기사가 아니니까 일기니까 이해해주길 바란다. 넷플릭스, 왓챠플레이에서 거의 '사는' 요즘, 유니콘 스토어는 훅 들어온 치유제다. 여러 번 영화관에서 관람함 캡틴 마블의 브리 라슨이 나온다는 것 때문에 봤다기 보다는. 나는 과거부터 유니콘이란 말을 종종 입에 올렸다. 유니콘 이모지도 많이 쓰고, 뭐.. 과거 무진장 선망했던 누군가를 항상 유니콘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게 벌써 5년 전이네.


유니콘 스토어는 제목과 색감부터 내 취향을 '저격'했는데, 내용마저 탐스럽다. 브리 라슨이 감독한 내용.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멋진 사람. 그리고 나는 용기를 얻는다. 나를 괴롭히는 것들을 털고 갈 용기. 사실 시간이 답이라는 명제를 안고 사는 사람으로서, 이렇게 영화를 보면서 나를 점검하고 치유할 기회를 갖는 건, 의식적으로라도 자꾸 하는 행동. 지금 문장들도 비문이 많지만, 일기니까 봐주라. 브리 라슨 특유의 톡톡 튀는 목소리에, 일상에 존재하는 일들을 환상의 시선에서 부드럽게 녹여낸 것들, 게다가 유니콘이라니. 유니콘이라니. 라슨 언니, 관객은 광광 웁니다. 유니콘 스토어에 다이어트 콜라 들고 들어선 그 순간, 나 역시 그냥 마음을 훅 내려놓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시작부터. 미쟝센, 색감, 대사, 맥락. 뭐 하나 빻은 게 없다.


사랑으로 가득찬 유니콘 뿔. 나도 그게 필요해.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필요성도. 최근의 내가 반성하는 건 이거다. 좀 더 적극적으로 친구를 찾아 나서지 않은 것. 내게 다가오는, 나를 좋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연 것. 그러니까, 내 곁의 친구들 중 내가 고른 친구는 단 하나도 없는 셈이다. 학창시절 나는, 보호자의 고집으로 원하지 않은 고등학교에 갔고, 원하지 않은 대학에 진학했다. 학창시절 나는 반짝였고, 사랑은 늘 주위에 있었지만, 늘 얻어맞고 학대당하던, 과거의 일상 속 내게 그런 게 들어올 리 만무했다. 난 늘 절박했고, 돌아보면 그건 살아야 한다는 의지였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으니까. 나는 반짝이는 존재였으니까.


역설적이게도,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살아남을 방법을 위해서, 절박하게 학점을 따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봉사를 갔다. 모든 건,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러니 내겐 누군가를 먼저 사랑하고 다가갈 시간 따위 없었다. 돌아보면, 내게 조금의 여유만 있었더라면, 가질 수 있었을 인연들이 있다. 그러나 합리화해보는 것은, 인간의 관계는 결국 변하기 마련이니, 나는 그 때 이미, 사람보다는 경력이나 일이 더 충직한 친구가 되어줄 것을 알았다는 것. 사람을 믿기보다는, 커리어를 믿은 것. 그건 꽤나 옳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지금도 알고 있다. 단 한 번이라도 이 선택을 의심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지만, 주변에 사랑이 팍팍해진 지금에 와서야 나는 안다. 사랑이 팍팍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으나, 그건 차치하고, 가꿀 관계들이 있었다는 것. 나는 몇 번이고 외면했었다는 것. 내가 자꾸 운동을 하러 가는 건, 생각이 많아 괴로우니까.


늘 밝은 척, 행복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열등감 섞인 소리를 들어도 못 알아들은 척, 성공에만 골몰한 사람 취급 받아도 못 알아들은 척, 싸잡아 깎아내리려 하는 소리를 들어도 못 들은 척, 억울한 일 당해도 그냥 넘기는 척, 아는 사람 얘기가 나와도 모르는 척, 내가 있던 현장 이야기를 들어도 모르는 척, 척, 척, 척…. 지겹다. 다. 하지만! 지겹다고 끝내면 인생이 재미없지. 모든 건 내가 잘 되기 위한 고생길이었을뿐이다! 라고 생각이라도 해야 내가 즐겁게 살 수 있겠지. 다 잊으면 제일 좋고. 웬만큼 아파하고 나면 또 싹 잊겠지. 운동하고 좋아하는 거 보고 그럼 되지. 내게 원석이 있었다고 슬퍼하지 말자. 원석이 있었다면 아직도 있는 거니까. 그걸 깎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힘들었던 거니까. 그럼 지금부터 깎으면 되니까. 막연하게라도 행복하게 생각해야지. 다 좋은 길로 가기 위한 거겠지. 큰그림은 결국 그렇겠지.


그래도, 이 멍청한 어른놀이를 그만 하고 싶은 건 나만 그런 건 아니니까. '유니콘 스토어'를 보면서 얻은 위안. 멍청한 어른들 속에서 멍청한 상명하복을 배우고 멍청한 선배의 거짓말에 속아주고…. 어쩌자고 이런 멍청한 어른들 세상에 들어와버린 걸까. 인생살이 다 그런 걸까. 사랑으로 세상을 보려하면 세상은 단검만 보여주고 때론 경계하면 세상은 왜 그러냐는 듯 달콤한 걸 가끔 주고. 사람과의 관계도, 누구에게 잘해주면 함부로 대하고, 멀리 하면 궁금해 하고. 다 지겹다. 그렇고 그런 것들. 그러니 나는 운동이나 하고 일이나 하고 영화나 봐야지. 그렇게 살아야지. 그러다보면 부정적 주위와 멀어져 나는 다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될 수 있겠지.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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