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아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는 괴물을 대할 때는 반드시 선을 그어줘야 한다.
살다보면 별의별 인간 유형을 다 만나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반드시 남을 짓밟으려는 인간도 많다. 이 업계에도 많다. 다른 업계는 가보지 않아 어떻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일뿐만 아니라 일상을 살아가며 이러한 유형의 인간을 만나는 일은 많다. 크게는 사기를 치려고 하거나 작게는 강제로 선택을 강요한 후 무를 수 없게 하거나 하는 등의 유형 말이다. 이들은 물고 싶은 상대를 가려낸 후 물리나 안 물리나 집요하게 괴롭혀본다. 스스로의 말이 어디까지 먹혀들어가는지 이른바 '간을 보는데', 이조차 평범한 사람에게는 괴로운 일이 되곤 한다.
저들은 다 아는 것처럼 상대를 '가스라이팅' 하는데 도가 텄다고 스스로들을 생각한다. 아는 것과 직접 하는 것은 다르더라도, 인정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아는 것이 아님에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는 척하며 가지게 된 것을 놓을 수 없으며 그걸 들키는 순간 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형의 인간들은 어디에나 존재하기 때문에 반드시 선을 긋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예스걸, 착한 아이 콤플렉스, 완벽주의자가 만날 경우 지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대상들이므로, 빠르게 도망치는 법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들은 자신의 먹거리로 삼은 이가 자신에게서 도망가는 일을 처음엔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오만함과 분노를 가리지 못하고 창피한줄 모르고 모두의 앞에서 쏟아내게 된다. 이러한 일이 과연 적을까. 그렇지 않다. 술에 취해 소주병을 깨 협박하거나 자기가 무서운 사람이라며 들먹이곤 한다. 다짜고짜 전화를 걸어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 함께 겪지 않은 이상 알 수 없는 괴물이다. 단편적인 평가를 내릴 수 없지만, 그들이 살아가면서 자신이 그린 모습과 현실이 달라 느꼈을 무수한 에고의 충돌, 현타, 몰락까지 지켜본다면 이러한 괴물들이 얼마나 스스로를 과신하며 그 때문에 무너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존경하던 부장과 일할 때, 우리 부장이 원칙으로 내세운 것은 기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것은 기자라는 점이다. 우리 부장은 그것 하나만은 아주 잘 지켜줬고, 파급력이 큰 기사를 쓰는 것은 우리 부장과 부서에 자랑거리가 됐다.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 아니냐는 이상한 미움을 받았던 (그조차 소수라 신경쓰지 않아도 되었다) 것만을 제외하면 그 조직에서 모든 기자로서의 자세를 배웠다. 특히 어떤 날, 연락이 유독 많이 오던 한 기업체를 대하던 우리 부장에게서 내가 배운 건, 기자로서 상황을 대하는 사고방식이다. 그 중심에는 기자정신이 있었다. 그 근간은 저항의 의무였다. 이전부터 지켜왔던 그 의무는 그 날을 기점으로 훗날 내가 기자로 일하면서 기댈 수 있는 사고방식이 되어 주었다.
이는 당시 조직뿐 아니라 대부분의 조직에서 지키고 있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최선을 다해 취재하고 기사를 쓰며 그것을 책임진다. 어떤 외압(거창하지만 이 말 밖에는)도 당연히 수긍하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하며 기사를 지켜낸다. 그러한 결론에 가라는 게 그 때의 부장뿐 아니라 그 이전에 내가 존경했던 선배에게서도 배운 것이다. 그게 없는 조직은 원칙이 없이 굴러간다. 우스울뿐이다. 자세히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 조직에 대해 떠돌던 농담 섞인 한 문장에 대해, 나는 생각도 하지 않으려 해왔다. 근데 누구 말대로, 그냥 그게 맞는 것이다.
사람은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는 법을 잃어버리는 순간 경쟁력이 사라진다. 조직도 그렇다. 그러니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 테다. 이러한 원칙이 있는 조직은 필요할 때 단호해지고 정확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다. 그게 없으면 억지 부리고 일하는 사람들은 다 나가며 진짜 억울한 이들이 가득해진다. 이렇게나 조직의 사람들이 많이 나가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다달이 퇴사자들이 쏟아졌다. 이유는 먼 데 있지 않다. 기본조차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들이 당연해지는 순간, 그걸 감당할 필요 없는, 분명한 메시지를 지닌 이들은 나가기 마련이다.